## 71화. 늑대의 비밀을 알게 됐다
두 손이 묶인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글로리아의 눈동자는 말갛기만 했다.
그레이안은 그녀의 눈 속에 계절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하늘이 가장 높은 계절, 가을 말이다.
그는 콕 짚어 어느 계절을 좋아한다고 정한 적 없었으나, 글로리아의 눈을 볼 때면 곧잘 가을이 좋아졌다.
한참 후에야 돌아올 가을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그때가 되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새파란 하늘을 가리키며, 당신의 눈을 꼭 닮았노라고.
“……그때는…… 그 말은…….”
그레이안은 답을 미루며 힘겨운 마음으로 고뇌했다.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럴싸한 말로 얼버무릴까.
후자는 그녀를 기만하는 짓이겠지. 알고 있다. 아는데도, 선뜻 진실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결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분명한 진리를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태 커다란 흔들림 없이 버텨오지 않았던가.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자고 되뇌면서.
하지만 누군가가 특별해진다는 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생긴다는 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동시에 약하게 만들었다. 모순적이게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강해지고 싶지만, 그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키게 되는 것은 두렵다.
그 사람이 자신을 달라진 눈으로 보게 되는 것도, 두렵다.
그러한 마음을 경험해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라, 그는 나아갈 방향을 잃은 배처럼 이리저리 헤맬 따름이었다.
“……다음에…….”
결국, 생각해낸 말은 보잘것없는 차선책이었다.
그레이안은 글로리아의 손목을 묶어놓았던 천을 풀어주며 이야기했다.
“……다음에 제가 준비가 되면, 그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 비밀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괴롭혀온 것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솔즈베리 가문의 치부.
그는 글로리아가 자신의 반려가 되어 준 것이 무척이나 기뻤으나, 그녀마저 이 비밀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과연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동정, 또는 연민. 어쩌면 두려움. 혹은 혐오일지도 모르지.
자신이 답답하게 굴고 있다는 것쯤은 그레이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글로리아가 화를 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안색을 자세히 살펴보는 듯하더니―.
갑작스레 두 팔을 뻗어, 그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
그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하고야 만 그레이안은 심장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몸의 온기가 너무도 따뜻해서…… 어쩐지 울컥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말하기 힘든 이야기예요?”
“…….”
등을 토닥이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며, 넌지시 물어보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 감정의 온도 때문이었을까.
그레이안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게도 말이다.
당황한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여 그 화끈거리는 기운을 얼른 털어내려 애썼다. 자신은 함부로 눈물을 보일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설령 당면한 상대가 그의 하나뿐인 반려일지라도…….
“어휴……. 당신 표정을 보니까 갑자기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아무튼, 됐어요. 기다릴 테니 준비가 되면 말해 줘요.”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왜 그녀는 화를 내지 않을까. 당신은 왜 이다지도 너그럽지? 이 포용력과 관용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레이안은 잊고 있던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비밀이 있었지. 당신에게도.’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만, 기억을 잃은 사람치고는 자아가 또렷한 그녀였다.
언제였던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억을 잃은 사람이 어떤 행동과 특징을 보이는지에 대해 잠깐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가 읽은 의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을 확신하지 못한다.’
물론 기억상실증에 관한 것은 연구가 부족한 분야였기에 100%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레이안은 자신의 안색을 슬그머니 살펴보는 글로리아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확고한 주관을 지닌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
기억을 잃어 혼란스러운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결론 내릴 수밖에. 당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거겠지, 하고.
“…….”
어쩌면 서로 닮은 꼴이었을까. 아니, 그녀의 비밀을 듣기 전까지는 속단하기 이른가.
어느덧 그레이안의 마음은 좀 더 편안해져 있었다.
걱정이 담긴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따뜻한 포옹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둘 다이거나…….
그레이안은 얼마간 조용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 안의 작은 몸에서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글로리아…….”
“……?”
“저…… 당신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 말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아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지 않을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기어코 고개를 들자, 과연, 토끼 눈을 한 글로리아가 시야로 들어왔다.
그레이안은 눈매를 접으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사랑스러움이 넘쳐서, 마음에 다 담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당신을…….’
어떻게 기만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기만할 수 있을까.
늦으나, 빠르나,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일.
고민은 길었으나, 결심을 내린 것은 찰나였다.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이.
* * *
“말씀드리겠습니다.”
“……!”
난데없는 선언에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비밀인지는 몰라도 자못 심각해 보이기에 한 걸음 물러나 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말하겠다고 하니 매우 뜻밖이었다.
‘말하기 힘든 얘기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실은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라고 하는, 말하기 힘든 비밀이 나에게도 있듯이 그도 마찬가지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내가 괜히 그에게 부담을 준 건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아졌다.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그레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이 이상 숨기는 것은 당신을 기만하는 일이 되겠지요. 그렇기에 결정을 내린 것뿐입니다. 마음에 부담을 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만이라는, 그 단어의 느낌이 날카로웠다. 심장이 뾰족한 바늘에 찔린 듯이 따끔했다.
엄밀히 말해, 상대를 기만하고 있는 쪽은 바로 나일 테니.
‘나도 언젠가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 날이 올까? 내가 진짜 글로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얼마만큼의 용기를 내야 할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빙의니, 다른 세계이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간 정신이상자로 몰리기 십상일 테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여러모로 길고 복잡한 이야기입니다만, 부디 인내심을 갖고 들어 주십시오.”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레이안이 설핏 웃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그는 나를 일으켜 앉히더니 자신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
시름에 잠긴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에 화응해 오듯이 그레이안이 내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는 한동안 나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솔즈베리 가문의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
“…….”
“이에 관해선, 저와 아르윈, 그리고 에이프릴, 극소수의 가신들밖에 알지 못합니다.”
에이프릴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으나,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게 아닐까 싶었다. 어찌 됐든 에이프릴은 솔즈베리 공녀이니까.
그레이안의 목소리가 저녁에 깔리는 짙은 어스름처럼 묵직하게 들려왔다.
“……솔즈베리 가문은, 저주받았습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예상했던 것도 같지만…….
하지만, 정말로, 저주라니…….
원작에는 전혀 나온 적 없는 이야기인데.
“……아인스턴 왕가는 오래전부터 솔즈베리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겨 왔지요. 그래서 약 백여 년 전, 솔즈베리 가문을 절멸하고자 아인스턴 왕가에서 한 가지 큰 주술을 준비했습니다.”
“…….”
“아시다시피 샤먼인 주술사의 힘은 마법과는 달리 자연세계의 어떤 거대한 흐름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간섭합니다. 그래서,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아르윈이 갖은 애를 쓰고는 있지만, 진전이 없는 것이지요.”
어떤 저주인지 묻기 전에, 방금 떠오른 의아한 점을 먼저 물어보았다.
“하지만 저주를 건 주술사가 죽으면, 저주도 풀리게 되어 있지 않나요? 백여 년 전이면, 이미 한참 전인데…….”
저주를 건 그 주술사가 죽고도 남았을 세월이다. 아직도 저주가 유지되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
“제 선조들도 그 주술사만 죽으면 저주가 풀리리라 여겼던 모양입니다만, 여전히 저주는 풀리지 않고 있지요. 당시 솔즈베리 가문에 저주를 건 주술사가……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말도 안 돼. 그럼 그 주술사가 백 년은 더 살았다는 말이에요?”
“그런지도요.”
몹시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이 세계의 장생종은 용족, 그리고 극소수의 수인족뿐이었다.
예를 들면 현재 엘로윈 왕국을 다스리는 금사슴 수인들이라든가……. 평범한 동물이 아닌 영물(靈物)로 변할 수 있는 수인족만이 긴 수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수인족 중에 주술사는 없다. 설령 있다고 하여도, 아인스턴 왕가를 위해 힘을 쓸 리 만무한 일.
‘금사슴 일족 중에 변절자가 있을 리 없어. 다른 영물 일족도 마찬가지일 테고……. 용족은 워낙 개체 수가 적고, 어디 처박혀 있는지 모를 은둔형 외톨이들이라 세상사에 간섭하기 꺼리는 편이고…….’
만일 평범한 인간 또는 수인인 척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용족이 있다면, 상당한 괴짜이리라.
그렇기에 매우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백 년도 넘게 살아온 주술사라니…… 그게 인간이기는 한 걸까?
“솔즈베리 가문을 좀먹는 이 저주는, 가문의 직계 후손을 점점 미치게 만들어 종래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짐승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
그 순간, 솔즈베리 성 지하의 늑대들이 생각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리라.
그 늑대들이…….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내 눈에 담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의 입가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가 짙어졌다.
“……이미 예상하셨을 테지만, 지하의 그 늑대들이 바로 제 선조들입니다.”
“……!”
“저주로 인해 죽지도 못하고 계속 늑대의 모습으로 살고 계시지요.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짐승으로서 말입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질 말을― 끔찍한 진실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그리고 저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요.”
그리 말하는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슬프리만치 덤덤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미 오래전부터 체념하고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