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포악한 토끼와 울보 다람쥐 (57/144)


57화. 포악한 토끼와 울보 다람쥐
2022.06.18.



 


‘와! 여긴 솔즈베리 성 인근보다 훨씬 따뜻하다!’

도착하자마자 감탄했다.

솔즈베리 공작령에 속한 알폰스 지방은 비교적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그래봤자 대륙 전체를 놓고 보면 북쪽이지만), 기온이 상대적으로 온후했다. 그래도 역시 좀 춥긴 하지만!


“꺄잉.” (여긴 따뜻하네.)

내 품 안의 보송보송 토끼가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호위로 따라온 로드리와 제이드, 그밖에 다른 기사들은 조금 거리를 둔 채로 서 있었고, 안나와 하녀 두 명이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중이었다.


“최근에 알폰스 지방에 생긴 문제가 마수로 인한 농작물 피해라고 했죠?”

곁으로 스윽 다가온 제이드가 넌지시 물어왔다. 이 똑똑한 녀석은 내가 무슨 계획을 세워뒀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비범한 녀석이야. 제이드를 흘끗 본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식물계 마수로 인한 피해래.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마수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워서 농민들이 곤욕을 겪고 있다나 봐.”

“흐음, 식물계 마수라, 상대하기 골치 아픈 종류가 많긴 하죠.”

“그래. 하지만 세계수의 나비들에게 힘을 빌리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야. 어찌 됐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덴 만능인 녀석들이니까.”

“끼야앙!” (나도 도울게!)

토끼가 앞발을 샥 휘두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듬직하고 귀여운 토끼. 나는 토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번 가볼까?”

“꺄웅~!” (출발~!)

드디어 그레이안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지방관 콘스타블 남작을 만나자마자, 내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지금은 공작님을 만나기 어려우실 듯합니다. 먼 길 오셨을 텐데……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왜? 어째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오늘이야말로 그레이안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눈만 깜박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안은 콘스타블 남작저에 묵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잠깐이라도 시간이 안 나는 건가요?”

내가 묻자, 콘스타블 남작은 곤란한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공작님께선 현재 이곳에 안 계십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지방에서 콘스타블 남작저 말고 그레이안이 묵을 데가 어디 있다고? 황당해하는 나를 힐끔대며 콘스타블 남작이 말을 이었다.


“사정이 생겨 잠시 다른 곳에 계십니다. 아마 보름쯤 지나야 돌아오시지 않을는지…….”

“말도 안 돼…….”

보름이라니, 그렇게나 오래 어떻게 기다려?

상심한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콘스타블 남작이 쩔쩔매며 내 눈치를 살폈으나, 괜찮은 척할 여력이 없었다.

* * *



“꺄웅잇.” (뭔가 수상해.)

말랑말랑 토끼가 셜× 홈즈에 빙의한 것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토끼를 만지작대며 말랑말랑한 촉감에 위로받고 있었다. 보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그레이안은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끼아앙 꺗 까우웅? 끼아웅!” (엄마가 왔는데 아빠가 보러 오지 않는다고? 뭔가 이상해!)

분홍 코를 씰룩이며 중얼거린 토끼가 앞발로 팔짱을 꼈다. 토끼 앞발은 짧은데 저 자세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다. 에이프릴은 알고 보니 롱다리 북극 토끼일지도.


“꺄앙, 끼아웅.” (엄마, 너무 우울해하지 마.)

토끼가 내 품에 폴짝 안겨 오며 말했다. 나는 울적한 기분으로 토끼의 보송보송한 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웅꺄앙, 끼앙!” (내가 여길 염탐해 볼게!)

“……?”

뭘 어쩌려고? 당황해 멈칫하기도 잠시, 바닥으로 뛰어내린 토끼가 문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토끼를 말렸다.


“에이프릴, 괜찮으니 얌전히 있어! 어디서 뭘 하려고?”

“꺄웅! 끼앙 꺗 꺄우웅!” (걱정 마! 둘러보기만 할 거야!)

아니, 저 사고뭉치 토끼가!

토끼를 잡기 위해 얼른 달려갔지만, 에이프릴은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이 녀석……! 왜 이렇게 빨라?! 그야 토끼이니 당연히 빠를 테지만?


“염려 마세요, 글로리아 님. 제가 따라가 볼게요.”

“공작 부인은…… 여기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밖은 추우니까…….”

제이드와 로드리가 차례로 말했다. 제이드가 에이프릴을 따라가 본다고 하는 거야 예상대로이니 놀랍지 않은데, 로드리, 이 녀석까지 나를 최약체로 여기기 시작한 거냐고……? 울컥한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나도 따라갈 거야. 여긴 솔즈베리 성에 비하면 딱히 엄청 춥지도 않다고!”

내가 벌떡 일어서자 제이드는 왜인지 웃음을 참는 듯했고, 로드리는 눈을 깜박이며 곤혹스러워했다. 몹시 망설이는 듯 보이던 로드리가 슬그머니 말을 건네왔다.


“공작 부인, 그냥 따뜻한 실내에 계시는 편이…….”

“거절한다.”

“…….”

이 녀석아, 내가 아무리 최약체여도 너보다 어른이라고! 애들한테만 일을 맡기면 어디 어른의 체면이 서겠어?

나는 씩씩하게 문으로 향했다. 손을 뻗어 문을 열자마자― 무시무시한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추, 추워.

하지만 굴복할 순 없지……! 나도 에이프릴을 찾으러 갈 거라고! 그리고 여길 좀 조사해 봐야겠어. 콘스타블 남작이 뭘 숨기는 건지.

* * *



‘콘스타블 남작,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콘스타블 남작저는 상당히 넓었다.

이 넓은 곳을 조그만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불안했지만, 우리 토끼는 이보다 훨씬 넓은 솔즈베리 성에서도 잘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곧 기억해 냈다. 하여튼 대단한 토끼라니까.


‘그래도 혼자 돌아다니는 건 역시 걱정이…… 음?’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 콘스타블 남작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왜인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역시 수상한데…….


“……지 않게, 조심해서…….”

그 근처로 살금살금 다가가자 콘스타블 남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로드리와 제이드는 다른 곳을 살펴보러 가서 내 곁에 없었고, 나 혼자였다.


“절대 ……면 안 된다, 알겠지?”

“예, 남작님.”

시름이 깊어 보이는 콘스타블 남작에게 꾸벅 묵례한 하인이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

마침 나를 발견한 콘스타블 남작과 하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훔쳐 들은 적 따위 없는 것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쳤다.


“소, 솔즈베리 공작 부인, 어쩐 일이신지……?”

콘스타블 남작이 어깨가 굽은 자세로 소심하게 물어왔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아저씨가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안의 유교걸이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로군.


“그냥 이 저택을 좀 둘러볼까 해서요. 괜찮으시다면 남작님께서 안내해 주시겠어요?”

“그게…… 으음……. 알겠습니다.”

누가 봐도 나를 불편해하는 기색으로 콘스타블 남작이 승낙했다. 한편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하인을 향해 그가 고개를 까닥하자, 하인은 깊이 허리를 숙이곤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내 나를 돌아본 콘스타블 남작이 시름을 애써 감추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어 콘스타블 남작과 함께 뜻밖의 저택 투어(?)를 하게 됐다.

콘스타블 남작은 무척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나를 안내해 주었는데,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숨기는 게 역력한 기색이라…… 수상쩍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숨기는 걸까?


“아까 그 하인에게는 무슨 일을 맡기신 건가요?”

“예? 아……. 그건…….”

계속 궁금하던 것을 묻자, 콘스타블 남작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흐음…….

보아하니 강심장은 아닌 거 같다. 계속 추궁하면 바른대로 실토할 것 같긴 한데…….


“삐이익―!”

“……?!”

별안간 들려온 괴성에 깜짝 놀라 크게 움찔했다. 콘스타블 남작도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삐이이! 삐삐익!”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급히 돌아보자, 이쪽으로 필사적으로 뛰어오는…… 작은 다람쥐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니, 웬 다람쥐가……는, 설마 수인?’

“삐이이익!”

눈물이 그렁그렁한 다람쥐가 콘스타블 남작의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남작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다람쥐를 감싸 안으며 달래듯이 물었다.


“아멜, 왜 그러느냐? 왜 이렇게 놀라서는…….”

그때였다.


“캬아앙!”

‘이 소리는……!’

에이프릴!

홱 고개를 들자, 정면에서 달려오는 하얀 토끼가 보였다.

토끼는 구겨진 삼각형 눈을 하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매, 맹수 토끼.’

당황하기도 잠시, 우리 앞에 딱 멈춰 선 에이프릴이 콘스타블 남작의 품에 안긴 다람쥐를 노려보았다. 그러며 뭐라고 쏘아붙였다.


“끼애웅!”

‘……어라? 그러고 보니 통역 귀걸이가 작동을 안 하네?’

이거 왜 이래? 고장인가?

귀걸이를 만지작거려 봤지만, 통역이 안 되는 건 여전했다. 와중에도 에이프릴은 다람쥐를 계속 뭐라고 나무라고 있었다.


“꺄아앙 꺗! 끼앙!”

“포르르…….”

“끼앵!”

“포르, 포륵.”

도대체 뭐라고들 하는 것일까……? 나는 일단 에이프릴을 안아 들기로 했다.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토끼 옆구리를 붙잡자, 토끼가 캬악거리며 성질을 부렸다.

아니, 이 녀석이. 난 에이프릴을 꼭 껴안고 토끼의 분홍 코에 검지를 톡 가져다 댔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아, 참고로 통역 귀걸이 고장 났어. 네가 뭐라고 하는지 난 몰라.”

토끼가 불만스럽게 나를 쏘아봤다. 뭐, 이 녀석아. 귀걸이가 고장 난 게 내 잘못이냐.


“끄애잉!”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사옵니다, 토끼 님. 사람 말로 하시지요.”

“꺄웅 캿 캬웅!”

토끼가 누운 자세로 날 향해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당연히, 짧아서 닿지 않았다. 역시 롱다리 북극 토끼는 아니로군.


“저……. 공작 부인?”

토끼의 앞발을 붙잡아 악수하며 농락하고 있는데, 콘스타블 남작이 나를 슬그머니 불렀다. 예의 다람쥐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폭 파묻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아들이 공녀님께 무례를 저지른 모양인데…… 거실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심이 어떠실지요.”

……아들?

깜박깜박, 말없이 눈꺼풀 운동만 하다가 물어보았다.


“그…… 아들이라 하심은?”

“아, 그게…….”

콘스타블 남작이 제 품의 다람쥐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그의 얼굴에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순간 나는 남작의 입에서 나올 말을 직감했다.


“여기, 이 아이가 바로 제 아들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나는 대놓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덤덤한 체를 했다. 콘스타블 남작과 그 아들이 다람쥐 수인이라는 사실에 너무 놀라워하면,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으니까.


‘다람쥐 수인이라니, 처음 본다…….’

그럼 콘스타블 남작도 귀여운 다람쥐 모습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전혀 상상이 안 가는데.


“거실은 이쪽입니다.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어찌 됐든, 나는 토끼를 품에 안고 콘스타블 남작을 따라 거실로 이동했다.

추운 복도에 있다가 아늑한 거실로 들어서자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역시 따뜻한 게 좋아……. 추운 건 싫어.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멜 네가 말해 보겠느냐?”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를 홀짝이던 중, 콘스타블 남작이 다람쥐에게 물었다.

쿠키를 갉아먹던 다람쥐는 크게 움찔하더니 다시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에이프릴의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몹시도 불쌍해 보였다.


‘정말 이 다람쥐가 잘못한 게 맞을까? 그냥 에이프릴이 포악을 부린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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