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정신 차린 짐승과의 밤
‘벌써 몇 잔째야 저게…….’
나는 질색한 표정으로 아르윈을 힐끔거렸다.
알고 보니 엄청난 술고래였구만. 통역 귀걸이를 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싶었으나, 그냥 관두었다. 어차피 안 된다고 할 거 같아서.
‘은근히, 아니, 대놓고 실리주의자란 말이지.’
마법사라 그런가? 아무래도 마법사는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따져야 하는 직업이긴 하지.
여하튼 무난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토끼와 함께 목욕하면서 히아신스 시몬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안나로부터.
“레이디 히아신스가 주인님을 짝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엘로윈 왕국 사교계에서 이미 유명하지요. 무려 수백 통의 연서를 주인님께 보내왔을 정도니까요.”
……수십 통도 많은데, 수백 통? 미친 거 아니야……? 그 정도면 연심이 지나치다 못해 완전히 집착 수준이다.
‘하긴, 그러니 그레이안이 품절남인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지.’
“게다가 에이프릴 아가씨에게도 자주 선물을 보내오거나 접근을 시도한 적이 많았죠. 제 생각엔, 주인님을 공략하기 어려우니 아가씨를 노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목욕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토끼가 끔찍하다는 듯이 “캬앙!” 하고 울었다.
나는 토끼를 건져올려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는 안나에게 맡긴 채였다.
안나는 두피 마사지를 엄청나게 잘한다. 나는 그 시원한 감각을 만끽하며 중얼거렸다.
“에이프릴의 새엄마 역할 먼저 하려고 들었던 거로구나.”
“그런 셈이죠. 결국 실패했지만요.”
에이프릴이 까다롭다는 것은 솔즈베리 공작성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밀턴 부인조차 에이프릴을 다루는 데 애를 먹는데,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지.
“레이디 히아신스가 이 별장까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저도 깜짝 놀랐어요. 주인님이 마님과 결혼하신 후로는 연서를 보내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레이디 히아신스도 포기한 줄로 알았거든요.”
이어진 안나의 말에 나는 잠자코 턱을 주억거렸다.
포기라는 게, 머리로는 쉬워도 마음으로는 어려운 법이지. 누군가를 오래 짝사랑했다면 더더욱.
그렇지만 유부남에게 수작질하려 든 건 선을 넘었어.
“사실 나 오늘 좀 화났었거든. 시몬 양 때문에.”
“당연하죠……. 저 같아도 화났을 거예요.”
“그래서 되는 대로 나쁘게 굴고 시몬 양을 울렸는데 말이야……. 덕분에 내 악녀 이미지가 강화될 거 같네.”
작게 한숨을 쉬자니 안나가 조금 안타까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내 머리에 물을 끼얹어 거품을 헹구어 주며 그녀가 조곤조곤한 투로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저희가 알잖아요. 마님이 사실은 좋은 분이시라는 거.”
“…….”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어느새 안나와도 이렇게 마음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잠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면, 그걸로 족해.”
* * *
‘드디어 6일째, 마지막 밤이로군.’
7일째인 내일이 되면 그레이안이 제정신을 되찾는다고 하니, 오늘 실컷 즐겨둬야(?) 한다.
목욕을 마친 후, 토끼는 안나와 함께 다른 방으로 가 버렸고, 대신 늑대가 이 방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몸을 잔뜩 낮추고 내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모양새가 몹시도 소심해 보인다.
어서 오라며 손짓하자 대번 신이 나서는 꼬리를 홱 올리고 재빨리 달려온다.
이윽고 내 앞에 다다라서는, 꼬리를 붕붕 흔들며 혀를 날름거리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악, 그만 좀 핥아요!”
“헥헥.”
그만하라고 하면 얼른 그만두긴 하는데…… 이 얌전함이 오래가진 않는다. 밤에는 특히나 더 그렇다.
‘왜 밤만 되면 폭주하는 걸까…….’
이번에는 늑대에게 수건을 씌워 양 머리를 해 주었다. 양 머리를 한 늑대…… 가만히 보고 있자니 너무 웃겨서 결국 폭소하고 말았다.
“앩.”
늑대는 또 바보처럼 울며 고개를 갸우뚱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도 늑대에게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졸음이 쏟아져서 침대에 누웠다.
졸리니까 이만 자야지. 좀 더 못 놀아서 아쉽지만……. 그리고 K-토끼 모자가 없는 것도 아쉽다.
움직이는 토끼 귀 모자를 우리 늑대에게 씌우면 정말 웃길 거 같은데.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눈을 감으며 작게 속삭였다.
“잘 자요, 그레이안.”
다행히 늑대는 내 옆에 얌전히 누울 뿐, 또 얼굴을 마구 핥거나 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정 직전, 그가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면서부터였다.
* * *
‘……뭐지?’
귀와 목덜미가 축축한 듯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 2시간 잤나? 푹 잔 느낌이 아니라서 머리가 띵했다.
실눈을 뜨며 손을 휘젓자, 누군가 내 손에 깍지를 껴 왔다. 이내 시야로 들어오는 익숙한 이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 그레이안?”
“…….”
그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깍지 낀 손을 끌어당기더니, 그 위에 정성스레 입을 맞춘다.
“……!”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열이 확 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당황한 채 입을 달싹이는데, 그레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자, 잠시만……!”
얼른 손을 뻗어 그레이안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에 심장이 빠르게 콩닥거린다. 이 사람, 아직 늑대의 자아인 것 같은데……?
“저기, 우리 이런 건 멀쩡한 정신일 때 하면 안 될까요?”
그레이안의 성격상, 나중에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그의 인생에 엄청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물론 지난 일주일간 쌓인 흑역사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귀여운 흑역사라면, 이건 좀 위험한 흑역사라고!’
어떻게 하면 늑대의 자아에 가까운 그레이안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그가 내 손바닥을 살짝 핥았다.
‘으악.’
황급히 손을 떼어내자 그가 날 보며 씨익― 웃는다. 우, 웃지 마. 심장 철렁하니까!
오직 날것 그대로의 야성만이 가득한 그의 눈빛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을 코앞에 둔 듯한 느낌.
‘미, 미치겠다. 아르윈이 준 팔찌를 써야 하나?’
그렇지만 그게 진짜로 전기 감전기면 어떡해?
팔찌와 연결되어 있다는 가죽 목걸이는 그레이안의 목에 여전히 잘 걸려 있었다.
그러니 여차하면 버튼을 누르면 된다. 되는데…….
‘전기 감전이면 동물 학대 아니냐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레이안이 어김없이 고개를 숙여 왔다. 이번에는 내 양손을 침대 시트에 꾹 누른 채로.
‘못 움직이겠어!’
그 상태로 고개만 도리도리 휘젓자 그레이안은 멈칫하더니,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괜찮다고 달래 주기라도 하듯이.
‘이…… 이 늑대가…….’
그리고 자잘한 키스가 이어졌다. 이마에서부터 목덜미까지. 그의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세포 하나하나의 감각이 생생히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흐……. 그레이안…….”
이름을 불러도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분명 그레이안이 맞는데…… 그가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진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
꽉 잡고 있던 내 손을 풀어주고는 그가 내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어서 뺨과 어깨까지,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홀랑 잡아먹힌다는 게 이런 건가?’
그게 어떤 표현인지 드디어 실감이 난다.
다시 고개를 숙인 그레이안이 입술을 겹쳐 왔고, 나는 피할 수 없었다.
두 손이 자유로운데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흐아악…….’
상냥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살살 녹여 먹는 사탕이라도 되는 양, 그는 나를 아주 천천히 공략했다.
의식이 삽시간에 몽롱해지고, 전신을 뒤덮은 열기에 흐물흐물 녹아내릴 때쯤―.
그레이안의 손이 아래로 스윽 미끄러졌고, 그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안 돼!’
나는 재빨리 무릎을 세워 그의 복부와 허리 어디쯤을 찍으며, 두 손으로 그를 확 밀쳐냈다.
의외로 별다른 저항 없이 밀려난 그레이안은 앉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더니,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응?’
뭐, 뭐지? 내가 그레이안을 쓰러트릴 정도로 세게 밀었던가? 그건 아닌 듯한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그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마침 스치듯 시야로 들어온 시계의 침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각인 기간이 끝나는 7일째가 된 것이다. 그것도 매우 공교로운 타이밍에.
‘아르윈은 7일째 저녁 즈음에 그레이안의 상태가 멀쩡해질 거랬는데…….’
손을 뻗어 검지 끝으로 그레이안을 콕콕 찔러 봤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래서 더욱 세게 찔러 봤다. 그제야 작게 움찔거린다.
일단, 정신을 잃거나 한 건 아니로군.
나는 그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슬며시 불러보았다.
“그레이안……?”
“…….”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살금살금 다가가 좀 더 크게 불러보았다.
“그레이안? 정신이 든 거예요?”
그의 어깨를 살짝 손으로 짚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레이안이 그야말로 쏜살같은 속도로 내게서 아주 멀찍이 떨어져 섰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아예 반대편 벽에 가서 붙어 버렸다.
와중에 이불을 챙겨 그걸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다. 흡사 순결을 빼앗긴 남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는 몹시 어이없어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저기요? 공작님? 먼저 덮친 건 그쪽입니다만?
“그레이안, 양심 있어요?”
“……제, 제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당혹한 듯싶었다.
그레이안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의 시선을 곧게 받아쳤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부인, 제가…… 당신에게…….”
“네~ 나한테 키스하고, 아주 물고 빨고 난리였죠~.”
“……!!”
내 말에 화악 얼굴을 붉힌 그레이안이 벽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이불을 꼬옥 끌어안고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달싹거린다.
수치심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당신이 나한테 각인한 건 기억나요?”
“……기억, 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은요?”
“…….”
그레이안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또 새빨갛게 물들었다가, 그러기를 대여섯 번 반복하고는―.
“……흐으.”
앓는 듯한 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쿵 박았다.
자신의 흑역사를 전부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날 애처롭게 응시하며 움츠리거나 말거나,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듯 이야기했다.
“괜찮아요, 그레이안. 부끄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법이죠.”
“…….”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절망한 표정의 그레이안이 자신의 두 손바닥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헝클어 버렸다. 지난 며칠간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개 쓰다듬듯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 그레이안이 체념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 주었다.
“자, 그럼 이만 일어나요. 찬 바닥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 * *
일단 따뜻한 차나 한 잔 마시며 그레이안과 긴히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가 나를 자꾸만 피한다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