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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65화 (65/144)

##  65화. 화끈한 무언가가 불발됨

“저, 부인. 저는 아무래도 다른 방에서 자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허브티가 든 머그컵을 그의 앞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자, 그레이안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여태 쭉 같은 방을 썼는데.”

“그렇지만…….”

머뭇거리던 그레이안이 이내 고개를 떨어트리곤 한숨을 푹 쉬었다. 후회가 역력해 보이는 얼굴인데…… 혹시 나한테 각인한 걸 후회하는 건가?

“…….”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나 혼자서만 너무 들떠 있었나? 그렇지만, 늑대였을 때 그레이안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그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 신경질 나. 그냥 돌직구를 던지자!’

이렇게 침울하게 생각으로 땅 파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나는 내 몫의 컵을 테이블에 탕! 내려놓으며 대뜸 물었다.

“그레이안, 혹시 나한테 각인한 거 후회해요?”

“예……?”

그레이안은 정말로 놀란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윽고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그가 어울리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강한 부정을 하는 그레이안은 처음 본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선 재차 이야기했다.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냥 확인차 물어봤어요.”

{글로리아, 애써 쿨한 척하는 중.}

{그냥 확인차 물어보긴 완전 긴장했었으면서.}

{그레이안이 후회한다고 했으면 울었을 듯ㅋㅋ}

“……?”

뭐, 뭐야 이거. 갑자기 허공에 푸르스름한 글자들이 마구 떠올랐다. 마치 상태창처럼.

세계수의 나비들 짓인 거 같은데, 아니, 진짜 별짓을 다한다니까!

{네가 이런 현판식 상태창을 원하는 것 같길래 힘 좀 내봄.}

{우리 능력 쓰고 싶을 때 이렇게 선택지 고를 수도 있음ㅋㅋㅋ}

{계약자님~ 뭘 할까요? Ver 1

1. 무지개 만들어 줘

2. 딸기를 많이 열리게 해 줘

3. 드론 쇼를 열어 줘

4. 기타 : 터치하여 입력하세요}

나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하지 마. 집어치워.’

{히잉…….}

{ㅠㅠ 너무해.}

{그래도 재밌지 않아? 네가 잠깐 살다 온 세계의 채팅창 같고 재밌음.}

신경질이 난 나는 손을 휘저어 허공의 글자들을 치워 버렸다. 그런 나를 그레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설명했다.

“나비들이 또 장난을 쳐서…….”

“아…….”

그레이안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고, 우리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기를 한 3-4분쯤 지났을까? 그레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생각을 정리한 듯한 얼굴로.

“부인, 제가 늑대일 때 자아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깝긴 하지만, 자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예, 그러니…… 제가 부인에게 각인한 일은, 절대 사고 따위가 아닙니다.”

그는 내가 혹시나 싶어 의심하던 지점을 정확히 짚어 냈다.

‘그가 나에게 각인한 게,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능을 따랐을 뿐인 사고라면?’ 하고 의심하며 걱정하던 부분을 말이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도, 나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도, 흔들림 없이 올곧고 진지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게, 그는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제가 당신에게 각인한 것은…… 당신을 마음 깊이 아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흠, 그, 그래요?”

그거,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뜻이지? 어쩐지 부끄러워지려 하는데. 이쯤에서 나도 당신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말해 줘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레이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내 심장을 철렁하게 하는, 바로 그 미소였다.

“……제 일생의 반려로 선택한 것입니다.”

일생의 반려라는, 그 말의 울림이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각인이니, 반려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이다.

나는 그레이안의, 바로 그런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쿵쿵쿵, 심장이 울림이 크게 느껴졌다.

그동안 그레이안이 바보 같은 개…… 아니, 늑대의 모습이라 실감하지 못했지만, 각인을 기점으로 무언가 확실히 달라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태 서로 간을 보듯 지낼 뿐이었던, 그와 나의 관계가―

비로소 뚜렷한 인연의 끈으로 묶이게 됐다.

“그, 그러니까, 그레이안, 당신은…….”

조금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레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말을, 언제까지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겠다는 듯이.

곧이어 나는 내지르듯 물었다.

“……나를 조, 좋아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으악! 즉답이었다!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다니! 나도 모르게 쿠션을 꽈악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폭 처박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떨리고, 머릿속에 생각이 넘쳤다가 새하얘지기를 반복했다.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레이안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왜인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어 갔다. 마침내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은 순간―.

“히끅!”

……화들짝 놀라며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딸꾹질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쪽팔릴 정도로……. 하지만 내 쪽팔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딸꾹질이 안 멈추고 계속 됐기 때문이다!!

“히끅……!”

“부인, 물 드십시오.”

“끅, 감사, 윽.”

이런 미친 딸꾹질……. 장난해?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나는 그레이안이 내민 컵을 울고 싶은 기분으로 받아들었다.

딸꾹질을 멈추려면, 허리를 숙인 채 코를 막고 물을 마시는 수밖에 없다.

살면서 자주 해봤으니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래야 한다는 게 문제이지.

‘맞아, 나는 사실 그레이안을 조…… 좋아하는데에에! 망할 딸꾹질!’

그래도 딸꾹질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그치는 게 나을 듯싶어, 창피함을 감수하고 ‘딸꾹질 멈추는 법’을 실행했다.

으헝헝. 울고 싶어. 고백받던 타이밍에 이게 무슨 미친 시추에이션이야. 내 인생의 장르는 코미디인 거냐고!

{ㅋㅋㅋ}

{개웃김.}

{힘내~!}

이 빌어먹을 나비들…… 글자 띄우는 거 하지 말랬잖아!

울분을 참으며 물 한 컵을 다 마셨다. 그러고서 숨을 천천히 내쉬며 기다리자, 드디어…… 딸꾹질이 멈췄다! 더는 안 나와!

‘흐앙! 다행이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으며 그레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나를 우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벤츠남.}

{이제 아기 만들기 하는 건가?}

{우리는 슬슬 빠져 줘야 할 듯.}

제발 꺼져…….

지친 기분으로 손을 휘저어 허공의 글자들을 흩뜨려 놓자니, 그레이안이 넌지시 물어 왔다.

“아직도 나비들이 장난을 치는 겁니까?”

“하아……. 네. 아주 몹쓸 녀석들이에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 날 보며 피식 웃은 그가, 별안간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접촉에 황당할 지경이었다.

꼭 10년은 같이 산 부부처럼 당연한 듯이 스킨십을 하다니! 그, 그야 물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자주 있겠지만―.

“……저는 제 마음을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인 차례입니다.”

그리 말하며, 그레이안은 내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가 전에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부인, 늑대 수인에게는 각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각인……이요?’

‘예, 만일 제가 당신에게 각인하게 된다면, 그때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

‘마, 맞아. 그랬었지.’

그런 위험천만하게 들리는 발언을 했었지! 바로 이 사람이!

‘그런데…… 각인당해 버렸네.’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스윽 피했다. 기쁘면서도 무서운 이 감정은 대체 뭐지?

“부인.”

“네넵!”

그가 재촉하듯이 나를 불렀고, 나는 잔뜩 긴장해 대답했다. 하마터면 혀를 씹을 뻔했다. 두 손은 여전히 그레이안에게 꽉 잡힌 채였다.

“…….”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매우 크게,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신중히 말을 골랐다. 웬만하면 그럴싸한 답을 내놓고 싶었다.

“부인…….”

그레이안이 또다시 재촉하듯이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좀 더 간절함이 느껴지는 부름이었다. 게다가 그는…… 몹시도 초조해 보였다.

“…….”

그 순간,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늘 여유롭고 느긋하던 남자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이라니. 놀랍고 신기하면서도, 심장 어딘가가 간지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운 은회색 눈에 내 모습이 가득 담겼다. 그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은으로 만든 거울 같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고 말았다.

이게 다 사람을 홀리는 늑대의 마성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으아아!

속으로 절규하던 나는, 에잇 모르겠다 하고 저질러 버렸다!

“……!”

그와 내 입술이 거칠게 부딪혔다. 얼얼하게 아플 정도로.

……충동적으로 저지르느라 힘 조절에 실패했다. 바보 같은 나……. 흐어엉.

그러나 그레이안은 잠시 주춤했을 뿐, 이내 몹시도 능숙하게 내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내 몸이 뒤로 기울게 했다.

순식간에 눕다시피 한 자세가 된 내 입술을 그가 거칠 것 없이 부드럽게 탐하기 시작했다.

열린 틈으로 따뜻한 숨결이 밀려들었다. 다른 사람의 일부와 뒤섞이는 감각은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잠시 입술을 떨어트린 순간 크게 숨을 뱉어 냈다.

그레이안은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내가 숨을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려 주고는, 다시 천천히 입술을 겹쳐 왔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다른 많은 것이 서로 뒤섞이고 있었다.

체온과 호흡,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자신의 은밀한 일부까지.

……하필이면 이런 때, 나비들이 ‘아기 만들 거냐’고 했던 게 떠오르는 까닭은 어째서일까…….

그레이안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가 내 옷을 벗길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살며시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데려가 반듯이 눕혀 주었다.

“……?”

그러고는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준다. 저기요?

우리…… 그 뭐냐, 뭔가 더 할 게 있지 않나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부인. 이런 저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당함은 둘째치고,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는 점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이런 저를’이라고?

* * *

어젯밤 화끈한 무언가가 불발된 게 너무 어이없었지만, 확실히 오늘 아침부터는 뭔가 달라지긴 달라졌다.

“잘 주무셨습니까?”

일어나면 이렇게 다정히 말을 건네오며 환하게 웃는다. 시, 신혼 같아…….

심지어는 내 몸을 정중히 안아 올려 욕실로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한다.

나와 은근히 거리를 두며 예의를 지키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씻겨 드릴까요? 부인?”

……달라도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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