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솔즈베리 공작은 인기가 많다
나는 그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옆자리에 반듯이 누웠다. 어둠 속에서 그레이안이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행동도 꼭 주인의 관심을 바라는 개 같아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난 잘 거예요. 당신도 얼른 자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그레이안의 시선이 느껴졌고, 자려고 노력해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신경이 예민하게 바짝 곤두서 있는 느낌. ……그레이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살짝 실눈을 뜨고 보자니 확실하다. 도대체 언제 자려는 거야?
“안 자요?”
결국 참다 못해 물었다. 눈을 번쩍 뜨고 그레이안을 쏘아보자 그가 사뭇 가련한 표정을 짓는다. 기가 막히는구만. 나는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뭘 원하는데요.”
“…….”
그레이안은 나를 곧게 응시하며 살그머니 거리를 좁혀 오더니, 무척이나 소심한 동작으로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정확히는, 마치 내 품에 파고들듯이 안겨 왔다. 두 팔로 내 허리를 휘감으며…….
‘……아니, 이게 뭐…….’
나는 당황해 눈만 깜박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개가 주인님 품에 쏙 안겨 어리광을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렇게까지 개 같을 필요가?!’
우두머리 늑대의 위엄은 어디로 가고 한 마리의 대형견만 남았단 말인가! 황당함에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레이안, 이러고 자자고요?”
끄덕. 그레이안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고개를 움직여 긍정했다. 애정을 갈구하는 저 눈빛이 부담스럽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늑대인데…….
“진짜로 잠만 잘 거죠? 엄한 생각 안 한다고 약속해요.”
“…….”
이번에는 바로 수긍하지 않고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친다. 환장하시겠네.
“뽀뽀해 줄 테니 이걸로 만족하세요. 알겠죠?”
그러고서 그레이안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 주자, 그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내 품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미치겠네. 왜 이렇게 귀엽게 굴고 난리람.
“나 졸려요. 이제 진짜로 잘 거니까 깨우지 말기……. 허튼수작도 부리지 말고.”
그레이안이 또 “힝.”과 비슷한 소리를 냈지만,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품을 가득 채운 포근한 온기에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 * *
‘……오, 꿀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레이안은 다시 늑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언제 왔는지 토끼가 늑대 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둘은 서로 그루밍을 해주는 중이었는데, 토끼가 핥는 면적은 매우 좁은 반면 늑대는 한 번 핥으면 토끼의 얼굴 전체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토끼는 그게 별로였는지 이따금 앞발을 휘둘러 늑대를 때리기도 했다.
늑대는 반격하지 않고 얌전히 맞기만 했다. 온순한 늑대와 포악한 토끼……. 둘이 성격 바뀐 거 아니냐고. 보통 반대 아니야?
‘……아니지, 토끼는 원래 화나면 밥그릇을 던져 버릴 정도로 사나운 동물이니까.’
반면 늑대는 갯과 동물이다. 개는 대체로 착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형견일수록 더 순한 거 같다. 친구가 기르는 몰티즈는 매우 앙칼졌지만 레트리버는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했거든.
“에이프릴, 그레이안, 잘 잤어요?”
“꺄웅!”
“컹!”
하하하…….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네. 이 사람들(?)이 제 가족입니다, 여러분……. 왠지 해탈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나자니, 늑대와 토끼도 내 뒤를 냉큼 쫓아왔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들어갈 건데.”
욕실까지 들어오려던 늑대와 토끼가 멈칫했다.
그래도 프라이버시는 존중할 줄 아는 늑대와 토끼인지, 꼬리를 살랑거리거나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물러난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욕실 문을 닫았다. 수인을 가족으로 두기……. 여러모로 쉽지 않다.
씻고 나와 보니, 늑대와 토끼가 욕실 문 바로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아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바닥 안 차가워?
얼른 토끼부터 안아 올리자니,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늑대가 부럽다는 듯이 토끼를 올려다본다.
나는 한 팔로 토끼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늑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면서 이야기했다.
“같이 아침 먹을까요? 에이프릴, 너도 식사 전이지?”
“꺄잉.”
“웕.”
“그래…….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긍정의 뜻이겠지. 이놈의 귀걸이는 대체 언제 멀쩡해지나.”
늑대와 토끼랑 사이좋게 먹기 위해, 식사는 소파에서 하기로 했다.
하인들이 로우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날랐고, 토끼는 고기 요리가 나올 때마다 폴짝 뛰었다.
반면에 늑대는 점잖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나잇값은 하는군.
“에이프릴, 고기랑 야채 5:5 비율로 먹어.”
“끼앙~.”
“…….”
쟤 분명 싫다고 한 거지? 야채는 거들떠도 안 보고 고기만 먹는 걸 보니 확실하다. 고기밖에 모르는 육식 토끼 같으니…….
“그레이안은…….”
뭐부터 먹으려나 싶어 살펴보자, 당근을 아삭아삭 씹고 있는 늑대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
잠깐만.
둘이 역할 바뀐 거 아니야? 토끼가 당근을 먹고 늑대가 고기를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심지어 그레이안은 당근에 이어 샐러리도 맛있게 먹었고, 방울토마토나 양상추 등, 신선한 야채 위주로 식사했다.
그러고는 토끼가 먹다 남긴 고기 한 점만 날름 먹을 뿐이었다. 고기에 전혀 집착하지 않았다. 어디의 토끼와는 달리.
“캬항~.”
배불러서 기분 좋아진 토끼가 소파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배가 아주 빵빵한 걸 보니 배 터지도록 먹었다 보다.
그래도 마지막에 양상추 한 조각 정도는 먹어줘서 다행이긴 한데…….
‘그렇지만 역시 야채를 너무 적게 먹어…….’
저 편식 토끼의 편식을 고칠 방법을 궁리해 봐야겠다. 육식 위주의 식사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자, 그럼…… 이제 나가서 산책 좀 할까요?”
“꺗잉!”
“컹!”
토끼와 늑대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딱 봐도 좋다는 뜻이렷다. 나는 흡사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늑대와 토끼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서 장작을 패던 기사들이 우리를 보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주군. 그리고 공작 부인…….”
“크르릉…….”
기사들이 말만 걸으려 치면 저렇게 경계를 하니, 다들 늑대의 눈치를 살피며 쩔쩔맸다.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늑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지 말아요. 다들 당신에게 충성을 바친 믿음직한 기사들인데.”
“앍.”
그러자 늑대는 언제 사납게 굴었냐는 듯 바보처럼 울었고, 기사들은 왜인지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뭘 또 감동하고 난리람. 나는 기사들을 외면하며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별장 근처의 숲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고요함과 피톤치드의 향기. 가만히 눈을 감고 느껴 보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따금 새의 노랫소리와 작은 동물이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디선가 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물가가 있나 본데.”
탐방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물가를 찾기 시작하자, 토끼와 늑대가 내 뒤를 졸졸졸 쫓아왔다.
그렇게 셋이 숲속을 헤집고 다니기를 한참, 마침내 물가를 찾아냈다.
“와, 진짜 맑은 물이야.”
근방의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는 물줄기는 폭이 좁고 깊이가 얕아 숲속 작은 동물들의 놀이터로 딱 좋아 보였다.
아마 여기서 물도 마시고 갈 테지. 귀여운 다람쥐나 토끼가 물을 마시고 가는 광경을 상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으악, 차가워.”
……그렇지만 물놀이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겨울이니 당연한가.
토끼와 늑대는 물을 한 모금씩 맛보더니 앞발을 폭 담가 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 누가 사진기 좀 발명해 주지 않으려나. 마도 공학으로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엇, 주군, 공작 부인! 그리고 공녀님!”
숲속에서 한두 시간쯤 놀다가 밖으로 나오니 벌써 점심 무렵이었다.
우리 곁으로 쪼르르 달려온 기사가 어서 식사를 하시라며 채근하는 탓에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또 순무 대잔치이려나 하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고, 토끼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에 담백한 생선구이도 있고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도 있었다.
……순무 요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뭐, 그레이안은 편식을 안 하니까.
“캬앙.”
토끼가 순무 샐러드를 보곤 질색을 했다. 그래, 넌 먹지 마. 나랑 늑대가 다 먹을게.
이윽고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토끼는 메추리구이부터 집어 들었다.
그럴 줄은 알았다만……. 그래도 좀 골고루 먹어 줬으면 싶어서 방울토마토 하나를 토끼의 접시에 슬쩍 올리자, 토끼가 날 향해 앞니를 드러내며 “캬악.” 하고 울었다.
그래, 미안. 일단 고기부터 실컷 먹어라.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늑대는 신선한 야채 위주로 식사를 했다.
인기 없는 순무 샐러드나 순무 볶음도 곧잘 먹어서, 기사들이 늑대를 보며 무척 뿌듯해했다.
역시 순무 요리는 기사들이 한 모양이지. 다른 요리들은 콘스타블 남작의 요리사가 실력을 발휘한 것 같지만.
‘그나저나 아르윈은 어디서 뭘 하는 거지? 점심 안 먹나?’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으나 아르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어디 가서 굶고 다닐 사람처럼은 안 보이니 알아서 잘 먹을 테지만……. 그 블랙맘바가 뭔가를 먹는 모습은 역시 상상이 잘 안 간단 말이지. 주식이 뭔지 궁금하다. 왠지 남다르고 심상치 않을 듯한 느낌……!
여하튼 간에 식사는 평화롭게 마무리했다.
한 기사가 공손하게 건넨 순무를 토끼가 앞발로 후려쳐 날린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도 토끼는 채소와 고기를 1:9 비율로 먹었지만…….
“에이프릴, 자꾸 채소만 적게 먹을 거야? 그러다 건강 나빠져.”
“꺄웅잇~.”
알 바냐는 듯이 말한 토끼가 제이드와 로드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식후 대련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래, 고기를 많이 먹을 거면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라.
* * *
숲속 별장에서 지낸 지 어느덧 6일째. 벌써 내일이면 그레이안의 각인 기간이 끝난다니 실감이 안 났다. 시간 참 빨리 흐른다니까.
‘그전에 하고 싶은 거 실컷 해둬야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늑대를 불렀다.
“그레이안? 이리 와 봐요.”
“왉.”
말 잘 듣는 늑대가 창가를 구경하다가 내 곁으로 쫄래쫄래 다가왔다. 나는 후후 웃으며 빨간색 리본을 집어 들었다……. 우후후…….
“얽?”
“푸핫.”
늑대 머리에 리본을 매어주자, 그 모습이 더욱 바보 같아서 웃겼다.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데, 늑대가 주둥이 끝으로 나를 쿡쿡 찔렀다.
이 바보 늑대는 내가 복통이 있어 그러는 줄 알고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하, 아파서, 구르는 거, 푸핫, 아니에요.”
“앩.”
“아 진짜……. 짖는 것도 웃겨. 왜 이렇게 바보 같지?”
폭소하며 구르는 나를 늑대는 온순히 앉아 꼬리를 살랑거리며 쳐다보았다. 자존심도 없나 보다.
“아무튼, 다음은…….”
이번에는 늑대 머리에 꽃을 달아 주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운 게 느껴졌다.
멈칫한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가만히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무슨 일이기에…….
“……?”
6일 내내 평화롭기만 하던 별장의 정원.
그런데 오늘은 웬 여자들이 난입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뭐야……?’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저 여자들은 그레이안의 각인 기간을 노리고 별장을 찾아온 것 같았다……!
‘아니, 여긴 또 어떻게 찾았대.’
나는 기막혀하며 얼른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내 뒤를 늑대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컹!”
이윽고 정원에 도착해 늑대가 크게 한 번 짖자, 여자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봤다.
“설마 저 늑대가……?!”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기사들은 여자들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무력이 없는 일반인을 힘으로 밀어붙이려니 내키지 않는 까닭일 터.
그렇다면 내가 나서주지. 나는 팔짱을 끼고 비장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레이안을 보고 흥분해 있던 여자들이 나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어, 서, 설마……?”
그 설마가 맞다.
나는 일부러 악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쏘아붙였다.
“내가 글로리아 아인스턴이고 솔즈베리 공작 부인인데, 내 남편에게는 무슨 볼일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