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61화 (61/144)

##  61화. 짐승과의 밤

아르윈이 별장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레이안이 나에게 각인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축하드립니다, 공작 부인.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고 따르는 충성스러운 개를 한 마리 얻으셨군요.”

“…….”

저거 농담이지?

농담이긴 한가 보다. 아르윈의 태도가 사뭇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상사를 대비해 공작 각하에게 마법을 걸어뒀었죠. 혹시 각하께서 누군가에게 각인하시면 제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미 각인한 후에 알아차리면 소용없지 않나요?”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내 물음에 아르윈이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친놈이었기에 늘 위험해 보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더욱 위험해 보였다.

“각인 후 일주일 내로 각인한 상대가 죽으면, 각인이 풀리게 되어 있거든요.”

미친. 뭐라고?

나는 경악해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다가 급히 따져 물었다.

“그럼, 그레이안이 엄한 사람에게 각인하기라도 했으면 그 사람을 죽였을 거란 말이에요?”

“설마요.”

아르윈이 눈썹을 팔(八) 자로 축 늘어뜨렸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나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였다. 아니, 잔인한 얘기를 한 건 댁이잖아요!

“각인한 상대를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잠깐, 심장을 멎게 하면 됩니다.”

“그걸로 된다고요……?”

“예, 심장이 잠깐이라도 멎으면, 상대가 죽은 것으로 인식해 각인이 풀리게 됩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각인 후 일주일 내여야 효과가 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상대의 심장이 멎어도 각인이 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듣고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만일 각인한 반려가 죽으면, 늑대 수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각인 기간의 늑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수컷들을 몹시 경계하는 한편, 반려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심해지지요. 그래서 이렇게…….”

“크르릉…….”

“제가 공작 부인에게 손을 댄 채로 마력을 조금만 끌어올려도, 아주 죽일 듯이 굽니다. 보시다시피.”

아르윈과 내 사이를 잽싸게 파고든 늑대가 아르윈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토끼도. 앞니를 드러내며 캬악거리고 있었다. 아니, 넌 왜…….

“에이프릴 공녀님, 저는 맹세코 공작 부인께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공작님의 반응을 보려고 마력을 조금 끌어올렸을 뿐인데요.”

“캬앙.”

“공녀님, 전에는 저를 그렇게나 잘 따르시더니…… 저 정말로 섭섭합니다.”

아르윈이 손수건을 꺼내더니 연극적으로 눈물을 찍었다. 토끼는 그런 아르윈을 무시하며 앞발로 늑대 머리를 꾹꾹이 하고 있었다.

……어째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은 동물 모습일 때 비로소 죽이 잘 맞는 느낌이다.

“……아무튼, 당분간은 공작 부인께서 여러모로 고생 좀 하셔야 할 겁니다.”

“……?”

“공작님은 자제심이 강한 편이지만…… 그래도 방심하지 마시고, 자― 제가 이걸 드릴 테니, 위급 상황에 버튼을 누르십시오.”

……이게 뭔데? 나는 얼떨떨해하며 아르윈이 내민 팔찌를 받아들었다. 버튼처럼 생긴 붉은 보석이 박힌 가죽 팔찌였다.

이 팔찌와 비슷하게 생긴 목걸이를 늑대의 목에 걸어 주며, 아르윈이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 해로운 물건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아니, 좀 두려운데. 이거 괜찮은 거냐고. 누르면 늑대가 전기 감전을 당하는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동물 학대잖아!

“아,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간은 이 별장에서 지내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각인 기간의 늑대는 다소 정상이 아니라서, 여러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음…….”

아르윈은 늑대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밤에 잠깐은 공작님께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지만 짐승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테니 조심하십시오.”

지, 짐승이나 다름없는 상태?

그럼 사람 모습으로 늑대처럼 군다는 말이야? 내 얼굴을 막 핥고?

‘끄악.’

“앞으로 일주일 후면 공작님의 상태도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글쎄, 걱정하지 말라고는 해도…….

앞으로 어떤 일주일이 펼쳐질지 겁나는데.

나는 불안한 눈으로 늑대를 내려다보았다. 늑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천진한 강아지처럼 헥헥거릴 따름이었다.

* * *

토끼는 아르윈이 돌보겠다며 데려갔다.

에이프릴은 나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아르윈이 작은 소리로 무슨 말인가 속삭이자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대체 뭔 말로 고집불통 토끼를 설득한 걸까?

‘그러고 보니 아르윈이 내 심장 부근을 확인해 보라고 했는데…….’

어차피 목욕할 생각이었기에 옷을 다 벗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심장 부근을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심장 부근에 웬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확연히 티가 날 만큼 선명했다.

문양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구조였다. 언뜻 초승달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옷으로 가려지는 위치니 평소에 티는 안 나겠지만…….”

기분이 묘하다. 내 몸에 이런 게 남다니.

그레이안이 나에게 각인했다는 사실이……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꿈같고 믿어지지 않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실은 조금 기쁜가?

당황스럽지만…… 은근히 뿌듯한가?

그에게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흐음…….’

거울 속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문양을 어루만지다가, 욕조의 물이 넘치는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됐고, 목욕이나 하자.’

푹 한숨을 내쉬며 욕조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잠그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마도 공학으로 수도가 발달되어 있어 언제나 깨끗하고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물론 이것도 빈곤층에는 해당되지 않는 편의이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운 좋게 왕족의 몸에 빙의해, 대귀족과 결혼했으니?’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빙의 전 나는 달마다 약간의 후원금을 내는 게 고작인 소시민이었다.

대학생 알바비와 용돈을 모아 낼 수 있는 후원금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마 직장인이 되어서도 별반 다를 바 없었으리라.

직장인 초봉이 짠 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지. 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 정도로 학벌이 좋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이제는 다이아수저니까.’

다이아수저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지. 어느 세상이든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거든. 씁쓸하지만…… 이번에는 그 씁쓸한 진리를 역이용해 보자.

‘모든 수인을 구할 순 없어도, 최대한 많은 수인을 구하기로 했잖아.’

……좋아, 그레이안의 각인 사태와 알폰스 지방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본격적인 사업 구상에 들어간다.

어려운 점이 생기면 그레이안과 함께 논의해야지. ……이제는, 그럴 만한 관계라고…… 봐도 좋을 테니까.

‘늑대 수인이, 평생 동안 사랑할 단 하나뿐인 반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수면 아래로 꼬르륵 잠수해 들어갔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 * *

“수고했어요. 경들도 가서 푹 쉬어요.”

“옙……! 공작 부인!”

늑대를 목욕시켜 데려온 기사들이 나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레이안이 각인한 상대가 나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기사들의 태도는 예전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뭐라 해야 할까, 좀 더 우러러보는 느낌? 혹은 경외시하는 느낌? 아무튼 그랬다.

각인이라는 게, 늑대 수인 사회에서 엄청난 일이긴 한가 보다.

“……그럼 우리도 이만 잘까요? 이리로 와요.”

기사들이 방을 나간 후, 침대로 다가가며 말하자니 늑대가 나를 쪼르르 쫓아왔다.

헥헥거리며 꼬리를 붕붕 흔드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개다.

“자, 여기 누워요.”

침대에 누워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자, 늑대가 냉큼 침대 위로 올라와 그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얼굴을 쓱 핥는다. 으아아악. 이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감촉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앞으로 일주일간 이 별장에서 지내야 한다니…… 흠……. 내일은 뭘 하고 놀까요? 숲 탐방이라도 할까요? 이 숲에 위험한 야생 동물은 없다던데.”

아마 이 늑대가 근방에서 최고로 위험한 짐승일 것이다.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척 봐도 위협적으로 보이니까. 내 앞에선 마냥 개처럼 굴지만.

나는 목욕해서인지 더욱 보송보송한 늑대 털을 쓱쓱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좋은 향기도 난다.

“생각해 보니 궁금해졌는데…… 각인 기간이 끝나고 나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잊게 되는 거예요? 아니면 기억하려나?”

“웕.”

그렇다는 건지, 아니란 건지 모르겠다. 그냥 바보 같다. 나는 바보 늑대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설마 당신이 나에게 각인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왉.”

“……왜 나예요? 그레이안, 나 좋아해요?”

그러자 별안간 벌떡 일어난 늑대가 나를 확 덮치더니, 내 얼굴을 미친 듯이 핥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나는 내적 비명을 지르며 입과 눈을 꾹 닫았다.

더는 핥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쯤 슬쩍 실눈을 뜨자, 내 위에 올라탄 채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늑대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

왜, 왜 저렇게 빤히 보는 걸까. 왠지 부담스러워지려 한다.

이미 충분히 부담스럽지만……. 긴장한 채로 늑대를 힐끔거리는데, 갑자기 늑대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

순식간에 사람 모습으로 변한 늑대, 아니, 그레이안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은회색 눈에서는 이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야성이었다.

그 순간 아르윈이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아마 밤에 잠깐 동안은 공작님께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렇지만 짐승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테니 조심하십시오.’

그래, 분명 짐승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거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지금 그레이안의 상태는…… 모습만 사람이고, 정신은 늑대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어…… 어째 불안한데.’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안이 기습하듯 나를 꼭 껴안았다.

놀란 나는 그대로 뻣뻣이 굳어 버렸고, 그레이안은 늑대 모습일 때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으악, 미친!’

그를 밀어내며 몸부림치자, 그레이안이 내 몸을 꽉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이 요망한 늑대가!

나는 그의 볼을 콱 꼬집으며 말했다.

“공작님, 정신 좀 차리시죠? 이거 다 흑역사로 남는다고요?”

“히잉…….”

“……?”

바, 방금 내가 뭘 들은 거냐.

기가 막혀 눈을 마구 깜박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더 달려들지 말고 곱게 잠이나 자요. 알았으면 얼른 비켜!”

그레이안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 주었지만, 그러면서 도둑처럼 내 입술을 한번 훔쳐 갔다.

그러고는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는 모양새가 매우 어이없었다.

나는 내 옆에 얌전히 누운 그레이안의 몸 위에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속옷 한 장 걸친 반라의 상태였다.

“…….”

진짜 미치고 펄쩍 뛰겠구만. 나는 이불을 그레이안의 목까지 쭉 당겨 올렸다.

“아휴, 정말이지…….”

늑대 모습이 귀엽긴 하지만, 얼른 제정신으로 돌아와 주면 좋겠다. 감당하기 벅차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