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솔즈베리 공작은 내 남편이다
한 여자가 기사의 팔을 뿌리치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내 이름은 히아신스 시몬. 솔즈베리 공작 각하의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왔어요.”
‘……시몬?’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원작에 나왔나? 아니면, 글로리아에 빙의한 후 틈틈이 외워뒀던 귀족 가계도에 적혀 있던 이름인지도.
‘흐음.’
나는 대답을 미루며 여자를 가만히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좋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손이 고왔고 머리도 잘 관리받고 있는 듯이 보였다.
농사나 노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부르주아 집안의 딸이거나, 귀족 영애일 터다.
‘저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보아하니 귀족인 것 같긴 한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시몬이 어디에 있는 가문이죠? 처음 들어봐서.”
내 말에 여자는 몹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화난 듯이 쏘아붙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우리 시몬 백작가를 모를 수가 있어요? 엘로윈 왕국에서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인데……!”
여자는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가문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척 분개했다.
그녀의 양옆에 서 있던 다른 여자들도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흘금거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모를 수도 있죠. 난 아인스턴 왕국 출신이잖아요.”
“…….”
여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다시 화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따져 물었다.
“당신은 지금 솔즈베리 공작 부인으로 있으니, 엘로윈 왕국에 어떤 가문들이 있는지 알아두는 게 상식 아닌가요……? 설마하니 그조차 안 할 정도로 엘로윈 왕국을 무시하는 건가요!”
엘로윈 왕국의 귀족들은 사교계에서도 직설적인 화법을 즐겨 쓴다더니, 과연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인스턴 왕국이었으면 저렇게 대놓고 묻기보단 우아하게 돌려 깠을 텐데.
이 여자가 무슨 이유로 별장을 찾아왔는지는 불 보듯 훤하지만, 저 솔직함은 나쁘지 않았다.
딱히 악의는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할 말 다 할 거지만.
“히아신스 시몬이라고 했죠? 시몬 양, 당신이야말로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네? 그게 무슨……!”
내 반론에 울컥해 쏘아붙이려던 히아신스 시몬이 일순 멈칫했다.
그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지, 자신의 실수를 바로 깨달은 듯이 보였다.
“엘로윈 왕국은 신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들었어요. 귀천에 상관없이 사람 자체를 중요시한다고요. 나도 그런 분위기를 좋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게 아무 때나 무례해도 괜찮다는 것과 같은 이치는 아니잖아요?”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렸다. 그 자세로 한걸음 다가서자, 히아신스 시몬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비록 적통은 아니어도 나는 타국의 왕족인데,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겠어요? 시몬 양?”
……의도한 건 아닌데 아인스턴 왕국식 화법이 나오고 있었다. 이것도 다 글로리아의 몸에 새겨진 습관인가?
히아신스 시몬은 ‘네가 나에게 상식 운운하며 지적한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라는 내 말 뜻을 바로 이해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말이 없었다.
나는 짐짓 피곤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도리어 내가 묻고 싶네요, 시몬 양. 왜 이 별장을 찾아온 거죠? 설마…… 내가 생각한 그 이유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 이유 때문이 맞겠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레이안의 배우자인 내 앞에서는 아닌 척하겠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닌 척할 테고…….
……그런데 웬걸? 히아신스 시몬은 너무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 이유 때문이 맞아요. 그래요, 저는 솔즈베리 공작님의 각인 상대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혹시 머리가 단세포인가?
기사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곤란한 표정이던 그들은 이제는 거의 미친 사람 보듯이 히아신스 시몬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감상이다.
“……시몬 양, 제정신은 맞죠?”
“당연히 저는 아주 멀쩡한 상태예요. 솔즈베리 공작 부인, 당신은…… 타국인이잖아요. 게다가 수인을 혐오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당신이 솔즈베리 공작님과 결혼한 건 어디까지나 정략에 의해서였죠. 어차피 곧 이혼하실 거 아닌가요? 그러니 공작님이 누군가에게 각인하신다면, 그분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봐요.”
한 줄 요약 : 너는 수인 혐오자잖아! 나는 솔즈베리 공작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내가 반려가 되어야 한다고!
……라는 속내를 곧이곧대로 말하다니,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엘로윈의 귀족들은 다 시몬 양 같나요?”
“글쎄요, 적어도 아인스턴의 귀족들처럼 음험하진 않죠.”
“시몬 양은 아인스턴 왕국을 무척 싫어하나 보네요.”
“아인스턴 왕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 어디 저뿐이겠어요?”
쭉 대화해 보니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 히아신스 시몬은 아인스턴 왕국인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는 모양이다.
둘, 잘은 몰라도 이 여자는 오래전부터 그레이안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셋, 엘로윈 왕국의 귀족 사교계는 나를 반기지 않을 듯싶다.
‘뭐…… 세 번째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루아침에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솔즈베리 공작성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해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리고 첫 번째도 뭐, 예상 가능한 범위고.’
문제는 두 번째인데.
히아신스 시몬이라는 인물이 원작에 나왔던가? 나왔어도 아마…… 조무래기 조연이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기억을 못 하지.
‘그레이안을 짝사랑하는 조연들이 몇 명 나오긴 했는데, 이 여자도 그중 하나인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인기가 많다.
수인을 혐오한다는 아인스턴 왕국인들조차,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레이안을 보면 얼굴을 붉힐 정도이니…….
‘곤란하다. 내 남편이 치명적일 정도로 잘나서.’
지금은 한 마리의 개가 됐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히아신스 시몬의 시선이 우리 늑대에게 붙박여 있다.
그녀의 눈빛에서 간절함마저 엿보인다. 마치 늑대가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레이안이 각인한 반려는 나거든. 내심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보란 듯이 손을 뻗어 늑대를 쓰다듬었다.
늑대는 그저 좋다는 듯이 나를 향해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 광경을 본 히아신스 시몬의 표정이 대번 딱딱하게 굳는다.
“……설마, 아니겠지…….”
안됐지만 그 설마가 맞아.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 하고, 자신이 특별해질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가엾은 시몬 양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할 때다.
히아신스 시몬이 사교계에 소문을 쫙 퍼뜨려 준다면, 그레이안을 노리고 달려드는 불나방들의 숫자도 훨씬 줄어들겠지.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레이안을 향한 당신의 진심을 모독할 생각은 없어요, 시몬 양.”
“…….”
“하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에요. 유부남에게 이러는 거, 매우 실례되는 행동인 거 알죠? 내가 당신을 고발해도 할 말 없을걸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히아신스 시몬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시겠지. 단세포인가 싶을 정도로 솔직해도 염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니…….
“당신의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어요, 시몬 양.”
“…….”
“내가 부드럽게 말해서 실감이 잘 안 나나 본데, 나는 상당히 화가 났거든요.”
목소리를 내리깔며 히아신스 시몬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는지, 드디어 제대로 자각한 것일까.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둘게요. 다신 이런 일 없었으면 해요, 시몬 양. 다음에 또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당신을 귀족 윤리 위원회에 고발하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몸을 틀어 늑대를 정면에서 마주 보았다. 내 다리에 꼬리를 감고 있던 늑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왉.” 하고 낮게 울었다.
옅게 미소를 지은 나는 늑대를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앉아.”
“웕.”
냉큼 자리에 앉은 늑대에게 손을 내밀며 재차 지시했다.
“손.”
“왉.”
늑대가 내 손바닥 위에 커다란 앞발을 척 올렸다. 말도 잘 듣지. 나는 웃으며 늑대를 칭찬해 주었다.
“참 잘했어요.”
“왉!”
신이 난 늑대가 바닥에 냅다 드러누우며 배를 드러냈다.
어서 만져달라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까짓것 만져 주지 뭐.’
곧바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늑대의 보송보송한 배를 쓱쓱 만져 주었다. 그러자 늑대는 좋아라 하며 뒹굴거렸다.
“……말도 안 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모양인지 히아신스 시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개만 돌려 흘긋 보자니, 충격에 젖은 그녀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점점 울상이 되어 가는 게, 눈물마저 글썽일 기세다. 별로 불쌍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다 자업자득이지 뭐.
“소, 솔즈베리 공작님이…….”
“나한테 각인했거든요. 보다시피.”
아예 쐐기를 박아 버리자, 히아신스 시몬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막상 우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한 것 같기도…… 아니지, 내가 그녀를 동정할 이유는 없다.
어딜 감히 결혼한 남자에게 수작을 걸어? 이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 준 것에 감사하라고. 다른 귀부인이었으면 진즉에 귀족 윤리 위원회에 고발했을 거다.
“흐윽…… 흐어엉…….”
히아신스 시몬은 펑펑 울면서 별장을 떠났다. 잘못한 건 쟤인데 내가 울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나만 악녀가 된 거 같다.
그녀의 친구인지 시녀인지는 모르겠으나 함께 온 다른 여자들이 나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서 더더욱.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귀나 후볐다. 어쩌라고. 내가 틀린 말 했나.
나중에 시몬 양과 그녀의 지인들이 사교계에서 나를 따돌리려 할지도 모르지만, 별로 타격은 없을 것 같다.
‘겨우 그 정도에 타격 입을 쏘냐. 순두부 멘탈도 아니고.’
나는 씩 웃으며 늑대를 돌아보았다. 얌전히 앉아 있던 늑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왉.” 하고 짖었다.
나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상냥한 어조로 제안했다.
“그럼 이만 들어갈까요?”
* * *
방으로 돌아와, 나는 늑대 꾸미기를 마저 했다.
토끼도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로드리 그리고 제이드와 대련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흐음…….’
요란하게 꾸며놓은 늑대를 빤히 보다가, 못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카메라가 없는 게 너무 아쉽다. 늑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전부 촬영해두고 싶은데…….
결국,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르윈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대충 카메라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그런 비슷한 마도구를 만들 수 있느냐고.
그러자 아르윈은 별 희한한 부탁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만들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만, 들어가는 마정석이 좀 많을 듯싶군요.”
“아하…….”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그런 물건은 필수적인 게 아니니까요. 솔즈베리 공작령에 마정석 광산이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 채굴되는 마정석은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귀한 마정석으로 쓸데없는 물건 만들지 말자는 얘기다.
나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 내 손등을 늑대가 쓱쓱 핥고는, 아르윈을 향해 “컹!” 하고 짖었다.
왜 자기 반려 기를 죽이냐며 아르윈을 나무라는 듯하다.
아르윈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겁니다만?”
“컹!”
“어휴, 늑대들은 이게 문제야. 너무 애처가라니까.”
아르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는 와인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가 식사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는데, 고기와 과일 위주로 먹는 것까지는 평범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르윈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