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드디어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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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드디어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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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드디어 탈출!
2022.05.21.
잠시 후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운명이니 사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난 잘 모르겠군. 나에게 중요한 건 에이프릴이야. 당신의 맹세가 진실된 것이라면, 에이프릴의 안전을……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그 말은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기쁜 듯 활짝 웃은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을 또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그레이안은 어김없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허락해 줘서 고맙군. 자, 그럼, 그대의 의견은 어떻지?}
닉스가 이번에는 나를 향해 재차 물었다. 에이프릴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락해 줘! 허락해 줘!’ 하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만 같다……. 다소 부담스러운 기분으로 에이프릴의 시선을 쓱 피하며,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더 말해 봐야 뭐 해.”
그렇게 해서, 에이프릴이 대정령 닉스와 계약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내 허락을 듣자마자 에이프릴이 기뻐 날뛰며 늑골을 부러뜨릴 듯이 나를 꽉 껴안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게 괜찮았다. 에이프릴은…… 진짜 뭘 먹고 힘이 저렇게 세지? 역시 기적의 토끼…….
{자, 받으렴.}
허공을 둥실둥실 날던 파르스름한 정령석이 에이프릴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이어서 닉스가 에이프릴의 가까이로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목걸이나 팔찌로 만들어서 몸에 지니면 될 거야. 나는 이제 너와 계약한 후 곧바로 그 안에 들어가 잠들 테니,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아마도 먼 훗날이 되겠지.}
그리 말하는 닉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닉스가 밤하늘과 같은 손으로 에이프릴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 순간이 어서 오기를, 너와 다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게.}
“……저도 고대하고 있을게요. 감사해요, 대정령님.”
에이프릴의 대답에 닉스는 온화한 웃음을 흘렸다.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이제 계약할까? 자……. 눈을 감으렴.}
닉스의 지시대로 에이프릴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에이프릴의 머리를 칭찬하듯이 쓰다듬은 닉스가 지시를 이어나갔다.
{나와의 계약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소리 내어 내 이름을 부르면 돼. ‘닉스’라고.}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계약 절차였다. 계약서는 물론, 도장이나 사인도 필요 없군.
“……닉스.”
에이프릴이 닉스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것으로 마침내 닉스와 에이프릴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이프릴과 닉스의 사이에 가느다란 빛의 끈 같은 것이 생겨났다가 곧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자, 에이프릴.}
에이프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닉스가 이내 정령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닉스뿐만이 아니었다. 이 미로 전체가 닉스와 함께 정령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령의 권역은 정령과 늘 함께하니까 말이지. 다 함께 저 정령석 안에서 잠들게 되는 거야.}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랑거리며 설명해 주었다. 점점 사라져 가는 미로의 풍경 속에서, 나는 에이프릴을 꼭 껴안은 채(그리고 우리 두 사람과 티베리를 한꺼번에 감싸 안은 그레이안의 품에서) 다급히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데?!”
{걱정 마, 글로리아~.}
{걱정도 팔자라니까.}
“태평하게 말할―”
―때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시야가 흔들리더니 그대로 의식이 뚝 끊겼다.
그러고 다시 눈을 뜨자…….
“도, 돌아오셨다!”
“주군!!”
“으헝헝, 걱정했습니다아……!”
눈물 범벅이 된 기사들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서 조용히 한숨을 흘리는 아르윈의 모습도.
‘아…….’
나는 속으로 외마디를 흘리며 어깨에서 힘을 쭉 뺐다.
망할 미로를, 드디어 탈출했다.
* * *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정령이 해방된 거지?”
“정령을 가두는 마법은 완벽했을 텐데……!”
뭐냐, 저 클리셰적인 대사는.
솔즈베리 공작가의 병사들에게 연행되며 인세구원회 놈들이 계속 저런 소리를 주절댔다. 잘은 몰라도 이 자식들, 대정령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 했던 모양인데…….
“공작 부인? 잠깐 이쪽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
그때 마침 아르윈이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뭔가 강아지를 부르는 것 같은 무례한 손짓이었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순순히 그리로 다가갔다. 아르윈은 원래 미친 사람인 데다, 진짜 정체가 뭔지도 알 수 없으니까…….
‘알고 보면 천 년 묵은 이무기 같은 거일지도.’
아르윈이 용이라기엔, 용의 품위가 땅에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무기 정도가 딱일 거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거, 아르윈에게는 들키지 말아야지.
“왜 불렀어요?”
나는 내 품 안에서 잠든 토끼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으며 물었다. 아르윈 곁에는 이미 그레이안이 서 있었다.
그레이안은 왜인지 세심한 눈길로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그 시선에 나는 어김없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로 그레이안과도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란 말이지.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 그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인세구원회가 이 시설에서 무슨 일을 해왔던 건지 대강 알아냈습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들어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
그 이야기에 나는 저절로 긴장하며 낯빛을 굳혔다. 인세구원회가 이 시설에서 해왔던 일……. 그건 틀림없이 좋은 일은 아니었으리라.
“공녀님이 같이 듣기에는…… 좋지 않을 거 같지만. 뭐, 지금은 잠들어 계신 것 같으니.”
아르윈이 에이프릴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지며 한 말에, 나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에이프릴을 살펴보았다. ……이 녀석, 잠든 게 맞겠지? 자는 척하는 거 아니겠지?
‘에이프릴이라면 잠든 척하고도 남는데…….’
싹트는 의심을 뒤로하고, 이내 시작된 아르윈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몹시 화가 난 것처럼.
“아직 전부 알아낸 건 아닙니다만, 인세구원회는 대정령의 힘을 얻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말이죠.”
그건 나도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아르윈이 화가 난 건 대정령을 위해서가 아닌 듯했다. 대정령 때문이라기보다는…….
“문제는 그 목적을 위해 수인 아이들이 무슨 역할을 했느냐입니다. 아이들이 갇혀 있던 하얀 방,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해요.”
그곳에 머무르는 이의 생명력을 빼앗는 방. 그런 곳에 아이들을 가둬놓았던 인세구원회 놈들은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들이다. 평생 감옥에서 썩었으면.
“그 방과 연결된 마력 회로를 따라가 보니, 생명력을 보관하는 장치가 나왔습니다.”
“……뭐라고요?”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생명력을 보관하는 장치?
……뭐야, 그게?
“놈들은 아이들의 생명력을 빼앗아 그 장치에 저장해두고 있던 겁니다. 그 생명력으로 무엇을 하려 한 건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요.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할 듯싶습니다.”
“…….”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인세구원회 놈들은…… 파릇파릇한 생명력을 뽑아내기 위해 수인 아이들을 사육하고 있었던 거다. 그야말로 가축 취급이 아닌가.
“……천벌받을, 아니, 천벌받아도 시원치 않을 놈들.”
분노에 차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토끼를 끌어안은 팔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만일 내 아이가…… 에이프릴이 같은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면,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예, 천벌받아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지요. 그놈들 모두…… 절대 편히 죽지는 못할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르윈도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훨씬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표출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놀란 나는 조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아르윈은 늘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옷처럼 두르고 있었으니까.
‘그랬던 사람이…….’
그 순간, 나는 자연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윈, 사실은 정말로 아이들을 좋아하는구나.
“……여하튼, 이 인세구원회라는 사이비 집단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정령을 붙잡아둔 것만 봐도 그렇지요. 출입 제한 구역을 살펴보니, 정령과 상극의 반응을 일으키는 마법의 힘을 이용한 것 같긴 합니다만…….”
아르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짙은 그늘이 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기 쓰인 그 마법이란 게, 아주 치밀한 조작을 해야 하는 고위 마법입니다. 이 시설을 설계한 자는 실력이 매우 뛰어난 마법사일 겁니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정면에서 나를 직시해 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샛노란 그 눈에 담긴 적의를 엿보았기 때문일까.
“……아인스턴의 왕족쯤은 되어야 거느릴 수 있을, 그 정도 격의 최고위 마법사일 겁니다.”
그 적의는 나를 향한 게 아니었지만, 글쎄, 나와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 * *
“……그래서 에반젤린이 글로리아를 가든 파티에 초대한 거였나?”
아인스턴의 국왕, 라니에로는 황금 보좌에 앉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팔걸이에 올린 손 하나를 까닥거렸다.
그는 비록 매정한 아버지였으나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꿰고 있으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녀들은 그의 소유물이었으므로.
한낱 소유물이 그의 권역 바깥에 나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은 타당한 이치. 따라서 라니에로는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곤 했다.
“어쩐지, 요즈음 에반젤린의 동태가 수상하다 싶더니…….”
라니에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글로리아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그랬던 거였군.”
정확히는, 글로리아가 지닌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게다가 그 힘이란 게…… 매우 뜻밖이었다. 강대국의 권좌에 앉아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글로리아가 세계수의 성령들과 계약했을 줄이야.
자신의 많은 자녀 중, 가장 특출난 데 없는 글로리아 아인스턴이.
‘……하지만 글로리아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
언제부터였더라.
라니에로는 오래되고 쓸데없는 기억은 쉽게 잊는 편이었다. 그런 기억들은 무가치한 쓰레기나 다름없으니까. 글로리아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글로리아가 제법 총명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흥미를 끌었던 점은…….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
그 점이 제 친모를 쏙 빼닮았다.
‘그래서 한때는, 그 아이에게 기대를 품었던 적도 있었건만…….’
어느 때부터인가 글로리아는 달라졌다. 총명함은 빛을 잃고 자신을 보면 숨거나 도망쳤다. 라니에로는 그게 연극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스스로 멍청한 겁쟁이가 되길 원한다면야, 그러든지 할 뿐.
그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글로리아는 악독하고 멍청한 공주를 연기했다. 자신과 마주치면 두려운 척하는 것은 덤이었다.
라니에로는 내심 제 딸을 비웃으며 점점 신경을 꺼 버렸다. 어차피 그에겐 자식이 많았다. 글로리아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으니…….
‘그레이안 솔즈베리……. 그 시건방진 애송이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릴 도구로서 글로리아를 놈과 결혼시킨 것까진 좋았는데.’
기가 막힌 일이다. ‘그’ 글로리아가 세계수의 선택을 받을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면 세상에 파란이 일겠지.
‘엘로윈 왕국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된 글로리아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테고, 그레이안 솔즈베리…… 놈도 글로리아를 이용하려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