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좋아한다는 그 말
‘나랑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긴 했지만.’
사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아니었거든! 눈빛이 매우 살벌했거든!
게다가 그는 무언가 오해한 듯싶었다.
‘……부인이 알폰스 지방까지 내려왔던 까닭은, 그래서였습니까.’
‘네? 어,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제가 갑자기 부인에게 각인해 버린 것이 무척이나 곤란하셨겠군요.’
‘……?’
뭔가 대화가 꼬인 느낌이라 잠시 침착하게 말을 고르는데, 별안간 보좌관이 와서는 급한 사안이 있다며 그레이안을 데리고 가 버렸다.
그 탓에 대화는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찝찝함만 남긴 채로.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해서 풀면 될 테니, 큰 걱정은 안 되지만…….
뭐…… 별일이야 있겠어?
* * *
콘스타블 남작저에서 이미 실컷 연회를 즐기다 왔는데, 솔즈베리 공작성에서도 어김없이 연회가 열렸다.
내가 그의 반려라는 사실을 그레이안이 공표한 직후, 솔즈베리 성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오늘 안에 연회를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악단에 시인까지 불러왔다고 하니, 이쯤 되면 솔즈베리 성 사람들의 추진력이 무서울 지경이다…….
“마님,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주인님께서 드디어 반려를 얻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마님처럼 좋은 분이셔서 더 다행이고요.”
연회장에 모인 솔즈베리의 가신들이 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나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다들 빈말로 축하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나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제 솔즈베리 성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인정을 받았구나…….’
조금, 아니, 많이 뿌듯하다. 여전히 실감은 안 나지만.
“공작 부인! 다시 한번 더 축하드려요! 아, 저쪽에 악단이 와 있던데, 보셨어요? 요즈음 가장 유명한 음유 시인인 레오나드도 와 있대요!”
유독 신나 보이는 에이프릴이 밝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밝아졌다.
툭하면 도망치고 숨어 버리는 울보 토끼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네가 그 음유 시인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흠, 그럼 같이 구경 갈까?”
“네! 좋아요!”
그리 되어, 나는 에이프릴의 손을 꼭 잡고 음유 시인과 악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 뒤를 로드리가 바짝 따라왔다.
“……오오, 이렇게나 영광일 수가! 솔즈베리 공작 부인! 그리고 공녀님!”
음유 시인 레오나드는 여우 수인이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 모습임에도 여우 귀와 꼬리를 그대로 꺼내놓고 있었다.
그의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거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꺄악.” 또는 “귀여워~.” 등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혹시 저 귀와 꼬리가 인기의 비결인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신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위해, 제가 한 곡 바치겠습니다. 부디 들어주시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한 레오나드가 이어서 띠링― 류트를 연주하더니,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대는 한겨울의 여름 장미와도 같아라. 영원한 여름이 그대의 눈동자 속에 있네. 나는 그대의 향기에 취해…….”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여성들이 매우 좋아했다.
나는 큰 감흥이 없어 의례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아름다운 그대여, 영원하라!”
레오나드가 노래를 마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레오나드는 자신의 재능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향해 연극적으로 인사했다.
분명 재수 없어 보여야 할 모습인데, 잘생긴 얼굴이 개연성이라 그런지 그럴듯해 보였다. 뭐, 류트 연주와 노래를 잘하기도 했고.
“어떠셨습니까? 공작 부인.”
레오나드가 길고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나는 저 꼬리를 만져보고 싶다는, 다소 실례되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연주와 노래였어요. 그 명성을 괜히 얻은 게 아니로군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방긋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쏙 패었다. 레오나드는 계속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 공작 부인, 원하신다면 제 귀와 꼬리를 만져보셔도 됩니다.”
“……?!”
뭐, 뭐지? 내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났나? 레오나드의 귀와 꼬리를 너무 빤히 쳐다봤나?
못내 민망해져서 눈을 마구 깜빡이는데, 레오나드가 만져도 괜찮다는 듯이 머리를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진짜 만져봐도 되나? 주변을 쓱 둘러보니 다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만져도 괜찮은 건가 보다.
수인 사회에서는 어느 종족인지에 따라서, 귀와 꼬리를 만지는 것이 실례일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분위기가 느슨한 것을 보니 딱히 문제 될 일은 아닌 듯해, 나는 유혹에 못 이겨 손을 뻗었다.
살짝 떨리는 손끝이, 보송보송한 귀에 닿으려던 순간―.
“……!”
불쑥 뻗어온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꽉 붙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그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와 대조적으로 매우 날카로웠다.
그가 이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어…….”
자상하게 타이르듯 말한 그레이안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물 흐르듯 유연한 동작이었지만 명백히, 단호함이 느껴졌다.
“부인, 당신의 이 손은.”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오직 저만 만져 주셔야지요.”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으나, 다른 사람들의 귀에도 다 들어갔을 터였다.
그의 등장과 함께 연회장은 죽은 듯 고요해졌으니.
이윽고 여기저기서 “꺄악~!” 또는 “어떡해!” 등의 교과서적인 반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돌겠군.
‘이 사람이 이런 쓸데없는 질투를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그가 질투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다.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웠으니, 그런 격렬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내 손등에 입술을 내려앉힌 채로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은회색 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빛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당신은 내 반려이니까, 하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어딘지 소름이 돋아나게 하는 데가 있었다.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내 허리를 감싸 오는 손도, 분명 따뜻하지만 왜인지 한기가 느껴졌다.
날 보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마냥 다정할 뿐이었지만.
“그리고…… 에이프릴?”
그레이안이 몸을 살짝 틀며 손을 뻗자,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이프릴이 총총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단란한 가족처럼 보이는 모양새로 연회장의 상석에 올랐다.
성의 주인이 왔으니, 본격적으로 연회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자, 그럼…….”
포도주가 든 잔을 높이 들어 올린 그레이안이 건배사를 외쳤다.
“내 영원한 반려에게, 세계수의 축복이 내리길 기원하며.”
* * *
연회가 끝난 후, 때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나의 침실.
“저기, 그럼…….”
“예, 부인.”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요!”
한참을 벼르고 있던 탓인지, 목소리에 잔뜩 힘이 실렸다.
긴장한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설핏 웃었다. 마치 귀엽다는 듯한 반응이라, 나는 더더욱 민망해졌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 편히 말씀하시지요.”
몸이 살짝 들리는 듯하더니 어느 틈엔가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 황당함에 입만 달싹이는데, 그레이안이 내 입안에 뭔가를 쏙 넣어 주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혀로 굴렸다. ……이 맛은…… 다름 아닌 박하사탕이었다.
갑자기 웬 사탕 공격인가 싶었지만, 달고 시원한 맛에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사탕을 다 녹여 먹었을 즈음에는 전보다 훨씬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까 하다 만 얘기 말인데요.”
“예, 부인.”
“내가 알폰스 지방으로 내려간 건, 이혼 문제 때문도 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때 당시에, 저와의 이혼을 고려 중이신 게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아니었죠!”
나는 극구 부정하며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팍 때렸다. 매우 탄력 있고 단단한 느낌이 났다. ……대단한 근육이네.
“애초에 당신과 이혼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요.”
“……정말?”
이 늑대가 속고만 살았나. 이번에는 그의 뺨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정말이지 뭐겠어요? 내가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먼저 이, 입을 맞추겠느냐고요……!”
“…….”
그러자 그레이안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작스레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쪽―.
“……?!”
또 도둑 키스였다. 이제 보니 상습이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짐짓 불쌍한 체를 하며 내 손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저는, 당신이 저와의 이혼을 고려 중이신 와중에 제가 멋대로 당신에게 각인한 줄로만 알고…… 괴로웠습니다.”
아, 그거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니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레이안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 행동의 의미를 쉬이 알아차린 듯이.
“그럼 부인은, 정말로 저를 좋아하시는 거로군요.”
“아, 이미 말했잖아요?”
“아니요, 말은 안 하셨죠.”
“……?”
나는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군.
‘……꼭 말로 해야 하나?’
그건, 뭐랄까, 어느 날 불쑥 부모님께 ‘엄마 아빠 사랑해요.’ 하고 말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민망해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가끔은, 진실된 말이 거짓말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안 해주실 겁니까?”
그레이안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재촉했다. 동시에 그의 손은 내 허리를 살살 간지럽히는 중이었고.
역시나 매우 요망한 늑대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앞으로도 이 남자의 페이스에 휩쓸려 좋을 대로 휘둘릴 듯한 예감이 드는데…….
그가 얄미워진 나는 그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으며 내지르듯 말했다.
기어코, ‘그 말’을.
“조……!”
……까지만 하고 다시 입술이 닫혔다. 아, 미치겠네. 이 말이 이렇게 하기 어려운 거였을 줄이야!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거였구나. 상대가 거절할지도 모르는데, 용기를 내서 말한다는 건.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거절당할 일이 없잖아…….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레이안의 셔츠 깃을 꽉 움켜쥔 채로 어깨를 조금 떨다가, 이내 홱 고개를 들었다.
까짓것…… 이번 한 번만 확 저질러 버리자!
“좋아해요.”
첫 숨을 터뜨리듯이 말했다. 발음이 뭉개지지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분명하게 전달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그러나 그레이안은…….
나를 조용히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덧그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