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글로리아는 마수가 싫어졌다
‘준비 동작도 없었는데…… 이제 보니 저 사람, 어려운 마법을 무슨 숨 쉬듯 쓰잖아?’
……진짜로 블랙맘바 수인이 맞을까? 사실은 이무기라거나, 용이라거나…….
‘판타지 세계에서 마법에 특화된 종족 하면, 역시 용뿐인데…….’
곧이어 땅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이나 유리가 깨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지만, 그보다 훨씬 소름 끼쳤다. 아마 식물형 마수가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일 테지.
‘으어…… 좀 무서워지려 한다.’
생각해 보니 마수를 직접 보는 건 빙의한 후로 처음이었다. 책에서 삽화로 봤을 땐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던데, 실제로 보면 다르려나?
‘제발 땅속에서 다 죽었으면…… 땅 밖으로는 한 마리도 튀어나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내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구아아악!!”
마수 한 마리가 안 죽고 기어코 튀어나온 것이다.
‘으아아악! 완전 싫어!’
마수의 실체를 본 나는 기겁해 펄쩍 뛰었다. 실제로 보니 너무너무 징그러웠다.
덩굴 식물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뭔지 모를 촉수? 같은 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꺄아아악. 진짜 싫어!
“공작 부인, 저희가 지켜드릴 테니 너무 겁먹지 마세요!”
오들오들 떠는 날 보며 에이프릴이 늠름하게 말했다……. 저기, 넌 저게 안 징그럽니……? 우리 토끼는 비위도 좋구나…….
“괘애애액―!!”
땅을 마구 채찍질하며 난리를 치던 마수는 그레이안이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단번에 두 동강이 났다.
그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내 눈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었다.
‘역시 늑대들의 수장……!’
깔끔하게 잘린 마수의 일부분이 하늘을 날았다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그 안에서 수천 개의 작은 알 같은 것이 주르륵 흘러나왔…….
“꺄아아악!!”
“공작 부인! 진정하세요!”
애써 나를 달래는 에이프릴을 꼭 껴안은 채 울상을 지었다.
이쪽을 흘끗 본 그레이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검을 고쳐잡았다.
몸의 일부를 잃은 마수가 절단면을 급속도로 재생시키더니, 수백 개의 촉수를 쏘아 급습해 왔다.
“……역시 재생형이었군.”
재생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르윈의 공격을 맞고도 멀쩡했나 보다!
이어서 그레이안과 기사들이 촉수를 전부 잘라냈고, 아르윈이 화염 마법으로 촉수들을 불태웠다.
그가 놓친 촉수들은 땅에 떨어진 채 계속 꿈틀거렸다…….
“흐아아악…….”
“공작 부인……!”
나 진짜로 기절할 거 같아.
‘이게 어딜 봐서 식물형 마수냐……. 외계 생물체 아니냐고.’
여하튼 마수의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윈이 중력 마법으로 놈의 몸체를 뿌리까지 뽑아내자, 그레이안과 기사들이 놈을 조각조각 냈던 것이다.
땅으로 후드득 떨어진 조각들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보다 보니 적응이 되는 듯도 하고……. 이런 거에 적응하고 싶지 않아…….
“다들 정말 굉장해요!”
전투광 토끼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소리쳤다. 이 촉수 조각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나는 네가 더 굉장해 보인다…….
“아이고……. 공작 부인, 괜찮으십니까?”
“……?”
웬일로 아르윈이 나를 챙기려 들어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필시 하얗게 질렸을 내 안색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더니, 기다란 창 같은 것으로 촉수 덩어리 하나를 쿡 찍어 올리며 말했다.
“공작 부인, 너무 그렇게 징그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재생형 마수는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식용이거든요.”
……뭐……?
{앗, 글로리아가 선 채로 기절했다.}
{역시 글로리아에겐 너무 하드했던 것일까…….}
{근데 얘 공포물도 잘만 봤잖아.}
{그건 활자고……. 직접 체험하는 건 아무래도 좀 다르지.}
나비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내 머릿속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는 글자는 단 하나였다.
식용.
‘……식용.’
식용, 식용, 식용…….
저걸…… 먹는다고?
저, 걸……?
{띠링-☆ 멘붕한 글로리아를 위한 거대 텍토룸(식물형, 재생형) 조리법!
1. 텍토룸의 줄기×1, 촉수×2, 알×10을 준비합니다.
2. 텍토룸의 줄기를 잘 씻어 손질한 후, 끓는 물에 10분간 삶습니다.
3. 텍토룸의 촉수를…….}
그리운 타자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충격적인 레시피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현현한 나비 한 마리가 살랑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이거 실제 조리법이야.}
응, 치워.
* * *
식물형 마수들을 전부 퇴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리 예상했던 대로 토양이 마수의 부산물로 오염되었다.
단, 재생형 마수가 남긴 부산물은 오히려 토양에 좋다고 한다.
……짜증 난다.
어찌 됐든 나는 나비들의 힘으로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기로 했다. 이왕이면 화려하게! 멋지게! 그야말로 드론 쇼처럼 연출해야지!
‘올림픽 개막식 뺨치는 드론 쇼를 보여 주겠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는데 엄청나게 대단하더라 하는 소문이 쫙 퍼져나갈 수 있도록……. 음하하하!
{글로리아 그러다 또 쓰러진다.}
{적당히 안 하면 체력에 무리가 갈 텐데…….}
‘됐고, 선택지 내놔.’
나비들이 한숨을 쉬며 곧 선택지를 허공에 띄웠다.
{미션! 알폰스 지방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1. 전체의 30% 정화(약간 화려한 이펙트)
2. 전체의 50% 정화(화려한 이펙트)
3. 전체의 70% 정화(매우 화려한 이펙트)}
‘아니, 왜 70%까지밖에 없어? 100%는 없어?’
{그건 이 지역의 토양 전체를 정화하고 비옥하게 한다는 얘긴데, 너 그러다 앓아누워.}
‘……좀 앓아눕고 말지, 뭐.’
{안 돼.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널 얼마나 걱정할지 생각해 보라고!}
{맞아, 너를 향한 두 사람의 집착과 과보호가 더욱 심해질 거야.}
{글로리아, 솔즈베리 성에 감금될지도.}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무슨 피폐 집착물을 찍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나비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웬만해선 100%로 가고 싶지만,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지.
결국,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3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70%.
‘그리고 매우 화려한 이펙트. 이거 보장해 주는 거지? 100%가 안 된다면 이펙트만이라도 화려해야 해!’
{아, 물론이지. 평창 올림픽 드론 쇼 뺨치는 화려함을 보여줄게.}
……평창 올림픽…… 그립다…….
여하튼 간에, 환한 빛과 함께 현현한 나비들이 하늘을 가득 수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광경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미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시작!’
내 구령이 떨어지자, 나비들은 알폰스 전역에 널리 퍼져나가며 마수로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또 비옥하게 만들어 갔다.
그 광경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어떤 성스러운 것을, 세상을 지키고 이롭게 하는 신성한 무언가를 목도했을 때의 감격―.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나는 그 광경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눈처럼 내려오는, 찬란한 빛의 알갱이들.
마치 온 세상을 축복하는 듯이 아름다웠다.
{완료~!}
{끝. 우리 잘했지? 어서 칭찬해!}
할 일을 모두 마친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와 곁을 서성였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으므로,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래, 잘했어.’
서비스로 쓰다듬는 시늉도 해주었더니, 나비들이 난리를 쳤다.
{글로리아가 쓰다듬어 줬다!}
{감격…….}
{드디어 우리에게 감긴 게 분명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리고 쓰다듬는 시늉만 했지 아무 느낌도 안 났으니까…….
어찌 되었든 토양 정화는 성공적으로 해냈다. 보기에도 매우 화려한 쇼였으니, 곧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갈 터.
‘아인스턴 국왕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뭐, 그의 손에 놀아날 생각 따위 없다는 내 의사는 정확히 전해지겠지.
‘나를 치세에 이용하려 들어? 어림도 없어.’
{의기양양한 글로리아.}
{앞으로도 우리만 믿으라구!}
그래, 고맙다.
* * *
“위대하신 솔즈베리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을 위하여!”
“위하여!”
솔즈베리 공작성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콘스타블 남작이 감사의 의미로 연회를 열어 주었다.
그레이안과 나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고, 우리의 옆자리는 에이프릴 차지였다.
아까부터 여러 건배사가 오갔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안 되니 입술만 살짝 적시는 정도였다.
‘아쉽구만…….’
과실주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오는데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니 너무 슬펐다……. 딱 한 모금만 마시면 안 되겠지? 글로리아의 몸은 너무 알코올 쓰레기라, 또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니까. 흑흑…….
‘주스나 마셔야지.’
그렇게 주스나 홀짝거릴 뿐인 연회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멜, 그렇지. 어서 오려무나.”
“……?”
문득 들려온 콘스타블 남작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살펴보았다.
콘스타블 남작이 살뜰히 챙기고 있는 저 다갈색 머리의 소년은…….
‘……울보 다람쥐 아멜!’
에이프릴에게 장난을 쳤다가 된통 깨진 바로 그 아멜린이었다!
나는 주스를 꿀꺽꿀꺽 마시며 내심 감탄했다.
‘뭐야, 완전 꽃미소년이잖아? 대박.’
콘스타블 남작이 어렸을 때 딱 저런 모습이었으려나? 남작은 지금도 미중년 느낌이니까…….
‘아멜 녀석, 우리 사위 후보들의 주식을 위협할 만큼 잘생겼군.’
이쪽으로 쭈뼛쭈뼛 다가오는 아멜을 나는 빠안히 쳐다보았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 녀석, 정말이지 안쓰러울 정도로 소심하군…….
“……저, 공녀님…….”
그레이안과 내게 묵례를 건넨 후 아멜이 멈춰 선 곳은 다름 아닌 에이프릴의 앞이었다.
사람 모습으로 우아하게 닭다리를 뜯고 있던 에이프릴은 다소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아멜을 쳐다보았다.
아멜이 뭐라 하든 관심 없고 그냥 빨리 닭다리나 마저 뜯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 토끼의 인성, 이대로 괜찮은가.’
아멜은 매우 소심한 기색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용기를 낸 듯이 말했다.
“고, 공녀님, 지난번에는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다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아요.”
시큰둥하게 대답한 에이프릴이 냅킨으로 손과 입가를 닦고는 물잔을 들어 올렸다.
아멜은 에이프릴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솔즈베리 성으로 돌아가신 후에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그렇다. 아멜은 에이프릴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거였다!
연애 감정은 아닌 거 같고…… 그냥 친구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에이프릴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멜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멜을, 한편에서 제이드가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제이드를 옆눈으로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저 녀석, 하여튼 질투의 화신이라니까…….
* * *
‘집이 최고.’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나는 솔즈베리 성으로 돌아와 절절히 실감했다.
‘으아아!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레이안의 반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오후에 대대적으로 공표할 거라고 했지.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다 퍼진 거 같지만.’
그리고 오늘부로 그레이안도 알게 됐다. 아인스턴 국왕이 그와 나의 이혼을 추진하려 한다는 사실을.
내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레이안의 표정은…….
‘……무서웠지.’
처음 보았다. 그의 그런 얼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