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입맞춤은 충동적으로
“저기, 이왕이면 혼자 씻고 싶은데요…….”
“그러십니까?”
뭐가 ‘그러십니까?’야!
어젯밤만 해도 자제심 넘치는 수도승처럼 굴었던 이 남자는, 아침이 되자 어이없게도 매우 적극적으로 변했다.
예를 들면, 내 옷을 손수 벗겨 주려 한다든가.
내가 씻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들어 주려 한다든가!
당연하지만 그가 이러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각인.
‘이제부터는 거리를 지킬 필요 없어졌다 이거지.’
오늘부로, 아니, 각인한 부로 내 사람이다 이거냐. 적극적이라 좋긴 한데, 왜 밤에는 소극적이시죠?? 제가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말입니다.
“저도…… 부인의 머리를 감겨 드리고 싶은데…….”
“…….”
“늘 생각하곤 했지요. 부인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직접 감겨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려니 못내 미안해졌다.
젠장…….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한 거 아닐까? 아니, 이 늑대가 요망한 거다. 거절할 수조차 없게 만들다니!
“……알았어요. 그럼, 머리만…….”
“……! 정말로 허락하신 겁니까?”
“네, 그래요―.”
“감사합니다, 부인.”
으아악! 갑자기 꼭 껴안지 마! 나 지금 수건 한 장밖에 안 걸쳤다고!
분명 온몸이 따끈따끈하게 익어 버렸을 거다.
심장도 콩콩콩 요란하게 뛰고 있을 테지. 이렇게 서로 딱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그 모든 반응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내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그레이안이 피식 웃었다.
우, 웃지 마……!
나는 약이 올라 부들부들 떨다가, 주먹을 쥐고 그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그러나 그레이안은 아무런 반응 없이 멀쩡했다. 괜히 내 손만 아팠다. 코어 근육 끝내주네.
“부인, 허리가 너무 말랑말랑하십니다.”
“……!”
자연스럽게 만지지 마……!
“근육이 매우 부족하시군요. 운동을 좀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한다고! 나도 나름 열심히 한단 말이야! 그런데 살도 안 찌고 근육도 안 붙는 걸 어떡하라고~!!
그레이안처럼 근육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은 내 억울함을 모른다. 이 근육 특권층 같으니라고…….
“부인을 만질 때는…… 늘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습니다.”
글쎄, 늑대일 때 틈만 나면 나에게 달려들었던 걸 생각하면, 딱히 조심한 거 같지도 않은데!
하지만 그건 충동이 강한 늑대의 자아일 때고, 인간의 이성을 되찾은 그는 정말로 조심할 생각인지 나를 살며시 안아 올려 욕조에 내려주었다.
그가 손수 받아둔 목욕물은 적당히 따뜻한 온도였다. 그 안에 들어가 있자 몸이 흐물흐물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온도는 괜찮으십니까?”
“네……. 딱 좋아요.”
“혹시 아프면 말씀하십시오.”
그레이안은 내 어깨와 목을 능숙하게 주물러 주었다. 그의 안마 솜씨는…… 최상이었다.
단순한 늑대인 줄 알았던 내 남편이 알고 보니 SSS급 안마사였다니. 기가 막히게 시원하다…….
“그레이안…….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제 안마사에게 배웠습니다.”
“……그 사람 여자예요?”
“남자입니다.”
그렇구나, 다행이다―는 뭐가 다행이란 거야? 욕실의 온도가 너무 따뜻해서 슬슬 맛 가기 시작하는 거냐고!
{‘그렇지만 여태 어느 여자도 그레이안의 몸을 이런 식으로 주무른 적 없다니, 다행이다.’라고 어김없이 생각하고 마는 글로리아.}
{ㅋㅋㅋ}
{걱정 안 해도 됨 네 남편은 완전 순결한 몸임ㅋㅋ}
조, 조용히 해. 사라져! 이 악마 같은 나비 놈들!
나비들은 나를 활자로 놀리는 데 완전히 재미를 들린 게 분명했다. 진짜 못 말린다니까…….
“그럼, 다음은…….”
내 발치로 스윽 옮겨간 그레이안이 이번에는 발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다. 발바닥을 지압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도대체 못 하는 게 뭘까. 귀족이 아니라 평민으로 태어났어도 잘 먹고 잘살았을 것 같은 남자다.
발 마사지를 마친 후, 그는 내 종아리도 주물러 주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내 무릎 아래 오목한 부분에 닿은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힉.”
“아프십니까?”
“아니요, 간지러워서…….”
뭐, 뭐였을까. 방금 그 오묘한 감각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만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머리를 감겨 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그레이안은 내 머리 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가운 앞섶이 풀릴 듯, 말 듯 한 상태라는 걸…… 나는 방금 알아차렸다. 제, 제대로 꽉 묶어 주면 안 될까!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지만 시력이 차단되니, 촉감이 더욱 생생해졌다.
내 두피를 부드럽게, 하지만 꼼꼼하게 마사지해 주는 그의 손길이 너무도 생생히 느껴졌다. ……이건 이거대로 미치겠네. 흐아아아…….
“기분 좋으십니까?”
“……네.”
대답은 솔직했다.
“앞으로도 자주 해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고맙네요…….”
눈을 감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웃고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 표정을, 이제는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어느새 이렇게 친숙한 사람이 되었을까. 처음에는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나만 그에게 반해 버리는…… 그런 억울한 사태가 벌어질까 봐, 절대 홀리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었는데 말이지…….’
내가…… 이 사람의…….
그레이안 솔즈베리의 반려가 되었다니.
“……? 부인?”
나도 모르게 스르륵 미끄러져 수면 아래로 깊이 잠수해 버렸다. 어쩐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서,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이 내 일부가 아닌 것만 같다. 자꾸만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이 기분을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부인.”
계속 숨을 참고서 잠수해 있던 나를 그레이안이 황급히 건져 올렸다.
걱정 가득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
잠시 움찔했을 뿐, 그레이안은 곧바로 열렬히 화응해 오기 시작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자 몸이 좀 더 밀착되었다.
뭔가 허전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저,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 채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호흡을 나누고 섞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황홀했다.
“하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몽롱하게 눈을 깜박이며 재차 그에게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었다.
“부, 부인……. 잠시만…….”
“……?”
그레이안이 왜인지 민망해하는 낯으로 나를 밀어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몸이 좀 허전한데, 왜…….
“…….”
……수건 어디 갔어?
“끄악!”
너무 경악한 나머지 입 밖으로 괴성을 뱉고 말았다.
그레이안은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든 채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으며, 나를 배신한 수건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중이었다.
‘으아악! 이런 미친―!’
나는 수건을 황급히 낚아채 다시 몸에 둘렀다. 그러고는 그레이안을 피해 욕실 벽에 바짝 붙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가 봐요, 얼른……!”
“네……!”
“마사지는 고마웠어요……!”
“다음에도 해드리겠습니다!”
곧이어 그레이안이 후다닥 욕실을 나갔고, 적막한 이 공간에 나 혼자 남겨졌다.
“…….”
나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또다시 풍덩 잠수해 버렸다.
* * *
“공작님……? ……! 본정신으로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에 에이프릴도 사람 모습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이드복을 입었는데 무진장 귀여웠다.
제이드와 로드리도 에이프릴을 흐뭇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연애 감정이 가득해 보이는 제이드와는 달리 로드리는 그저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이 담백한 눈빛이었다.
“오늘부로 각인 기간이 끝난 거지요? 그렇다면……!”
에이프릴이 분홍 눈을 반짝이며 그레이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의 주식이 성공했다고 확신하는 투자자의 눈빛이었다.
두 손을 꼭 모아 쥔 에이프릴을 향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각인 기간이 끝나면, 각인은 완전히 ‘고정’된다고 한다. 설령 반려가 죽더라도 바꿀 수 없다고.
말 그대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한 것이다.
‘에이프릴 녀석, 어째 나보다 기뻐 보이는데.’
뭐……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하다. 각인이라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에이프릴과도 ‘좀 더 확실하게’ 가족이 된 거니까.
‘……만일, 그레이안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각인했더라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그 생각을 얼른 털어 냈다.
“오늘 파티를 열자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어렵겠죠? 이제부터는 알폰스 지방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레이안이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 어서 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옳긴 하다.
식물형 마수들을 방치했다간 농민들의 피해가 더욱 커질 테니.
“마수로 인한 피해를 막는 게 급선무이니, 파티는 문제를 해결한 후 솔즈베리 공작성에 돌아가서 열도록 하자. ……괜찮으십니까? 부인……?”
뭘 또 소심하게 내 눈치를 본담.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에도 그레이안이 불안한 기색이라, 결국에는 입을 열어야 했지만.
“좋을 대로 하세요. 파티를 열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
“아니죠! 기념 파티는 반드시 열어야 해요! 반려를 얻은 건 수인 사회에서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요!”
……고막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얘가 이렇게 큰소리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건 또 처음 본다.
물론 사람 모습일 때 얘기다. 사람 모습일 때 에이프릴은 곧잘 얌전한 체를 하니까.
“그래, 난 뭐든 상관없―.”
“남 일처럼 말하지 마시고요! 시간은 많으니까 지금부터 파티를 어떻게 열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요, 네?”
너 왜 이렇게 신났니? 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메이드 머리띠도 야무지게 했구만. 귀여운 녀석.
“그래, 파티를 어떻게 열지도 한번 잘 생각해 볼게.”
“좋아요! 저도 돕고 싶으니까 저에게도 공작 부인의 생각을 꼭 말씀해 주세요! 아셨죠?”
신나서 폴짝폴짝 뛰던 에이프릴이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 모습으로 변했다.
바닥에 착지했다가 다시 폴짝 뛰어오르더니, 내 어깨에 착 달라붙는다.
“꺄앙!”
“그래, 토끼야.”
“캬웅꺗.”
“미안. 토끼라고 안 할게.”
토끼 주제에 토끼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게 정말이지 황당할 따름이다…….
“끼아웅 꺄웅 꺗.”
“미안, 뭐라고 하는지 몰라……. 귀걸이 아직도 고장이야.”
“캬앙!”
왜 성질을 부려. 답답하면 네가 사람 모습 하라니까?
* * *
“어이구, 드디어 멀쩡해지셨군요? 공작 각하.”
정원에서 뭔가를 하는 중이던 아르윈이 막 밖으로 나온 우리를 발견하고는 건들거리며 말했다.
그레이안은 그를 한 번 흘겨보더니 예사롭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그래, 다시 늑대로 변하지만 않으면 계속 멀쩡할 테지.”
“……?”
그 말을 들은 나는 어김없이 마음속에 의문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다시 늑대로 변하지만 않으면’ 계속 멀쩡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