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내가 귀여운 거 나도 알아
(59/144)
59화. 내가 귀여운 거 나도 알아
(59/144)
59화. 내가 귀여운 거 나도 알아
2022.06.25.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갈색 머리의 여성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뭐라고……? 그게 진짜야?”
“진짜인지는 나도 모른다니까? 근데 이게 사실이면…… 솔즈베리 공작이 각인한 여자는, 공작 부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거든? 늑대 수인에게 각인은 절대적이니까. 그래서 일부러 그 오두막 근처를 알짱거리는 여자들도 있대.”
“아니, 왜 그렇게까지……? 정말 별의별 사람이 다 있구나. 게다가 솔즈베리 공작은 기혼이잖아? 아인스턴 왕국의 공주와 결혼했다면서.”
“뭐, 그렇긴 한데…… 그 결혼이 과연 얼마나 오래가겠니? 얼마 안 가 이혼한다는 데 돈을 건 사람들도 있다니까?”
“흐음…….”
두 여성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쯤 지나, 늑대에 관한 소문을 먼저 입에 올렸던 여성이 슬쩍 말을 꺼냈다.
“……실은, 그래서 나도 그 오두막에 가보려고.”
“뭐―? 미쳤어? 그러다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아니 그게, 그 늑대가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대.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늑대 수인인 거 같거든. 정말로 솔즈베리 공작일 수도 있잖아.”
“허어…….”
“공작 부인이 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라…….”
헛된 꿈을 꾸는 친구를 보며, 갈색 머리의 여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흐음.’
한편, 그들을 몰래 미행하던 제이드는 눈살을 설핏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숲속 오두막에 출몰하는 정체불명의 늑대라…….’
촉이 왔다. ‘이거다.’ 싶은 촉이.
제이드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여태 감으로 때려 맞춰 틀린 적이 얼마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신의 감을 믿어봐도 좋다고 확신했다.
‘한번 가봐야겠는데. 그 오두막에…….’
일단은, 글로리아 님과 에이프릴에게 보고하는 게 우선이지만.
슬쩍 입꼬리를 휘어 비딱한 미소를 지은 제이드가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알아낸 정보로 점수를 얻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 * *
“……그러니까, 그 늑대가 바로 그레이안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네, 그런가 보더라고요.”
“그리고 미혼 여성들이 그레이안을 노리고 있다……?”
“……네, 그런 거 같더라고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토끼도 거의 동시에 폴짝 뛰어올랐다.
“끼애웅!”
“아, 통역기 또 고장 났어!”
“……!”
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제이드가 작게 움찔했다. 나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녀석을 향해 말했다.
“이거, 자꾸만 통역이 됐다, 안 됐다 하더라고. 아무래도 고장 난 거 같은데. 고칠 순 없는 거야?”
“……제가 그쪽으론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저보단 아르윈 님에게 물어보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 미친 블랙맘바에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불편한 대로 살래. 진짜로 완전히 고장 나게 되면, 그때 말해보지 뭐…….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웬 상도덕(?) 없는 여자들이 그레이안을 노린다니……! 장난해? 그 남자는 내 남편이라고! 유부남이란 말이야!
“나도 가봐야겠어! 그 버려진 오두막이라는 곳에!”
“끄앵꺗!”
내 외침에 토끼가 추임새를 넣었다.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편일 테지. 우리 토끼니까.
“네, 위치는 제가 미리 알아뒀는데, 당장 가실 건가요?”
“당연하지. 옷 좀 갈아입을 테니 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로드리, 너도.”
비장하게 명령하자, 제이드와 로드리가 고개를 넙죽 숙이며 대답했다.
“넵.”
“예, 공작 부인.”
그리고 약 10분 후, 나는 따뜻한 옷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더해서 토끼에게도 빨간 리본이 달린 분홍색 목도리를 해주었다. ……근데 얘가 사람 모습으로 변하면, 목도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애초에 변신할 때마다 옷은 어디로 수납(?)하는 거지?!
‘모, 모르겠다. 생각을 포기한다.’
수인에 대한 미스터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어?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네요? 에이프릴은…….”
마침 제이드가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토끼를 보곤 멈칫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게 아닌가.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에이프릴?”
“꺄웅잇~.”
“얘가 뭐래?”
“‘나도 알아~.’라고 하시네요……. 하……. 너무 귀여워…….”
나는 어이없어하며 에이프릴과 제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기고만장 토끼도 웃기지만 제이드 녀석은 더 웃긴다. 콩깍지가 아주 단단히 씌었구만.
여하튼 간에 우리는 예의 서쪽 숲으로 출발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막 떠나려던 차, 저 멀리서 달려오는 콘스타블 남작이 보였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공작 부인! 공녀님!”
그를 흘끗 본 마부가 나에게 물었다.
“멈출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계속 가.”
그리하여 마차는 콘스타블 남작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남작의 의도는 나를 숲속 오두막에 갈 수 없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그의 이야기는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순식간에 다람쥐로 변한 남작이, 매우 재빠른 속도로 마차를 향해 뛰어든 것이다!
‘미, 미친.’
마차의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다람쥐가 제발 멈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러다 사고 나겠다 싶어, 나는 마부에게 다급히 명령했다.
“잠깐 멈춰. 급정지하진 말고!”
“예, 공작 부인.”
다행히 마부는 내 요청대로 부드럽게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마자, 나는 창문을 열어 다람쥐를 덥석 손에 잡았다.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지…… 만일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져 바퀴에 깔리기라도 했으면―.
‘으아아악!’
끔찍한 상상에 내적 비명을 질렀다가, 이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서 눈을 감았다 떴다.
‘후, 침착하자.’
그런 다음에 내 손바닥 위의 다람쥐를 살펴보았다. 긁힌 데 하나 없이 멀쩡하군. 다행이다.
나는 조금 나무라는 투로 물었다.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거예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포르르…….”
콘스타블남작다람쥐가 애처롭게 울며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불쌍해 보이는 표정은 이 집안의 전매특허인가 보다! 다람쥐 수인은 다 이런가?
“제가 지금 통역 귀걸이가 작동을 안 해서…… 사람 모습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보들보들해 보이는 다람쥐 털을 만져 보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참을 인(忍)을 열 번 새기며 꾹 참았다.
이 다람쥐는 콘스타블 남작이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어른이라고! 만지작대는 건 매우 버릇없고 실례되는 행동이야! 참아!
“포르.”
짧게 대꾸한 다람쥐가 맞은편 자리로 냉큼 이동하더니 곧바로 모습을 바꿨다. 콘스타블 남작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오자 나는 안도의 한숨마저 내쉬었다.
귀여운 다람쥐의 모습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다람쥐를 만져 보고 싶은 유혹에 더는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솔즈베리 공작 부인……. 서쪽 숲의 버려진 오두막에 가시려는 거지요?”
“네, 맞아요.”
숨길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즉답을 내놓자, 콘스타블 남작이 그럴 줄 알았다며 푹 한숨을 쉬었다.
“공작 부인. 그 오두막에 출몰하는 늑대는…… 공작 각하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요? 그 오두막에 늑대가 출몰한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보네요?”
“끼앙!”
토끼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듯 한마디 거들었고, 로드리와 제이드도 콘스타블 남작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던 콘스타블 남작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작 부인. 오두막의 늑대는…… 공작 각하가 아니라 그분의 수하입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다른 곳에 계십니다.”
“다른 곳에요……?”
“예, 그곳까지…… 이제부터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콘스타블 남작이 안내해 준 장소는 다름 아닌 숲속의 근사한 별장이었다. 버려진 오두막 따위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두막은 일종의 연막으로, 그레이안의 수하가 일부러 그곳을 오가며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오두막에 늑대가 출몰한다.’라는 소문이 돌게 한 모양이었다. 진짜 그레이안이 있는 장소를 감추기 위해서.
‘말인즉, 진짜 그레이안은 바로 이 별장에 있다는 얘기지.’
콘스타블 남작이 별장의 정원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었고, 나는 당당히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레이안…….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만나고 말겠어!
“엇, 남작님! 또 오셨군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주고 가신 순무를 요리해 봤는데, 꽤 먹을 만― 흐아악?! 고, 공작 부인?!”
마침 나를 발견한 그레이안의 기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기사를 노려보았다. 놀라긴 뭘 놀래! 내가 귀신이냐!
“그레이안, 어디 있어요?”
“예? 아, 그, 그게―.”
내가 추궁하자 기사는 쩔쩔매며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기사를 흘겨보며 홱 지나쳐 갔고,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기사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자, 잠시만, 공작 부인!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켜요. 안 비키면…….”
나는 나비들을 확 소환해 냈다. 영롱한 나비들이 내뿜는 빛의 물결에 놀란 기사가 주춤 물러났다.
……사실 나비들에게 물리 공격력 따위는 없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힘은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벌써 두 번이나 위협용으로 써먹고 있지.
멍하니 서 있는 기사를 뿌리치고 별장의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왔다.
내 품 안의 토끼가 분홍 코를 벌름거렸다. ……순무로 요리를 했다고 그랬던가? 그럼 그레이안도 식당에 있는 걸까?
나는 식당을 찾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런 구조의 별장에서 식당은 보통 거실 옆이니까…….
‘찾았다, 여기야.’
식당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식당과 주방은 문 하나를 두고 이어지는 구조였고, 기사들이 바삐 오가며 음식을 식탁에 나르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순무 샐러드, 순무 튀김, 닭고기 순무 수프, 구운 순무, 순무 볶음, 순무 샌드위치…….
그야말로 순무의 향연이었다.
“캬앙!”
토끼가 끔찍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육식 토끼는 순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침 토끼 울음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이쪽을 돌아보고는, 이내 뻣뻣이 굳었다가 대경실색했다.
“고, 공작 부인?! 공녀님?!”
“여, 여긴 어떻게……!”
나는 허둥지둥하는 기사들을 차갑게 응시하며 물었다.
“그레이안은 어디에 있죠?”
* * *
기사들은 안돼돼돼 클리셰를 따랐다.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그레이안이 있는 장소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여기에 그레이안이 있다는 말이지.’
별장의 뒤뜰에 자리한 쉼터. 나는 기사들과 콘스타블 남작의 조언에 따라 혼자 이곳에 왔다.
늑대가 된 그레이안에게 공격성은 없지만, ‘다른 쪽으로’ 예민해져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나 혼자 가야 한다나, 뭐라나…….
‘다른 쪽으로 예민해져 있다는 게 무슨 뜻이길래…… 응?’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중, 풀숲 사이로 살짝 빠져나온 검은색의 털 뭉치가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털 뭉치가 아니라 짐승의 꼬리였다. 게다가 끄트머리에 살짝 흰 털이 섞여 있어 매우 귀여워 보였다.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 꼬리는…… 틀림없이 늑대 그레이안의 꼬리다!
‘마, 만져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