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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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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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닉스
2022.05.14.
‘이, 이…… 미친 토끼들……!’
약 10분 후,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면 이런 기분일까……?
이 미친 폭주족 토끼들은 정도를 몰랐다. 진짜 미친 속도로 질주하니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물론 나만 그런 거였고, 그레이안과 에이프릴, 티베리는 멀쩡했다.
‘젠장……. 왜 나만…….’
글로리아는 알고 보니 멀미도 심한 체질인가 보다. 이거 완전 개복치 아니냐고……!
“나는 개복치 수인이었나 보다…….”
“예?”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혼잣말을 귀신같이 엿들은 그레이안이 되물어 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젠장, 토할 거 같아…….
“부인……. 괜찮으십니까?”
“네, 뭐……. 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긴 하지만.”
그레이안은 나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게 했다.
나는 잠시 그렇게 서서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을 가라앉혔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는 하다.
“끼야웅.”
“꺄앙.”
“웅꺗!”
“끼앙~.”
한편에선 눈토끼 보스와 에이프릴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뭐라고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이내 악수 비슷한 것을 나누곤 서로 돌아섰다. 아마 인사를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토끼는 사회생활도 잘 하는구나…….’
마침 이쪽을 돌아본 에이프릴이 나를 향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너 눈을 왜 그렇게 뜨니? 뭔가 못마땅해하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내 멀미 증상이 좀 나아진 후에야 우리 일행은 미로의 끝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눈토끼 무리는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멀미만 안 했으면 나도 눈토끼들과 교류해 보는 건데.
“앍앍!”
길을 따라서 얼마쯤 걸었을까? 티베리가 짙은 안개 속을 향해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레이안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에이프릴이 티베리를 내려다보며 “끼앵.” 하고 울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안개 속에 무언가 있는 것 같군요. 에이프릴, 너도 느껴지니?”
“웅꺄앙.”
“그래, 조심하자구나.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그레이안이 긴장한 기색으로 내 손을 꽈악 힘주어 잡았다. 나 역시 경계심이 역력한 채로 그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마른침을 꼴칵 삼키며 다소 뻣뻣한 동작으로 걸음을 떼는데―.
{아하하하!}
{하하하하!}
{까르르르}
이 미로에 휩쓸리기 직전 들었던, 이상한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저절로 멈칫한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 웃음소리는 어느 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
‘……히이이익.’
이게 뭐야! 뭐냐고! 무서워!
내가 파르르 떨자 나와 맞닿은 그레이안의 팔뚝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조금 더 가깝게 끌어당기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부인. 제가 꼭…….”
그때였다.
{조심해, 글로리아!}
{정령이야!}
{성격 나쁜 정령!}
정면에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그 사이로 거대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언뜻 보면 아름다운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과 같은 모습인가 하면, 그렇진 않았다. 그것을 이루고 있는 건……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거대했고, 마치 짓눌릴 듯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 강대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멍하니 있던 나는, 티베리가 “앍앍!” 하고 짖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저 녀석, 엄청 용감하잖아! 조그만 새끼 늑대 모습을 하고선!
{시끄럽구나…….}
밤하늘로 이루어진 여자의 형상이 말했다. 묵직한 울림을 지닌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저 정체 모를 존재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얘들아, 그만 놀고 이리 오렴.}
그녀……라고 해야겠지? 일단은. 그녀의 말에 주변을 떠돌던 안개가 걷히더니 그 사이로 작은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형체들 역시 밤하늘과 같았는데, 또렷한 모양새가 아니라 마치 아무렇게나 빚은 반죽처럼 불규칙했다.
{저기에 그것들이 있어.}
{세계수의 성령들.}
{그것들이 또 인간과 계약했어.}
작은 형체들이 밤하늘 여인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일러바쳤다. 나는 예의 기묘한 웃음소리가 바로 저 작은 형체들로부터 들려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조각난 밤하늘 같은 그것들은 거대한 여자의 형상에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조각들은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했고, ‘닉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닉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글로리아의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 보는데, 마침내 모든 조각을 흡수한 밤하늘 여인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히익.’
지레 겁먹은 나는 그레이안의 등 뒤로 재빨리 숨었다. 그런 날 보며 밤하늘 여인이 작은 소리로 비웃는 것 같았다. 비, 비웃다니……! 너무하잖아! 사람이 겁이 좀 많을 수도 있지!
{세계수의 성령들이 선택한 인간이라……. 오랜만에 보는구나.}
……나한테 하는 말인가? 나도 뭐라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내 주위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곤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이 나비들은 나를 지켜줄 테니까.
“아, 안녕하세요…….”
{좀 더 자신 있게 말해, 글로리아!}
{맞아! 넌 우리가 선택한 세계의 조율자란 말야! 자신감을 가지라고!}
{정령 앞에서 쫄지 마!}
아니, 쫄지 말라고는 해도.
‘존재감이 장난 아니라고, 이…… 정령.’
나비들이 정령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이 밤하늘 여인의 정체는 정령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도대체 무슨 정령인 것인가, 목적은 무엇인가인데…….
‘왜 나를 미로로 끌어들인 거지? 티베리는 어쩌다 이 미로에 휩쓸린 거고…….’
{세계수의 대행자. 그대를 이 미로로 끌어들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권속들이야.}
“……!”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정령이 이야기했다. 놀라 흠칫하자니 정령이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대의 머릿속을 침범한 건 아니니 안심해. 그랬다가는 세계수의 성령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그, 그렇다면 안심이지만.
{그저, 그대의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겠어서 말이야. 저 새끼 늑대가 어쩌다 미로에 휩쓸렸는지 궁금한 거지?}
……족집게시네요. 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 새끼 늑대는, 감히 나를 가둔 바깥의 이단자들로부터 도망치다가 미로에 휩쓸리게 되었지. 내 권속들이 저 아이를 일부러 끌어들인 건 아니란다.}
“……그렇군요.”
그럼 나는 일부러 끌어들였다는 얘기가 되는군.
{정령들은 예전부터 세계수의 성령들이 인간과 계약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지……. 그래서 이번에도…… 내 권속들이 심술을 부린 모양이야.}
심술부리는 스케일 하나 끝내주네. 덕분에 이쪽은 존재 상실의 위기에 처했다고!
{글로리아에게 사과해!}
{맞아, 제대로 사과해!}
{네 권속들 단속 똑바로 하라구! 밤의 대정령!}
나비들이 정령을 향해 날개를 파닥거리며 항의했다. 나는 ‘밤의 대정령’이라는 말이 신경 쓰여 잠시 그 점을 곱씹었다. 밤의 대정령, 닉스라는 이름, 뭔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아!’
글로리아의 기억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정보. 그게 순간적으로 퍼뜩 떠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대정령. 그중 가장 위험하고 강력하다는…… 밤의 대정령 닉스에 관해서.
[밤의 시간을 지배하는 대정령, 닉스는 별빛과 어둠의 주인이다. 또한 망자를 다스리는 저승의 여왕이기도 하다.]
[닉스의 미로는 백야(白夜). 어둠을 잃은 밤이다. 미로의 하늘이 밝은 이유는…….]
‘이다음은…… 뭐였더라?’
머리를 싸매고 곰곰이 생각하던 때였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대정령 ‘닉스’로부터 어둠이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나뭇가지처럼 길게 사방으로 뻗어나간 어둠은 곳곳을 밤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짙은 그림자가 이 미로 숲을 온통 잠식해 나가는 것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숲은 완연한 밤이 되었다. 남청색 물감을 흠뻑 들이마신 듯한 밤하늘 위로, 보석 가루 같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낮이 아니었어.’
처음 이 미로에 왔을 때, 낮의 하늘인데 별이 보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낮의 하늘에 별이 가득한 게 아니었다.
이 공간은, 처음부터 밤이었다.
‘다만, 밤의 어둠을…….’
전부, 이 대정령이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뿐.
{나는 밤의 시간을 지배하는 자. 별빛과 어둠의 주인, 닉스.}
닉스의 목소리가 마치 악기의 음색처럼 울려 퍼졌다.
{너희를 해칠 마음은 없어. 다만…….}
살포시 웃음을 흘린 닉스가 에이프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에이프릴을 끌어안으며 주춤 물러났다. 그레이안도 표정 없는 얼굴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뭘 어쩔 생각이지?”
그의 낮은 목소리에 위협이 깔려 있었다. 닉스가 손을 거두며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 아이에게 운명을 느꼈어. 저 아이와 너희는 아직 알 수 없지. 하지만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존재하는 우리 영적인 존재들은 느낄 수 있어. 과거와 미래를 잇는 운명의 존재를.}
에이프릴에게 운명을 느꼈다는 게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에이프릴을 더욱 꼬옥 껴안았다. 혹시 닉스가 에이프릴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망설일 것도 없이 나비들의 힘을 쓸 생각이었다.
{나는 그 아이와 계약하고 싶어.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 아이와 내가 계약하는 것은 운명이니까.}
“……?”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닉스를 쳐다봤다. 밤하늘로 가득 찬 여자의 실루엣이 다시 한 차례 더 우리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아르릉……!”
그러자 티베리가 잽싸게 뛰쳐나가 닉스를 향해 으르릉거렸다. 자신을 위협하는 티베리를 보며 닉스는 다소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비키렴, 꼬마야. 나는 너와 네 친구들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아.}
닉스가 짐짓 상냥한 어조로 티베리를 타일렀다. 그 말은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닉스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다.
{흠……. 진짜인 모양인데.}
{밤의 대정령이 에이프릴과 정말로 계약하고 싶은 모양이야.}
{정령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큰 타격을 입게 되거든.}
나비들이 날개를 팔랑거리며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에이프릴이 닉스와 계약하는 것을 나비들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 의외였다. 너희, 정령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니?
{정령은 싫지만, 에이프릴이 큰 힘을 얻을 기회를 방해할 순 없지.}
{세상에 몇 안 남은 토끼 수인으로 살아가는 건 여러모로 힘든 일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여기저기서 에이프릴을 주목하고 있으니…… 대정령의 후원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지.}
{대정령의 계약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도 감히 에이프릴을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응, 미친 게 아니고서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