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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늑대에 대한 소문 (58/144)


58화. 늑대에 대한 소문
2022.06.22.



 
그러나 내 의심은 1초도 채 가지 못했다.


‘아니지, 우리 에이프릴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화냈을 리 없어! 비록 폭군 토끼이긴 하지만!’

나는 다람쥐를 노려보는 토끼의 머리와 귀를 열심히 쓰다듬었다. 아무튼 간에 엄마는 우리 토끼 편이야.


“포르르, 포롯…….”

다람쥐가 뭐라고 이야기했으나 역시나 통역 귀걸이가 작동하지 않았다. 나중에 제이드에게 A/S 되냐고 물어봐야지.


“으음, 그랬구나.”

“……?”

그런데 콘스타블 남작은 다람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다람쥐 수인이라서? 아니면 혹시 토끼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나?


‘알고 보니 진짜 드루이드는 콘스타블 남작이었던 건가!’

―라고 설레발치기도 잠시, 남작이 스피드×건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아, 같은 다람쥐 수인끼리는 어느 정도 뜻이 통합니다. 동물 모습일 때는 더 잘 통하지요.”

……역시 그런 거였구나. 전에 그레이안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그레이안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멜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 이 아이의 이름은 아멜린입니다. 공녀님과 동갑이지요.”

이름이 아멜린이었구나. 아멜은 애칭인 모양이다. 나는 덜덜 떠는 다람쥐 아멜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멜이 화들짝 놀라 꼬리를 말고 몸을 웅크렸다. ……다람쥐꼬리, 만져 보고 싶어.


“여하튼, 아멜이 공녀님에게 장난을 쳤다고 합니다…….”

“……?”

무슨 장난을 쳤기에 우리 착하고 너그러운 토끼가 극대노했을까? 나는 토끼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멜은 소심하지만 장난기가 많아서, 평소에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고 도망가곤 합니다.”

흐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우리 에이프릴이 조금 사납긴 해도 아무런 이유 없이 화를 내는 녀석은 아니에요.”

내 품 안의 토끼가 캬악거리며 앞발로 내 손을 샥샥 때렸다. 나는 능숙하게 토끼 앞발을 잡아 만지작거렸다.

그런 우리를 보며 콘스타블 남작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네, 그렇지요. 공녀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화내신 건 아닐 겁니다. 아멜이 짓궂은 장난으로 공녀님을 노하게 했을 테지요.”

토끼가 매우 그렇다는 듯이 캬악거렸다. 다람쥐는 벌벌벌벌 떨었다.


“그러니까, 아멜……. 정확히 뭘 어떻게 했다고?”

“……포, 포르르, 포롯…… 포로롱.”

다람쥐 울음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마치 새소리 같았다. 아멜은 소심하게 울먹이며 에이프릴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저 녀석, 저럴 거면 장난은 왜 치는 거지? 완전 쫄보 다람쥐잖아!


“으음, 네가 심했구나…….”

“포롱…….”

한숨을 쉰 콘스타블 남작이 큰 손으로 다람쥐를 쓰다듬고는 재차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지나가다 공녀님을 발견한 하녀가 공녀님께 간식을 드렸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아멜이 간식에 흙을 뿌렸다고 합니다.”

“……무슨 간식이었는데요?”

“그게…… 아멜?”

“포롯…….”

“바비큐 꼬치였다는군요.”

바비큐 꼬치.

고기가 아닌가! 에이프릴이 극대노할 만도 하다!

게다가 음식에 흙을 뿌리다니……! 음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죄는 무거운 법. 나는 다람쥐를 빤히 쳐다보며 짐짓 무섭게 말했다.


“아멜, 그런 식으로 음식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

크게 움찔한 다람쥐가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몹시 불쌍해 보이지만, 그래도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지.


“세상에는 빵 한 조각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많아. 그런 사람들 앞에서 음식에 흙을 뿌린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나쁜 짓이니?”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아멜이 바로 반성하는 기미를 보였다. ……뭐, 음식을 소중히 하지 않은 건 잘못했지만, 얘도 근본이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포르르…….” (잘못했어요…….)

‘……어?’

그때 갑자기 아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통역 귀걸이가 드디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감격해 얼굴을 활짝 피며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귀여운 다람쥐와 이야기할 수 있다니……! 최고!


“그래, 네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야 어찌 됐든,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지?”

“포르…….” (네…….)

다람쥐가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다람쥐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딱히 없는데…… 실제로 보니까 너무 귀엽다! 만져 보고 싶어!


‘아, 안 돼. 참아!’

지금은 공작 부인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고……! 나는 애써 점잖은 체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에이프릴에게도 사과해. 네가 한 짓은 아무리 장난이었더라도 무척 실례되는 행동이었어.”

“포르…… 포르르…….” (미안해요……. 공녀님…….)

그러자 에이프릴은 ‘내가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줄 줄 알고?’ 하는 눈빛으로 아멜을 쏘아보았다. 제법 뒤끝이 강한 토끼다. 하기야 에이프릴은 고기에 늘 진심이니까……. 화가 쉽게 안 풀릴 만도 하지.


“공녀님, 저도 아멜의 아버지로서 사과드립니다. 제가 아멜을 잘 교육시켜야 했는데……. 이렇게 실례를 끼치게 되어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콘스타블 남작이 매우 저자세로 사과하자, 아멜은 크게 움찔하더니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일까?


“포르……! 포르르!” (아버지……! 죄송해요!)

작은 다람쥐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남작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다람쥐는 앞발로 눈물을 쓱쓱 닦더니, 다시 이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포르릇…….” (정말 죄송합니다…….)

……음, 아이를 너무 몰아세워도 좋지 않으니 이쯤에서 나도 그만해야 할 듯싶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너도 반성하는 것 같으니…….”

문제는 토끼였다.


“꺄우웅?!” (사과하면 다야?!)

토끼는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토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역시 ‘그 방법’뿐이다.

나는 콘스타블 남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제안했다.


“아직 점심 식사 전이시라면, 함께 식사하시죠.”

 

* * *

고기를 잔뜩 먹고 배가 빵빵하게 부른 토끼가 방석 위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다람쥐가 근처를 알짱거려도 일절 신경 쓰지 않으며 고롱고롱 숨을 내쉰다.

토끼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먹보 토끼를 달랠 방법은, 역시…… 먹이는 것뿐이지.’

 

 
나는 손을 뻗어 토끼 배를 마구 만졌다. 그래도 토끼는 가만히 있었다. 진짜로 기분이 좋은가 본데?


‘입가나 앞발을 대충 씻기긴 했는데…… 이따 밤에 제대로 목욕시켜야지.’

흐뭇하게 웃으며 토끼의 볼을 검지로 콕 찔렀다. 그러자 토끼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는 나를 째려봤다. 아유, 귀여워. 나는 토끼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폭풍 쓰다듬었다.


“끼웅잇.” (그만 만져.)

헤헤. 그래도 만질 거지롱. 토끼의 보송보송 털을 간지럽히자 토끼가 기어코 성질을 부렸다. 하마터면 물릴 뻔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 아쉬워라.


“포르…….”

그런데 그때, 다람쥐가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방금 그 소리는 통역이 안 되는 걸로 보아 뜻 없는 울음소리인 듯했다.

다람쥐는 살금살금 거리를 좁혀 오며 내 눈치를 보더니, 내 손등에 머리를 살짝 비비적거렸다.


‘아니…… 이, 이건 설마?!’

자기도 쓰다듬어 달라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이 소심한 다람쥐가 먼저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몹시 놀라 버벅거렸다.

하지만 곧 군침을 꼴칵 삼키며 다람쥐에게 손을 뻗었다. 보들보들해 보이는 긴 꼬리를 만져 보고 싶었다. 역시, 다람쥐도 너무 귀엽…….


“끼아앙!!”

내 손끝이 다람쥐꼬리에 닿으려던 순간, 토끼가 분노의 포효를 터뜨렸다.

다람쥐도, 나도 화들짝 놀라 토끼를 쳐다보았다. 토끼의 까만 눈동자가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무, 무서운 토끼.


“끼얏웅! 꺄웅! 꺙!” (우리 엄마야! 어딜 감히!)

토끼 주인님이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텃세를 부리자, 슬쩍 굴러 들어오려 했던 다람쥐가 삐이잉 울며 도망쳐 버렸다.

다람쥐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콘스타블 남작의 재킷 주머니에 쏙 숨었다. 그러고는 고개만 빼꼼 내밀고 이쪽을 훔쳐봤다.

콘스타블 남작은 허허 웃으며 다람쥐의 머리를 손가락 두 개로 쓰다듬었다. 오들오들 떠는 다람쥐는 몹시도 억울해 보였다.


“삐이잉, 삐이잉…….”

“허허…….”

허탈한 웃음을 흘린 콘스타블 남작이 이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다람쥐를 보는 그의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방금 아멜린의 행동은 모쪼록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공작 부인, 그리고 공녀님. 아멜이……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라서요.”

……그러고 보니 콘스타블 남작저에는 안주인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마 사별을 한 것이겠지. 아멜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안사람이…… 5년 전 기사와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바람에…… 아멜이 계속 쓸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안사람 몫까지 사랑해 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니, 사별이 아니었냐고. 콘스타블 남작 부인이 기사와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를 했다니! 이런 중요한 정보는 미리미리 알아두고 올 걸 그랬다.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졌네.


“아무튼, 그래서 공작 부인을 보니 아멜도 제 엄마 생각이 났나 봅니다. 조금 쓰다듬 받고 싶었을 뿐이지, 공녀님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아멜.”

“포르.” (맞아요.)

좀 더 고개를 내민 다람쥐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는 “키훙.” 하는 소리를 냈을 뿐, 더는 위협적으로 굴지 않았다. 역시 착한 토끼라니까.

* * *



“그 소문 말이야, 사실일까?”

늦은 밤. 모자를 푹 눌러쓴 여성 둘이 가게를 나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젊은 나이에 제법 준수한 외모였고,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미혼이었다.

두 여성은 입가를 가린 채 근처를 살피며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었다.


“서쪽 숲에 버려진 오두막 있잖아. 최근에 거기서 웬 늑대 한 마리가 출몰한다는데…… 목격자들 말로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 수인인 것 같대. 진짜일까?”

“글쎄, 직접 본 게 아니니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 그런데 이상하긴 해. 늑대 수인들은 솔즈베리 공작성 인근에 모여 살잖아. 이 근방에 사는 늑대 수인 무리는 없는 거로 아는데.”

“제시가 그러는데, 오두막에 출몰하는 그 늑대가…… 솔즈베리 공작인 것 같대.”

“뭐? 말도 안 돼!”

“아냐, 잘 들어봐. 이게 은근히 신빙성 있는 얘기야. 얼마 전에 솔즈베리 공작이 알폰스를 방문했었잖아.”

“그랬지.”

“방문하고서 한 며칠은 솔즈베리 공작을 봤다는 목격담이 나돌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얘기가 뚝 끊겼단 말이지. 공작을 봤다는 사람이 없어.”

“흐음…….”

“그런데…… 공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갑자기 오두막에 늑대가 출몰하기 시작한 거야…….”

잠시 걸음을 멈춘 여성이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좀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추측하길…… 하필 알폰스에 오고 나서부터 공작의 각인 기간이 시작됐고, 불상사를 피하려고 오두막에 은둔해 있다는…… 뭐 그런 게 아닐까 싶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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