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거절은 그만!
심장 떨려 죽겠다.
이 남자, 왜 벌써 1분도 넘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야?!
그의 멱살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것을, 나는 극한의 인내심으로 꾹 참는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백하고 나서 난폭하게 구는 건 좀 아닌 듯해서…….
째깍째깍. 시간만 하릴없이 흐른다. 그레이안이 마침내 입을 연 것은 그 후로 30초는 더 지나서였다.
“고맙습니다, 부인.”
싱긋― 웃는다.
웃는 얼굴이 정말 예쁘지만, 반응이 너무 담백해!
“앞으로…… 그 ‘좋아한다’는 말을―.”
긴장이 풀려 방심하고 있는데, 그가 돌연 거리를 바짝 좁혀 왔다.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다.
“하루에 한 번씩, 매일 해주십시오.”
“……?”
아니, 무슨 그런 요구를.
황당함에 멈춰 있는 내 입술을 그가 또 훔쳐 갔다. 괴도가 따로 없다.
“날마다 해달라니……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인의 남편으로서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만.”
“정당은 무슨, 이 입술 도둑이―.”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입술을 빼앗겼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쁘게 호흡이 뒤섞이기까지 했다.
“하아…….”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흐릿한 시야로, 다정스레 나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살포시 곡선을 그린 은회색 눈은, 밤하늘의 달처럼 아름답다.
“저는 부인을, 언제나 진실로 소중히 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키스할 때도, 나를 어루만질 때도,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이 매우 조심스럽다는 사실을…….
이 순간, 불현듯이 깨닫는다.
“내가 지나치게 욕심을 채우는 바람에, 당신이 망가지면 안 되니까.”
격정에 휩쓸렸을 때조차―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자제력이 강했다.
“……그러니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의문도 표할 수 없었다. 이어서 내 이마에 사뿐히 내려앉는 입맞춤이, 어딘지 서글퍼서.
* * *
“그러나 답답하다.”
“꺄웅.”
내가 무엇 때문에 답답해하는 줄도 모르면서 토끼가 맞장구쳤다.
지금, 토끼와 나는 빙어 낚시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빙어 낚시!
빙어 낚시는 즐거웠다. 비록 에이프릴이 토끼 모습으로 낚시를 한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왜 굳이 토끼 모습으로 낚시를……? 안 불편해??
“아, 걸렸다.”
에이프릴의 왼편 자리를 차지한(오른편 자리는 나다) 제이드가 벌써 20번째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 제이드는 벌써 20마리나 잡았다!
휘익―.
제이드가 낚싯대를 가뿐히 들어 올리자, 그 끝에 은빛 빙어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왔다.
“꺙~.”
토끼가 앞발로 짝짝 손뼉을 쳤다. 이어서 로드리의 낚싯대도 반응이 오는 듯하더니, 제법 큰 빙어를 잡았다.
제이드만큼은 아니지만 로드리도 꽤 잡고 있었다. 심지어 토끼도…… 앞발로 낚싯대를 쥐고 있는데도 잘 잡는다! 진짜 말도 안 돼…….
‘토끼 앞발로도 잘 잡는데 왜 나는 한 마리도 못 잡는 거지?!’
내 바구니만 텅 비어 있어 상대적 박탈감이 심했다.
……맛있는 빙어 잔뜩 잡아 주겠다고 에이프릴에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러다 진짜로 0마리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결국, 약 한 시간 동안 나는 단 한 마리의 빙어도 잡지 못했다.
‘어른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추위는 덜 타서 한심하게 감기에 걸릴 일은 없으니 다행인가. 전부 아르윈이 준 케이프 덕분이다.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위해 아르윈이 저절로 열을 내는 따뜻한 마법 옷감으로 케이프를 지어 주었는데, 솔직히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이었다.
그 블랙맘바가 나를 이토록 잘 챙겨줄 줄이야……. 해가 서쪽에 떴나 싶었다니까.
‘정식적으로 그레이안의 반려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잘 모시겠다, 이건가.’
애들이 잡은 빙어는 주방에서 맛있게 요리해 주었다.
케이프에 대한 답례로 아르윈도 요리를 얻어먹었는데, 피시 차우더 수프를 두 그릇이나 먹고는 화이트 와인까지 몇 병 거덜 내고 갔다. 식성 참 대단하다.
한 마리도 못 잡은 나를 비웃을 줄 알았던 제이드는 의외로 점잖게 굴었다.
기사단에서 지낸 영향인 걸까? 성격 삐딱하던 녀석이 점점 변화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에이프릴은 또 폭식을 했다.
배불리 먹고는 바로 소파에 발라당 드러눕는데, 그 모양새가 꼭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하얀 토끼 풍선 같았다.
에이프릴은 항상 많이 먹는데도 살이 안 찌는 게 신기하다니까. 역시 운동을 해서 그런가.
여하튼 그렇게 하루가 또 저물었다. 솔즈베리 성에서 보내는 겨울은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단 하나, 그레이안이 밤마다 나를 거절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 * *
오늘 밤도 어김없이 그레이안의 방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는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안나가 추천해 준 은방울꽃 향수도 뿌렸고, 머릿결과 피부도 곱게 관리를 받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이 미모를 보고도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고……! 그거인 거다.
“마님……! 꼭 성공하시길 바랄게요!”
요즈음 나의 유일한 연애 상담 상대인 안나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해 주었다.
안나처럼 착한 사람이 내 전속 시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민을 털어놓을 데도 없었을 거다. 나는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보자고……!’
{파이팅~.}
{오늘은 진짜로 아기 만드는 거임??}
{벌써 4번째 실패ㅋㅋ}
{이러다 글로리아 수도승 될 듯.}
……나비들이 놀리는 건지 응원하는 건지 모를 말들을 허공에 띄웠다.
눈알을 굴리며 한숨을 쉰 나는 글자들을 손으로 치워 버리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처럼 그레이안이 또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쾅―!!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젖히자,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레이안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를 일별한 후 난롯가를 슬쩍 살펴보았다. 역시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방 안이 후끈후끈할 정도로 말이다.
자신은 추위를 타지 않으면서, 매일 밤 쳐들어오는 나를 위해 장작을 넣어두는 그레이안이었다.
차라리 상냥하지나 말지, 늘 이렇게 상냥해서 사람 속을 타게 만든다니까.
“부인…….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책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레이안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다가오려다 멈칫하더니,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오호라.’
오늘 밤을 위해 갈고닦은 내 미모가 통한 것이 틀림없으렷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를 향해 빠르게, 그러나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처럼 우아하게 다가갔다.
그레이안은 계속 내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나는 집요하게 그의 눈길을 쫓아가 시선을 잡아두었다.
“……이리 와요, 그레이안.”
그의 손을 꼭 잡고 침대로 이끌자 그레이안이 순순히 이끌려왔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던가.
나는 그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고 일단 침착하게 옷부터 벗기려 했다.
“부, 부인…….”
그러나 셔츠의 단추를 다 풀기도 전에 그레이안이 내 손목을 그러잡으며 만류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는 그를 찌릿 노려보며 짐짓 엄하게 꾸짖듯 말꼬리를 올렸다.
“어허, 또 거절하시려고요?”
“하지만, 부인의 몸은 너무 가냘프고 약해서…….”
고개를 푹 숙인 그레이안이 뺨을 붉히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제가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습니다.”
“…….”
나는 그를 확 눕히며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시험해볼까요? 부서지는지, 안 부서지는지.”
그러고는 재빠른 솜씨로 그의 셔츠를 홱 벗겨 버렸다.
그 순간 그레이안이 자신의 양팔을 교차해 가슴팍을 가렸고, 나는 못내 어이없어하며 실소를 흘렸다.
“뭐 하는 거람? 이미 볼 건 다 봤잖아요, 우리.”
“그, 그렇지만…….”
“팔 치우지 못해욧?!”
내 힘으로 그의 팔을 떼어낼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나는 다른 방법으로 공략에 나섰다.
다름이 아니라, 그를 간지럽히기로 한 것이다.
“……! 부, 부인……!”
옆구리를 파고드는 내 손길에 그레이안이 기겁하며 몸을 잔뜩 웅크렸으나, 나는 계속해서 거침없이 그를 간지럽혔다.
“부, 흐, 그만…….”
그레이안의 입에서 힘없는 웃음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그는 혼신의 힘으로 버티는 듯이 보였지만, 결국 항복하고는 가느다란 치즈처럼 침대에 널브러졌다.
“아, 아학……. 흑…….”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간헐적으로 흘리며 그레이안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공략 성공(?)에 뿌듯함을 느끼면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재차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벌떡 일어난 그레이안이 내 몸을 홱 깔아 눕혔다.
“……!”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레이안은 이를 악문 채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제하는 듯 보였으나, 그의 은회색 눈은 이성과는 거리가 먼, 본능적인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나를 원한다는 걸.
하지만, 왜?
왜 그는 자학에 가까운 인내심을 발휘하면서까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일까?
얼마든지, 나를 욕심내 주어도 좋은데.
“그레이안…….”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며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짝 어루만진 순간이었다.
“앗……!”
그기 내 양쪽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고는, 자신의 셔츠를 북북 찢어 그 천 쪼가리로―.
“……?!”
내 손목을 묶어 버렸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만 깜박이던 나는, 이내 슬그머니 입을 열어 떠보았다.
“아, 그런 취향이었……?”
“아닙니다……!”
그레이안이 펄쩍 뛰며 극구 부정했다. 나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눈썹을 쓱 치켜세웠다.
그의 취향이 위험한 것이라 여태 자제한 거라면, 과연 납득이 간다. 아마 내 몸이 상할까 봐 걱정을…….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당신이 계속 저를 자극할 것만 같아서……. 제발 가만히 계셔 주십시오, 부인. ……저는 이미 한계입니다.”
음, 위험한 취향은 아닌가 보다. 그의 어두운 비밀을 캐낸 듯해(?) 살짝 기뻤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니라면 아닌 거지만…… 줄곧 마음에 걸렸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계속 숨기려 하면 나도 그에게 조금 실망할 것 같다.
인생의 반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그의 비밀이 무엇인지 나에게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비밀이 있는 처지에 너무 이기적으로 구는 거려나.’
하지만 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는 부부잖아. 심지어 그냥 부부도 아니고, 절대적인 각인으로 맺어진 사이인걸.
잠시 숨을 고르던 나는, 이내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안, 전에 당신이 그랬었죠.”
“…….”
“‘이런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그 말은…… 무슨 의미였어요?”
그러자 그레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람 앞의 여린 촛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