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진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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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진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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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진실 게임
2022.06.04.
쾅!!
별안간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그레이안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어둠 속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침실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글로리아였다. 늑대 수인의 탁월한 시력은 사방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녀의 얼굴 윤곽을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부인……? 어쩐 일이십니까?”
그레이안은 그녀가 또 취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공기 중에 알싸한 알코올 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 그녀는 취한 게 아니라 제정신이라는 뜻이다.
“…….”
글로리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레이안을 노려보며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섰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린 그레이안은 자신이 반라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부인, 저 일단 옷을 좀…….”
“그대로 있어요.”
박력 있게 말한 글로리아가 그레이안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찔한 그레이안이 이불자락으로 가슴팍을 가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는 두 손으로 이불을 꼬옥 쥔 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열심히 생각했다. 글로리아는 왜 난데없이 자신의 방에 쳐들어왔을까? 에이프릴은 어쩌고…….
“다, 당신.”
“예, 부인.”
“그러니까, 여, 여…….”
글로리아는 왜인지 힘겹게 말을 더듬거리며 그레이안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레이안은 그녀가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글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여긴 내 방보다 춥네요. 그런데 당신은 홀딱 벗고 있고. 안 추워요?”
‘홀딱 벗고 있다’는 말에 양 뺨을 발그레 붉힌 그레이안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추위를 덜 타니까요. 하지만 부인께서는 추우시겠군요.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니, 나 때문에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글로리아의 만류에도 그레이안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가 있는 방 한편으로 향했다.
벽난로 옆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몇 개 집어 든 그가 그것들을 벽난로 안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불길이 거세지며 화악 타올랐다. 방 안은 삽시간에 후끈해졌다.
그레이안은 다시 침대로 다가가 머리맡에 고이 접어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
그가 가운을 몸에 걸치는 동안 글로리아는 어째서인지 자괴감 어린 표정으로 북북 마른 세수를 했다.
그레이안은 그녀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 줄로만 알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고민 상담을 하러 온 거라면…… 그만큼 자신을 믿어 준다는 뜻이 되니,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우려내 올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레이안이 찻주전자와 찻잔이 있는 탁자 위를 흘끗 보는데, 글로리아의 자못 긴장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일단 여기 좀 앉아 봐요.”
“네, 부인.”
그레이안은 고분고분 글로리아의 말에 따랐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그녀는 자신을 ‘당신’이라 부르는 때가 많아졌다. 가끔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게다가 말투도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자신을 무조건 ‘공작님’이라 부르며 철저하게 벽을 치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는 그레이안을 무척 흡족하게 했다. 그의 입가에 만족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가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 그레이안, 우리―.”
“네, 글로리아.”
“오, 오늘 밤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긴장하는 것일까. 게다가 얼굴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광원이라고는 난롯불의 흐릿한 빛뿐이었지만, 그레이안의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진…… 진실 게임 하는 거 어때요.”
“……?”
그게 뭔지 모르는 그레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글로리아가 설명해 주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글로리아는 왜인지 한숨을 푹 쉬더니, 무언가를 포기한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그…… 혹시 기다란 막대 같은 거 있어요? 한 10센티쯤 되는…….”
“음, 이런 만년필로 괜찮겠습니까?”
진실 게임은 또 뭐고, 막대는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레이안은 협탁에서 만년필을 꺼내 글로리아에게 순순히 넘겨 주었다.
그러자 글로리아는 허탈한 표정으로 만년필을 받아들더니 가만히 살펴보고는 이야기했다.
“자, 봐요, 여기 이 만년필의 촉 부분이 ‘당첨’ 그리고 반대쪽 끝 부분이 ‘꽝’인 거예요.”
그러고는 냉큼 침대 아래로 내려간 글로리아가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어서 자신의 앞자리에 앉으라며 그레이안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레이안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자, 글로리아는 자신과 그 사이에 만년필을 가지런히 놓아두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우리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차례대로 한 번씩 만년필을 돌리는 거예요. 봐요, 이런 식으로.”
글로리아가 만년필을 시계 방향으로 홱 돌렸다. 빙그르르 회전하던 만년필이 잠시 후 움직임을 멈추며 펜촉 끝으로 그레이안을 가리켰다. 이어서 글로리아가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친절히 알려주었다.
“여기 이것처럼 펜촉이 그레이안을 가리키면, 내가 그레이안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펜촉이 나를 가리키면, 당신이 나한테 질문하는 거고. 간단하죠? 질문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진실만을 대답해야 해요. 거짓말하면 탈모에 걸리게 될 거예요!”
탈모에 걸리게 될 거라는 말에도 그레이안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말할 뿐이었다.
“저는 부인이 대머리여도 상관없습니다만…… 하지만 제 머리가 까지는 건 곤란하군요. 그럼 보기 싫다며 부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르니.”
말을 마치며 그는 씩 웃었다. 글로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또다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레이안은 은밀한 즐거움을 감추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그렇게 웃는 건 일부러 그러는 거죠……?!”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레이안은 시치미를 뚝 떼며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손안에서 빙그르르 돌렸다가 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무언가 참는 듯한 표정의 글로리아를 보며 그가 유유히 말했다.
“그럼, 먼저 하시지요.”
* * *
‘아주 요망해. 여우가 따로 없어. 늑대가 아니라 여우인 거 아니야?’
나는 그레이안을 노려보며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전부 대답할 수 있다는 듯, 망설임 없는 태도였다.
‘어디……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나는 있는 힘껏 만년필을 돌렸다. 빙글빙글 격하게 회전하던 만년필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발 그레이안 쪽으로……. 됐다! 펜촉이 그레이안을 가리켰다!
신이 난 나머지 환호성을 지를 뻔한 나는 입술을 물며 소리를 삼켰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선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
“그럼,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예, 하시지요.”
그레이안은 전혀,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그가 가장 곤란해할 질문이 무엇일지 열심히 궁리했다. 그렇지만 정작 꺼내놓은 질문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왜 우리 첫날밤에 손만 잡고 잤어요?!”
줄곧 그게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레이안에게 치명적일(?) 질문은 다음 기회에 던지도록 하자. 기회는 많으니까!
“그, 그건…….”
“……?”
그런데 그레이안의 반응이 의외였다. 쉽게 대답할 줄로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두 뺨을 붉히며 곤란해했다.
그가 눈을 마구 깜박거리자 검고 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어김없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고야 마는 나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답이 없는 얼빠이거나, 이 요망한 늑대에게 홀렸거나.
“쑥스러워서…….”
“……?”
“제겐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래서 그랬습니다…….”
……아, 아니…… 이 뭔…… 이게 뭔 수줍은 새색시 같은 발언이야!!
할 말을 잃고야 만 나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내 지능도 붕어가 되어 가는 것만 같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 쑤, 쑥스러워서 그랬다고? 천하의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아, 아니 근데 그럼 그냥 잠만 자면 되지 손만 잡고 자는 게 더 이상하다고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요!”
어버버하며 말을 쏟아냈다. 그레이안은 눈을 내리깐 채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진짜로 딱 ‘수줍은 새색시’처럼.
“그, 그래도 부부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다.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리고 있던 두 손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왠지 목이 타는 것 같은 이 기분. 냉수를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아. 물 어디에 있지?
“그래요, 알았어요……. 저 일단 물 좀 마시고 다시 시작하죠.”
“아, 네, 물은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그러더니 그가 가져온 것은 따뜻한 물이었다. 민트 잎사귀도 야무지게 한 장 띄운.
“…….”
이거 그 뭐냐 물 마시다 사레들리지 말라고 잎사귀 한 장 띄워서 주는…… 그런 거냐고. 당신은 왜 또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는 건데! 귀엽잖아! 젠장! 나는 따뜻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마시고 나서 고개를 들자, 그레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도 귀여워서 내 안에 사나운 충동이 일어났다. ……진정하자. 나는 컵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엔 당신이 돌릴 차례예요. 얼른 해 봐요.”
“아, 네, 그럼…….”
만년필을 집어 든 그레이안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아니, 왜 조심스럽게 돌리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어디 잘 돌겠어? 두 바퀴도 못 도는 거 아니야?
“……?”
……는,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만년필이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뭐야……? 대체 어떻게 한 건데……!
“다행히 힘 조절을 잘 했군요.”
“…….”
그게 힘 조절을 한 거였다니……. 그럼 제대로 힘을 줘서 돌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갑자기 무서워지려 한다.
역시 나 빼고 다들 장르가 무협이야!
“아, 이번엔 제가 질문할 차례로군요.”
잠시 후 만년필이 회전을 멈췄고, 펜촉 끝이 나를 가리켰다. 뭐, 한 번쯤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안이 곤란한 질문을 할 것 같지도 않고―.
“부인, 정말로 기억을 잃으신 게 맞습니까?”
“……!”
바, 방심했다. 그가 언제나 나에게 무척 상냥히 굴었기 때문에, 나를 찌르는 질문을 하리라곤 차마 예상 못 했다…….
어떡하지?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거짓말을 하는 게 되는데. 물론 거짓말을 한다고 진짜로 대머리가 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괜찮아, 글로리아.}
{우리가 책임질게. 기억을 잃은 게 맞다고 해!}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니까.}
별안간 머릿속에서 나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안은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나비들이 괜찮다고 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거짓말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맞아요. 전 정말로…… 예전 일은 부분부분 기억이 안 나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답을 들은 그레이안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는 듯 담백한 표정이었지만, 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레이안이 또 곤란한 질문을 해오면 어쩌지? 이러다 피노키오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