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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어쩌면 운명의 토끼 (48/144)


48화. 어쩌면 운명의 토끼
2022.05.18.


……나비들까지 저렇게 이야기하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대정령과 계약하는 게 에이프릴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적극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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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계약하기에는, 에이프릴이 아직 너무 어려. 대정령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거다. 큰 힘을 받아들이는 게 육신에 얼마나 부담이 가는 일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레이안이 날선 목소리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어김없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야, 그레이안은 나와 에이프릴에게는 언제나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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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이프릴이 준비가 될 때까지, 내가 에이프릴 안에 잠들어 있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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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 있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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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몸집을 작게 하고 굴속의 토끼처럼 웅크리면 에이프릴에게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닉스의 말은 당연히 거짓이 아닐 것이다. 정령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믿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닉스가 에이프릴이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고 해서, 정말로 그럴지는 알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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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아. 그러나 에이프릴이 당신과 계약하게 됐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 그렇지 않나?”

그레이안도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닉스는 더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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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과 계약하는 건 포기해 줬으면 해. 우리는 원치 않게 이 미로에 휩쓸렸으니, 어서 우리를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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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앙!”

그때, 갑자기 내 품에서 쏙 빠져나간 에이프릴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모습이 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과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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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공작 부인. 저는 대정령과 계약하고 싶어요.”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 우리가 닉스와 대화하는 내내 에이프릴이 조용한 게 영 수상하다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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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인생에 두 번 없을 기회예요. 대정령과 계약하는 건,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에이프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대정령과 계약하면 에이프릴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을 얻게 될 테니까. 그토록 원하던 강한 힘을 말이다.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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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에이프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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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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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그때 왜 너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을까 하고 계속 자책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무나 속상하고 슬플 거야.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이야기하자, 에이프릴의 눈동자도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에이프릴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못내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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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공작 부인…….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응, 알아. 나는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프릴이 강해지고 싶은 이유를 너무도 잘 알기에, 에이프릴을 마냥 나무랄 수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대정령과 계약하겠다고 한 건지 모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강해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 에이프릴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행복해지는 것. 세상 모든 아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들. 나는 에이프릴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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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지려는 건 좋아, 에이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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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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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 이해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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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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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넌 아직 한참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나이인걸. 네가 정말 대단한 아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나는 에이프릴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몸집이 작은 편인 내 품에도 쏙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검을 그렇게나 능숙하게 휘두르고, 마법을 공부하고, 이제는 심지어 대정령과 계약하겠다고까지…….

대견하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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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이라는 말이 있다.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나이 어린 병사라는 뜻이다. 나는 그 개념에 익숙해지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길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을 대신해 싸우는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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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심히 할게, 에이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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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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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잖아? 앞으로 네가 좀 더 믿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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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결정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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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하지만, 너는 계속 불안해하고 있잖아?”

에이프릴이 작게 움찔했다. 나는 아이의 자그만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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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잃을까 봐 불안해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못 미더운 어른이라는 뜻이야, 에이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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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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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이 아니라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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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을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수습했다. 이래서 평소의 언어생활이 중요하다니까. 난 인터넷을 너무 많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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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레이안도 믿어 주자. 나는 못 미더워도, 그레이안은 아니잖아? 네 양아버지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니까!”

치켜세워주는 말에 그레이안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티베리도 내 말에 긍정하듯이 두 번 짖었다. 저 녀석,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곧이어 스윽 팔을 뻗은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에이프릴을 응시하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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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내가 그동안 네 고된 수련을 걱정했던 건…… 네가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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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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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 말에 에이프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여태껏, 그레이안에게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어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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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강한 아이이지. 나는 매순간 너에게 감탄하고 있단다.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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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레이안을 응시하던 에이프릴이 별안간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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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의 허리를 꼭 껴안아 버리자, 그레이안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고장 난 병정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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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크흠, 힘이 정말, 세구나, 에이프릴…….”

저 사람, 조금 숨 막혀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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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라클 모닝 토끼가 힘이 세긴 하지. 에이프릴이 허리를 꽉 껴안으면 진짜 숨 막힌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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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워. 정말로 신기하구나.}

그때, 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과 놀라움, 그리고 호의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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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은 인간, 또 한 명은 토끼 수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레이안과 눈을 마주친(듯한) 닉스가 왜인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눈썹을 설핏 찌푸리고 둘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뭐? 왜 말하다가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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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갑자기 너무 궁금해지려 하잖아!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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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처럼 서로 뚜렷하게 다른 세 구성원이, 그렇게나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 제법 오랜만에 보는 듯해.}

저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그래서 아까 뭐라고 하시려던 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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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셋,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세 명이구나. 너희는 마치 세계수가 바랐던 이상적인 세계의 축소판 같아.}

아무래도 하다 만 말은 계속할 생각이 없나 보다. 나중에 그레이안에게 물어봐야지. 자꾸 캐물으며 귀찮게 굴면, 어쩔 수 없이 알려주지 않으려나? 그건 좀 민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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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리 중얼거리더니 닉스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별빛이 반짝이는 닉스의 손끝에서 그녀의 일부로 보이는 덩어리가 툭 떨어져 나왔다. 지름 5cm 정도의 그 타원형 덩어리는 곧 보석과도 같은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모양새는 흡사 라피스라줄리(청금석)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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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의 일부. 너희가 정령석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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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령석……?’

이 세계에서 정령석은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정령석은 정령의 일부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몸의 손가락 하나를 툭 떼어내서 돌로 만드는…… 으아악, 아무튼 그런 거인데, 그 귀하다는 정령석을 닉스가 별안간 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걸로 뭘 어쩔 생각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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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과 계약한 후, 나는 이 정령석에 잠들어 있으려고 해. 그러면 나의 권역인 이 안개 숲 미로와, 이곳에 사는 내 권속들도 동면에 들게 되겠지.}

그럼 눈사슴이나 눈토끼들도 동면에 들게 되는 건가……? 그거…… 왠지 미안해지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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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를 긴 잠이 되겠지만, 어차피 정령에게 시간은 의미 없는 것……. 이렇게 하면 나와 계약해도 에이프릴은 안전할 거야.}

그 말에 나비들이 얇은 실타래 같은 더듬이를 까닥이며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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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아. 정령석에 잠들면 계약자의 육신에 영향을 끼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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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석까지 만들다니 의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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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에이프릴이 마음에 들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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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프릴에게 자신의 일부까지 떼어주겠다니…… 이쯤 되니 나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에이프릴이 해를 입지 않고 안전히 계약할 방법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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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게요……! 저, 당신과 계약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에이프릴이 저렇게나 간절히 원하니까. 나로선 ‘어쩔 수 없나.’ 싶은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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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나도 너와 꼭 계약하고 싶단다. 하지만, 그전에…….}

닉스가 그레이안과 나를 쳐다보았다(닉스의 형체에는 눈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것 같았다). 곧이어 닉스가 사뭇 사려 깊은 태도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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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의 부모인 두 사람은 동의하나?}

……이거 꼭 학교에서 무슨 행사 있을 때 학부모 동의를 얻는 것 같군. 닉스의 물음에는 그레이안이 나보다 먼저 대답했다. 답이라기보다는 되물음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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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나?”

그러자 닉스는 거침없이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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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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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이 당신의 계약자가 되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에이프릴을 지켜줄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나?”

아니, 그레이안 씨? 그건 좀…….

물론 나도 닉스가 에이프릴을 확실하게 지켜주었으면 좋겠지만, 상대는 대정령이잖아! 대. 정. 령. 그냥 정령이 아니고 ‘대정령’이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그냥 나무와 세계수의 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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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까다롭게 굴어서 그렇지, 사실 대정령과 계약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닌지…….’

보통은,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레이안도 나도 의외로(?) 이것저것 따지는 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에이프릴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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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안과 나의 공통점을 찾았네. 신기하게도.’

그는…… 나에 비하면 무척 강인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약간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제법 친근한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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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걸 묻는구나. 대정령은 아무하고나 함부로 계약하지 않아. 필멸자인 그대는 느낄 수 없겠지. 지금 내가 에이프릴에게 느끼는 운명의 무게를 말이다. 에이프릴과 계약하는 것은 나의 사명이나 다름없어.}

‘운명’이니 ‘사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쩌다 이 미로에 휩쓸렸을 뿐인데, 대정령은 마치 이 모든 게 필연인 양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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