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작전 개시
‘……에이프릴은 토끼 모습이 되면 사나워지지만, 인간의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는데……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나는 티베리나 콘스타블 부자를 가만히 떠올려 봤다. 동물 모습일 때도 그들은 인간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아를 잃은 경우를 본 건, 그레이안이 유일……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솔즈베리 성 지하의 늑대들도 영 수상했지.’
……설마 그 늑대들도 수인이란 말인가? ……진짜로?
‘모든’ 늑대 수인이 이성을 잃는다기에는…… 티베리나 다른 늑대 수인들은 멀쩡하단 말이지.
‘그레이안이 이성을 잃고 짐승에 가까워진 게, 각인 기간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만일 그레이안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건 ‘늑대 수인이라서’가 아니라 ‘솔즈베리 가문의 혈통이라서’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늑대 수인들은 멀쩡한데 그레이안만 쉽게 이성을 잃는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흐으으음…….’
영 수상쩍다는 듯이 그레이안을 노려보았으나, 당연히, 실마리를 찾을 순 없었다.
나는 진실을 꿰뚫는 마안 따위 지니고 있지 않으니까.
‘야, 너희 뭔가 할 수 있는 거 없어?’
나비들을 겨냥해 묻자, 곧장 답이 돌아왔다.
{방법이 있긴 해.}
{우린 꽤 많은 걸 할 줄 알거든.}
{그렇지만, 우리의 힘으로 몰래 비밀을 캐내는 것보단, 그레이안에게 직접 듣는 게 낫지 않을까?}
……뭐지? 이놈들이 의젓한 말을 하다니, 뇌에 인지 부조화 현상이 오려 한다.
{뭐라고?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우리는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어어, 그래.’
귀찮아하며 말을 끊자니, 다음으로는 상태창이 습격해 왔다.
{글로리아 너무 무심함.}
{우리를 좀 더 소중히 여기도록!}
{우리를 자주 칭찬하고 쓰다듬어 주도록! (화난 이모티콘) 에이프릴한테 해주는 것처럼!}
‘……너희는 쓰다듬을 방도가 없잖아.’
물리적 실체도 없는 녀석들이 뭔 억지를 부리고 난리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ㅠ_ㅠ 상처.}
{이게 다…… 우리가 나비 모양이라서 그렇다.}
{보송보송한 토끼 모양을 해야 했는데!!}
{그럼 글로리아가 우리한테 엄청 상냥했을 듯.}
{끄덕끄덕;}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어 상태창을 치워 버렸다.
나비들의 원망에 찬 메아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아르윈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르윈은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손에 든 그건…… 물뿌리개인가요?”
그러자 아르윈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쓱 내려다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제가 발명한 식물형 마수 퇴치용 무구(武具)입니다.”
“어……. 그게요?”
아무리 봐도 그냥 모양이 좀 특이한 물뿌리개 같은데. 저게 전투에 쓰이는 도구라니 희한했다.
“모양은 이래도 아주 쓸모 있는 물건입니다. 이 무구를 통해 빠져나간 물은 땅속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있고, 마수를 만나면 순식간에 얼어붙거든요. 그렇게 꽁꽁 얼어버린 마수를, 제가 약간의 땅 흔들림을 일으켜 부숴 버리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그것참 신기한 물건이긴 한데…… 나는 잠자코 눈을 깜박이다가 슬그머니 의문을 표했다.
“근데 그러면 농작물도 피해를 입게 되지 않나요? 마수의 잔해물로 토양이 오염될 수도 있고…….”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무구는 사용할 생각이 없었죠. 원래는 땅속 깊이 숨어 있는 식물형 마수를 유인해내, 공작 각하께서 놈들을 처리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응시하는 아르윈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뭐야, 왜 저러고 본담.
“공작 부인께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신 덕분에 전투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죠. 땅이 오염된대도, 공작 부인께서 세계수의 나비들을 동원해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
그렇지 않냐는 듯이 턱을 까닥한 아르윈이 씩 웃었다.
아하, 그래서 나를 요상하게 쳐다본 거였구만. 나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마수를 퇴치하는 데 힘을 보탤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소문이 퍼져나가도록 할 것이다.
글로리아 아인스턴 솔즈베리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어차피 내가 밝히지 않으면 아인스턴 국왕이 먼저 까발릴 거야. 그전에 선수를 쳐야지.’
내가 먼저 소문을 퍼뜨리면,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아인스턴 국왕이 퍼뜨리면, ‘아인스턴 왕국의 공주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가 된다.
그 두 가지는 서로 확연히 다르다. 후자로 소문이 퍼지게 되면, 아인스턴 국왕의 정치적인 의도에 놀아나는 꼴이니까.
그리고 내가 ‘수인들을 위해, 엘로윈 왕국에서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퍼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 사람들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수인들에게 우호적이 된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될 테니…….
‘내가 의도하는 바가 바로 그거야.’
원래는 내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지만, 아인스턴 국왕 같은 악당의 손에 놀아나느니 내 스스로 공표하는 편이 낫다.
이 힘 때문에 좀 바빠질 순 있겠지. 곤란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어차피 다 내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비들과 계약한 순간부터,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테지…….
“……좋아, 그럼 언제 출발이죠? 오늘 당장 가는 편이 좋겠어요. 문제는 빠르게 해결해야죠.”
적극적으로 나서자니 아르윈이 또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가끔은 저 블랙맘바의 두개골을 열어보고 싶다니까.
“원래는 내일쯤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공작 부인께서 빠르게 해치우길 원하시니 오늘 당장 시작하죠. ……공작 각하께선 이견이 있으신지?”
아르윈이 슬쩍 시선을 던지며 묻자, 그레이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그의 시선은 아르윈이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부인, 나서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굳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또 나에게 체력적인 한계가 올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여태 나비들의 힘을 쓰는 연습을 해 왔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혹시 문제가 생겨도, 지쳐서 잠깐 실신하는 정도이겠지.
“괜찮아요, 무리하는 건 아니니까. 나비들의 힘을 조절하는 것도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거든요.”
두 손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대답해 보이자, 그레이안은 조금 씁쓸한 듯이 웃고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예고도 없이 나를 꼬옥 끌어당겨 안는 게 아닌가!
화, 확실히, 스킨십이 전보다 거침없어진 느낌……!
“부인, 반려의 존재가 늑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그레이안이 내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나는 그야말로 머리가 핑핑 돌 것만 같았다.
“아, 알죠, 반려. 중요한 거잖아요.”
“……부인은 너무 약해서 언제나 걱정입니다. 꼭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아니, 내가 체력이 좀 저질이긴 해도 건강이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라고……! 이 사람의 눈에 나는 허약한 아기 참새쯤으로 비치는 건가?
“어휴, 과보호……. 이래서 늑대들이란…….”
질린다는 기색으로 중얼대는 아르윈 때문에 더더욱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에서는 우리 커플 대주주인 토끼님께서 이쪽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셨다.
* * *
그레이안이 마침내 본정신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사들은…… 울었다.
“주군께서 드디어……!”
“정말로 걱정 많이 했습니다……. 흐어엉…….”
“흐엉엉엉―.”
이 사람들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하기야 모시던 주군이 며칠 내내 이성이라고는 없는 늑대의 모습으로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엄한 상대에게 각인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도 했을 테고.’
기사들은 그레이안의 반려가 나라는 사실에 대체로 안도하는 눈치였다.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인세구원회 사건이 내 이미지 개선에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어.’
그럼 오늘도 이미지 개선을 위해 힘내보도록 할까!
나는 일행과 함께 씩씩하게 걸어 ‘문제의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콘스타블 남작과 그의 아들인 아멜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콘스타블 남작은 만면에 화색을 띠며 우리를 반겼다.
아멜린은 어김없이 다람쥐 모습으로 남작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었는데, 에이프릴을 보자마자 재킷 주머니 속으로 쏙 숨어 버렸다.
“공작 각하께서 무사히 각인 기간을 마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공작 부인께도…… 축하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봐도 콘스타블 남작은 참 좋은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왜 남작을 두고 외도를 저질렀을까? 너무 착한 사람이라 재미가 없었나?
심지어 아멜린이 있는데도 야반도주를 감행한 걸 보면, 가정이나 자식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뭐……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는 법이니까.’
아르윈은 벌써 물뿌리개를 꺼내들고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 옆에 선 로드리와 제이드, 그리고 에이프릴이 아르윈이 하는 바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인 듯, 에이프릴은 사람 모습을 하고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단순한 형태이지만 고급스러운 저 검은 그레이안의 선물 1호였다.
나도 불과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로, 예전에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에게서 얻은 소원권으로 얻어낸 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물 2호, 정확히는 에이프릴의 생일 때 받을 예정인 선물도 검이었는데, 도대체 검을 두 자루씩이나 쥐고 뭘 하려는지 의문이었다…….
‘쌍검 토끼가 되려는 것인가…….’
나는 에이프릴이 쌍검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장면을 문득 상상했다가 얼른 털어냈다. 저, 적응이 안 돼.
‘아르윈이 어련히 잘 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에이프릴을 미리 타일러 둬야겠다.’
혹시 아르윈의 실수로 마수가 땅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더라도, 넌 나서지 말라고 말이다.
에이프릴은 너무 용감해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도망치기보단 싸우려 할 테니까.
“큼큼!”
에이프릴 옆에 슬쩍 다가가 헛기침을 하자니, 세 명의 청소년이 거의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나란히 있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다.
원작에서와 같은 피폐 로맨스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지.
‘뭐, 아무튼…….’
재차 헛기침한 나는 애써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함부로 나서지 말고, 그레이안의 지시에 잘 따르도록 하렴. 로드리, 제이드, 너희 둘도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그런데 나를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왜인지 이상했다. 심지어 제이드는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녀석이 입술을 꾹 물었다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이야기했다.
“글로리아 님, 저희는 걱정하실 필요가 요만큼도 없어요. 오히려 글로리아 님이 가장 걱정이죠.”
뭣이라?
나는 자못 황당해하며 실소를 흘렸다. 로드리와 에이프릴도 제이드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눈치라서 더욱 어이없었다.
“공작 부인은…… 무력이 약하시니까요…….”
“…….”
에이프릴이 제이드의 말을 거들었고, 로드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이들에게마저 최약체로 여겨지다니…… 내 어른으로서의 위엄은 정녕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공작 부인……!”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는 에이프릴을 나는 흐린 눈으로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래, 참 고맙다……. 누구 딸인지 아주 듬직하구나.
어찌 됐든 ‘식물형 마수 퇴치 작전’은 계획대로 실행되었다.
예의 물뿌리개를 든 아르윈이 사뭇 비장한 태도로 밭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일행과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르윈, 저러고 있으니 좀 웃긴다. 귀농한 블랙맘바…….
“흠, 이쯤하면 된 것 같은데…….”
잠시 후 나직이 중얼거린 아르윈이 물뿌리개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이쪽을 보며 짤막히 경고를 주었다.
“땅이 흔들릴 테니, 다들 조심하세요.”
……이윽고, 정말로 지진이 일어났다.
마법을 쓰는 아르윈의 눈동자는 기이할 정도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