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키스해야 할 분위기 (54/144)


54화. 키스해야 할 분위기
2022.06.08.



16584839677788.jpg

“그럼, 다음은 부인이 돌릴 차례로군요.”

16584839677793.jpg

“아, 네.”

나는 내 양심의 가책이 제발 얼굴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진실 게임을 하자고 한 건 나지만…… 괜히 저질러 버렸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든다. 하, 정말, 왜 그랬을까.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16584839677793.jpg

‘……아무튼 이왕 시작한 거 본전 뽑도록 하자.’

제발, 제가 아니라 그레이안이 걸리게 해주세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며 만년필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나온 결과는…….

16584839677793.jpg

‘왜 또 내가 당첨이야!’

으아아, 싫어! 무슨 질문이 날아들지 벌써 두렵다! 내 수상한 점을 꼬치꼬치 캐물어오면 어쩌지?

16584839677793.jpg

‘그럼 난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래서는 진실 게임이 아니잖아!’

착한 늑대에게 사기를 치려니 양심이 콕콕 아파 왔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실토하겠느냐고!

그랬다간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게 틀림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16584839677788.jpg

“또 부인이 대답하셔야겠군요.”

16584839677793.jpg

“……그러게요.”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설핏 웃었다. 심경이 복잡한 나와는 다르게 그는 여유롭고 차분해 보였다. 한편으론 즐거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은회색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질문을 꺼내 왔다.

16584839677788.jpg

“글로리아, 당신은…….”

왜인지 그레이안은 말을 길게 끌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꼴칵 삼켰다. 무슨 질문이 날아들든지 간에, 침착해야…….

16584839677788.jpg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6584839677793.jpg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라 되묻고 말았다. 뭐, 뭐지? 웬 평범한 질문? 내 정체를 캐물어올 줄 알았는데……?

16584839677793.jpg

“어……. 음, 그러니까―.”

심지어 그레이안은 몹시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기까지 했다.

그 눈빛에 못내 부담스러워진 나는 시선을 쓱 피하며 입을 열었다.

16584839677793.jpg

“……좋은 사람, 이라고 생각해요.”

16584839677788.jpg

“그리고?”

16584839677793.jpg

“음, 또, 뭐냐……. 다정하다고도 생각하고…….”

16584839677788.jpg

“좀 더 자세히, 많이 말해 주십시오.”

그레이안이 내 앞으로 바짝 붙어 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눈을 마구 깜빡거렸다. 은회색 홍채의 섬세한 결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16584839677793.jpg

“어, 얼굴이, 내 취향이에요.”

16584839677788.jpg

“그거 기쁘군요. 그럼 제 얼굴에서 어디가 가장 좋으십니까?”

16584839677793.jpg

“음, 일단, 눈이 정말 예쁘고…….”

16584839677788.jpg

“네.”

16584839677793.jpg

“속눈썹도 길고, 눈썹 모양도 반듯하고, 코도 날렵하고, 입술…… 은…….”

16584839677788.jpg

“…….”

이상한 일이었다.

말을 잇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와 나를 감싼 정적이 무겁고 숨 막히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

16584839677793.jpg

“입술, 은…….”

그때, 그레이안이 좀 더 바짝 다가와 앉았다. 나는 슬며시 열리는 그의 입술에서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16584839677788.jpg

“잘 모르시겠으면…….”

그의 손은 어느샌가 내 허리 부근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 손은,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어루만졌다.

16584839677788.jpg

“시험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조금은 짓궂게 느껴지는 그 미소에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기도 잠시, 내 입술 위로 말랑하고 보드라운 것이 닿아왔다.

16584839677793.jpg

“……?”

두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레이안이 너무 가깝다고만 생각했다. 와중에 내 허리를 적당한 힘으로 끌어당겨 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 아래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그 틈새로 따뜻한 숨결이 밀려들었다.

16584839685459.jpg

 

16584839677793.jpg

“흡…….”

삽시간에 입술이 촉촉해졌다. 맞닿은 부분에 뜨겁게 열이 오르는 듯했다. 열기를 품은 그의 일부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건드렸다.

그에 움찔하기도 잠시, 그가 내 등허리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괜찮다고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16584839677793.jpg

“…….”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의 일부는 서로 사탕이라도 되는 양 엉키고 뒤섞였다. 그렇게 한참을 무아지경에 사로잡혀 있다가 마침내 입술을 떼어내니, 잔뜩 흐트러진 그의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도, 그만큼이나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입술은 부풀어 올라…… 부끄러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16584839677788.jpg

“……시험해 보니, 어떠십니까?”

16584839677793.jpg

“……네?”

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지 않았다. 멀거니 되묻자니 그가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다시 한번 더 가볍게 키스했다.

그제야 나는 방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퍼뜩 깨달았다.

16584839677793.jpg

‘내, 내, 내가― 그레이안이랑, 키……!’

16584839690487.jpg

{뽀뽀했대요~!}

16584839690487.jpg

{어른의 뽀뽀를 했대요!!}

16584839690487.jpg

{꺄아~!}

16584839690487.jpg

{완전 진하게 했대요~! 꺄악~!!}

이…… 이런 미친 나비들이.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그레이안은 여전히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에 대한 답을.

16584839677793.jpg

‘어, 어땠냐니, 그런 걸……!’

꼭 말로 설명해야 하는 거냐고~! 우아아악! 나도 모르게 두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열이 잔뜩 올라 목덜미고 뺨이고 다 화끈거렸다.

그렇게 손바닥 안의 작은 어둠 속에 숨은 채 있자니, 그레이안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84839677788.jpg

“부인, 혹시 별로였습니까…….”

16584839677793.jpg

“으악! 아니야!”

16584839677788.jpg

“……!”

충동적으로 손을 치우며 빽 소리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그레이안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부들부들 떨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16584839677793.jpg

“벼, 별로였던 건, 아니었어요……! 돼, 됐죠? 이제 이 얘긴 끝!”

그러고 후다닥 도망치려는데, 그레이안이 나를 덥석 붙잡았다. 으아아! 그가 나를 꼭 껴안자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버둥거리는 나를 그레이안이 능숙하게 달래 주었다. ……왜 이렇게 능숙해! 그러고 보니 키스도!

16584839677788.jpg

“별로였던 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만…… 좀 더 자세한 후기를 들려주시면…….”

으악! 싫어! 왜 그런 걸 요구하는 거야! 난 지금 빨리 어디든 들어가서 숨고 싶다고!

16584839677793.jpg

“왜 갑자기 키스한 거예요!”

그레이안의 품에서 난리를 치다가 불쑥 따지고 말았다. 내 등을 토닥이던 그레이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대답했다.

16584839677788.jpg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16584839677793.jpg

“흐아아악…….”

혼절할 것만 같아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대체 왜 그런 분위기가 되었던 거지?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난 진짜 너무 혼란스러워!

16584839677788.jpg

“오늘 제 침실에는…….”

그레이안이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살갗에 닿아오는 그의 손바닥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 열기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

16584839677788.jpg

“……왜 오셨습니까?”

16584839677793.jpg

“그, 그건.”

찔리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나는 말을 더듬었다.

16584839677788.jpg

“단순히 진실 게임을 하려고……? 아니면…….”

그레이안이 고개를 숙이자 그와 이마가 맞닿았다. 코끝이 스치고, 그의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16584839677788.jpg

“……저와 더 깊은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유혹하는 듯이 들리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망연히 그를 응시하다가 대뜸 물었다.

16584839677793.jpg

“당신, 여우 수인이죠.”

16584839677788.jpg

“……?”

16584839677793.jpg

“여우인 게 분명해! 이 폭스! 왜 자꾸 끼를 부려! 요망하게!”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덥석 감싸고 마구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레이안은 잠시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내 입술에 가볍게 쪼듯 키스했다.

쪽―.

16584839677793.jpg

“……?”

방심하다가 또 키스를 당하고야 만 나는 어이가 가출한 표정으로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내 손을 붙잡으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16584839677788.jpg

“부인, 늑대는…….”

16584839677793.jpg

“…….”

16584839677788.jpg

“평생 단 하나의 반려만 사랑하는 짐승입니다.”

그러고는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 미소에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16584839677788.jpg

“부인, 늑대 수인에게는 각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16584839677793.jpg

“각인……이요?”

16584839677788.jpg

“예, 만일 제가 당신에게 각인하게 된다면, 그때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 순간 솜털이 바짝 곤두서며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꿀꺽,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킨 찰나였다.

벌컥―!!

갑자기 토끼 출입용 작은 문이 열리더니, 하얀 솜뭉치가 폴짝 뛰어들어왔다.

16584839695836.jpg

“끼얏웅―!”

당연히, 그 솜뭉치는 에이프릴이었다.

16584839695836.jpg

“꺄아앙, 끼앵!”

우리 사이로 재빨리 파고든 토끼가 그레이안과 나를 갈라놓았다.

토끼는 그레이안이 내게서 떨어지자마자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더니,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레이안을 째려보며 뭐라고 마구 종알거렸다.

16584839695836.jpg

“꺄이잉낏, 끄애앵!”

혹시 얘가 뭐라는지 알아요? 그레이안을 흘긋 보며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도, 나도 통역 귀걸이를 착용 중이 아니었다.

16584839677793.jpg

“음, 에이프릴? 일단 방으로 돌아갈까? 어린이는 푹 자야 할 시간…….”

16584839695836.jpg

“끼앵!”

내가 타이르자 반항하듯 말대꾸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의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정확히 침대 중앙에 자리를 잡고 눕는 게 아닌가.

16584839677793.jpg

“…….”

16584839677788.jpg

“…….”

그레이안과 나는 잠시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심전심.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

‘오늘은 하는 수 없이 셋이 함께 자야겠다.’ 하는.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16584839677793.jpg

“……그럼, 이만 잘까요?”

16584839677788.jpg

“그러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잘 타이밍이 아닌데…… 에이프릴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그냥 얌전히 침대에 눕는 수밖에.

그레이안과 나는 거의 동시에 침대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우리 사이에는 빵 굽는 모양의 토끼가 누워 있었다.

토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좀 더 편한 자세를 취하곤 눈을 감았다.

적막 속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작게 이야기했다.

16584839677793.jpg

“저기…… 아까 하다 만 이야기 말인데요.”

16584839677788.jpg

“예, 부인.”

16584839677793.jpg

“에이프릴 앞에서 하긴 좀 그러니, 내일이나 언제 다시 해요.”

16584839677788.jpg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16584839677793.jpg

“……그레이안도, 좋은 꿈 꿔요.”

분명 폭풍이 분 것 같았는데, 그 끝은 허무하리만치 고요했다.

물론, 내 심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 * *


16584839677793.jpg

‘젠장, 잠을 설쳤네…….’

당연하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서 편히 잘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

반면에 토끼는 푹 잤는지 털에서 아주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야무지게 세수하는 모양새가 어찌나 얄밉던지……. 하지만 귀여우니까 봐준다.

나는 온실에서 키운 딸기를 하나 집어 들어 토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16584839677793.jpg

“자, 네가 좋아하는 딸기. 많이 먹어.”

에이프릴은 딸기를 정말 좋아했다. 토끼와 딸기. 왠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토끼, 딸기, 토끼, 딸기, 토끼……. 뭔가 라임도 잘 맞고.

16584839695836.jpg

“끼훙.”

통역 불가능한 소리를 흘린 에이프릴이 딸기를 받아들더니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뽀얀 입술과 씰룩이는 분홍 코.

큽, 역시 귀엽다. 귀여우니 뭐든 다 용서돼! 우리 에이프릴 하고 싶은 거 다 해!

16584839677793.jpg

“……그나저나 걱정이네…….”

나도 내 몫의 딸기를 하나 집어 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선은 이미 내 맞은편의 빈자리를 향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레이안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

약 십오 분 전, 우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려던 그레이안은 급한 호출을 받고 방을 나섰다.

잘은 몰라도 그가 직접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영지에 생긴 모양이었다.

참고로 그레이안은 떠나기 직전, 나에게 ‘아이들을 치료하는 데 능력을 쓰는 건 조심하라’며 당부하고 갔다.

그리고 난 그를 흘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16584839677793.jpg

‘난 아무런 문제 없으니, 당신이나 몸조심해요.’

16584839677793.jpg

“별일 없겠지?”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딸기를 입안에 가져다 넣었다. 오늘 아침에 딴 싱싱한 딸기라서인지 아주 새콤달콤했다.

16584839695836.jpg

“꺄잉.” (너무 걱정하지 마.)

토끼가 나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설핏 미소를 지은 나는 손을 뻗어 토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이안 솔즈베리인데.

1658483970391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