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쩌면 운명의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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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어쩌면 운명의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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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어쩌면 운명의 토끼
2022.05.18.
……나비들까지 저렇게 이야기하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대정령과 계약하는 게 에이프릴을 위해 좋은 일이라면…… 적극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과 계약하기에는, 에이프릴이 아직 너무 어려. 대정령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거다. 큰 힘을 받아들이는 게 육신에 얼마나 부담이 가는 일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레이안이 날선 목소리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어김없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야, 그레이안은 나와 에이프릴에게는 언제나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니까.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이프릴이 준비가 될 때까지, 내가 에이프릴 안에 잠들어 있으면 되니까.}
“……잠들어 있으면 된다고?”
{그래. 내가 몸집을 작게 하고 굴속의 토끼처럼 웅크리면 에이프릴에게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닉스의 말은 당연히 거짓이 아닐 것이다. 정령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믿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닉스가 에이프릴이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고 해서, 정말로 그럴지는 알 수 없는 거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건 알아. 그러나 에이프릴이 당신과 계약하게 됐을 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 그렇지 않나?”
그레이안도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닉스는 더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할 뿐이었다.
“……에이프릴과 계약하는 건 포기해 줬으면 해. 우리는 원치 않게 이 미로에 휩쓸렸으니, 어서 우리를 밖으로―.”
“끼앙!”
그때, 갑자기 내 품에서 쏙 빠져나간 에이프릴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모습이 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과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공작님, 공작 부인. 저는 대정령과 계약하고 싶어요.”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 우리가 닉스와 대화하는 내내 에이프릴이 조용한 게 영 수상하다 싶었지.
“이건 인생에 두 번 없을 기회예요. 대정령과 계약하는 건,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에이프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대정령과 계약하면 에이프릴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을 얻게 될 테니까. 그토록 원하던 강한 힘을 말이다. 그렇지만…….
“……만일 에이프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공작 부인…….”
“그럼 난…… 그때 왜 너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을까 하고 계속 자책하게 될 거야. 그리고 너무나 속상하고 슬플 거야.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울먹이며 이야기하자, 에이프릴의 눈동자도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에이프릴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못내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공작 부인…….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응, 알아. 나는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프릴이 강해지고 싶은 이유를 너무도 잘 알기에, 에이프릴을 마냥 나무랄 수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대정령과 계약하겠다고 한 건지 모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강해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 에이프릴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행복해지는 것. 세상 모든 아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들. 나는 에이프릴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강해지려는 건 좋아, 에이프릴.”
“…….”
“네 마음…… 이해해. 정말로.”
“…….”
“하지만…… 넌 아직 한참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나이인걸. 네가 정말 대단한 아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나는 에이프릴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몸집이 작은 편인 내 품에도 쏙 들어올 정도로 자그마한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검을 그렇게나 능숙하게 휘두르고, 마법을 공부하고, 이제는 심지어 대정령과 계약하겠다고까지…….
대견하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소년병이라는 말이 있다.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나이 어린 병사라는 뜻이다. 나는 그 개념에 익숙해지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길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을 대신해 싸우는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할게, 에이프릴.”
“공작 부인……?”
“난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잖아? 앞으로 네가 좀 더 믿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할게.”
“저는…… 제 결정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알아. 하지만, 너는 계속 불안해하고 있잖아?”
에이프릴이 작게 움찔했다. 나는 아이의 자그만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잃을까 봐 불안해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못 미더운 어른이라는 뜻이야, 에이프릴.”
“그, 그건…….”
“먼치킨이 아니라서 미안해…….”
“……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을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수습했다. 이래서 평소의 언어생활이 중요하다니까. 난 인터넷을 너무 많이 했어…….
“그리고 그레이안도 믿어 주자. 나는 못 미더워도, 그레이안은 아니잖아? 네 양아버지는 정말로 강한 사람이니까!”
치켜세워주는 말에 그레이안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티베리도 내 말에 긍정하듯이 두 번 짖었다. 저 녀석,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곧이어 스윽 팔을 뻗은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에이프릴을 응시하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에이프릴, 내가 그동안 네 고된 수련을 걱정했던 건…… 네가 너무 무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공작님…….”
“네가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 말에 에이프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여태껏, 그레이안에게 바로 그 말을 듣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너는 강한 아이이지. 나는 매순간 너에게 감탄하고 있단다. 정말이야.”
“…….”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레이안을 응시하던 에이프릴이 별안간 팔을 뻗었다.
“……!”
그대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의 허리를 꼭 껴안아 버리자, 그레이안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고장 난 병정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음, 크흠, 힘이 정말, 세구나, 에이프릴…….”
저 사람, 조금 숨 막혀하는 것 같은데.
‘우리 미라클 모닝 토끼가 힘이 세긴 하지. 에이프릴이 허리를 꽉 껴안으면 진짜 숨 막힌다니까.’
{……놀라워. 정말로 신기하구나.}
그때, 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과 놀라움, 그리고 호의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한 명은 인간, 또 한 명은 토끼 수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레이안과 눈을 마주친(듯한) 닉스가 왜인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눈썹을 설핏 찌푸리고 둘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뭐? 왜 말하다가 마는데?
‘뭔데? 갑자기 너무 궁금해지려 하잖아!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너희처럼 서로 뚜렷하게 다른 세 구성원이, 그렇게나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 제법 오랜만에 보는 듯해.}
저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그래서 아까 뭐라고 하시려던 거였죠?!
{너희 셋,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세 명이구나. 너희는 마치 세계수가 바랐던 이상적인 세계의 축소판 같아.}
아무래도 하다 만 말은 계속할 생각이 없나 보다. 나중에 그레이안에게 물어봐야지. 자꾸 캐물으며 귀찮게 굴면, 어쩔 수 없이 알려주지 않으려나? 그건 좀 민폐인가…….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리 중얼거리더니 닉스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별빛이 반짝이는 닉스의 손끝에서 그녀의 일부로 보이는 덩어리가 툭 떨어져 나왔다. 지름 5cm 정도의 그 타원형 덩어리는 곧 보석과도 같은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모양새는 흡사 라피스라줄리(청금석)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이건 나의 일부. 너희가 정령석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저, 정령석……?’
이 세계에서 정령석은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정령석은 정령의 일부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몸의 손가락 하나를 툭 떼어내서 돌로 만드는…… 으아악, 아무튼 그런 거인데, 그 귀하다는 정령석을 닉스가 별안간 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걸로 뭘 어쩔 생각이길래……?
{에이프릴과 계약한 후, 나는 이 정령석에 잠들어 있으려고 해. 그러면 나의 권역인 이 안개 숲 미로와, 이곳에 사는 내 권속들도 동면에 들게 되겠지.}
그럼 눈사슴이나 눈토끼들도 동면에 들게 되는 건가……? 그거…… 왠지 미안해지려 하는데.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를 긴 잠이 되겠지만, 어차피 정령에게 시간은 의미 없는 것……. 이렇게 하면 나와 계약해도 에이프릴은 안전할 거야.}
그 말에 나비들이 얇은 실타래 같은 더듬이를 까닥이며 수긍했다.
{응, 맞아. 정령석에 잠들면 계약자의 육신에 영향을 끼치지 않지.}
{정령석까지 만들다니 의외네.}
{그 정도로 에이프릴이 마음에 들었나 봐.}
“…….”
에이프릴에게 자신의 일부까지 떼어주겠다니…… 이쯤 되니 나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에이프릴이 해를 입지 않고 안전히 계약할 방법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할게요……! 저, 당신과 계약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에이프릴이 저렇게나 간절히 원하니까. 나로선 ‘어쩔 수 없나.’ 싶은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아가야, 나도 너와 꼭 계약하고 싶단다. 하지만, 그전에…….}
닉스가 그레이안과 나를 쳐다보았다(닉스의 형체에는 눈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것 같았다). 곧이어 닉스가 사뭇 사려 깊은 태도로 물어왔다.
{에이프릴의 부모인 두 사람은 동의하나?}
……이거 꼭 학교에서 무슨 행사 있을 때 학부모 동의를 얻는 것 같군. 닉스의 물음에는 그레이안이 나보다 먼저 대답했다. 답이라기보다는 되물음이었지만.
“에이프릴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나?”
그러자 닉스는 거침없이 긍정했다.
{물론이지.}
“에이프릴이 당신의 계약자가 되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에이프릴을 지켜줄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나?”
아니, 그레이안 씨? 그건 좀…….
물론 나도 닉스가 에이프릴을 확실하게 지켜주었으면 좋겠지만, 상대는 대정령이잖아! 대. 정. 령. 그냥 정령이 아니고 ‘대정령’이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그냥 나무와 세계수의 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가 까다롭게 굴어서 그렇지, 사실 대정령과 계약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닌지…….’
보통은,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레이안도 나도 의외로(?) 이것저것 따지는 면이 있는 사람들이다. 에이프릴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도 같고.
‘그레이안과 나의 공통점을 찾았네. 신기하게도.’
그는…… 나에 비하면 무척 강인하고 대단한 사람이라, 약간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제법 친근한 것 같기도…….
{당연한 걸 묻는구나. 대정령은 아무하고나 함부로 계약하지 않아. 필멸자인 그대는 느낄 수 없겠지. 지금 내가 에이프릴에게 느끼는 운명의 무게를 말이다. 에이프릴과 계약하는 것은 나의 사명이나 다름없어.}
‘운명’이니 ‘사명’이니 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쩌다 이 미로에 휩쓸렸을 뿐인데, 대정령은 마치 이 모든 게 필연인 양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