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눈토끼 무리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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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눈토끼 무리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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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눈토끼 무리의 습격
2022.05.11.
“무슨 맛이었습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그레이안이 넌지시 물어왔다.
나는 나비들과 나눈 대화와 만년설 열매의 맛을 그에게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눈 맛이라……. 맛은 어찌 됐든, 정말로 그 열매에 신비로운 효능이 있어 부인의 몸이 튼튼해지면 참 좋을 텐데요.”
“…….”
내 몸을 튼튼하게 해서 뭘 어쩌려고?
여하튼, 우리는 계속해서 미로를 헤쳐나갔다. 나비들이 길을 안내해 주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다소 의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녀석들은 이 와중에도 여러 번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려 촐싹댔기 때문이다.
{앗, 눈사슴이다!}
{바보 같이 생겼어.}
{눈토끼도 있으려나?}
{눈으로 되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에이프릴이랑 똑같이 생겼을걸.}
눈토끼라…… 그건 좀 궁금했다. 내 품 안의 토끼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데, 눈으로 되어 있다는 그 토끼는 차갑고 부슬부슬하려나?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힘내, 글로리아!}
{에이프릴도 힘내! 비록 편하게 안겨서 가고 있긴 하지만!}
{에이프릴은 불속성 효녀로구나.}
……이 녀석들은…… 전부터 든 의문인데, 내가 살던 세상의 인터넷 밈을 어떻게 이리도 잘 아는 걸까?
고민하던 나는 슬쩍 미끼를 던져 보았다.
‘이 미로를 만든 정령, 완전 집착광공 같네.’
{그러게.}
‘너희 집착광공도 알아?’
{당연히 알지~!}
{다른 것도 알아! 북부대공!}
……그건 분류가 다르지 않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거 다 내가 살던 세상의 인터넷 밈이잖아. 너희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어? 우리가 말 안 했었나?}
{안 했어 바보들아.}
{네가 제일 바보야.}
{뭐라고? 말 다 했어?}
{다했으면? 어쩔 건데?}
{거기 둘! 조용히 좀 해! 설명하려는데 방해되잖아!}
{그러니까, 우린 말이지…….}
나비 한 마리가 내 얼굴 근처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막 설명해 주려던 참이었다.
{……!}
{뭐지?}
{뭔가 오고 있어!}
나비들이 움찔하며 반응한 것과 동시에, 땅에서부터 미미한 진동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오는 건데?!’
“부인.”
그레이안도 진동을 감지했는지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는, 나와 에이프릴을 두 팔로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뭔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여럿입니다.”
“위험한 걸까요?”
“그건…….”
두두두두!
별안간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괴생물체(?)와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히, 히익……!’
대체 뭐가 오는 거냐고! 지레 겁먹은 나는 무의식중에 그레이안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
움찔한 그레이안이 머뭇대거나 말거나, 나는 동아줄에 매달리듯 그를 꽉 붙잡았다.
“끼앙.”
한편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어깨 위에 당당한 자세로 올라서 있었다. 앞발을 들어 올린 채, 뒷발로만 서서 용감하게 정면을 주시한다. 겁쟁이인 나와는 사뭇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대, 대단해. 역시 용감한 토끼.’
나는 그레이안의 품에 쏙 안긴 채 실눈을 뜨고 정면을 살펴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게 오길래……!
“……?”
두두두두―!!
점점 더 거세지는 진동. 그리고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토끼?’
그 괴생물체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십 마리의 새하얀 토끼들이었다!
{눈토끼다!}
{눈토끼 무리가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어!}
{걱정 마, 글로리아! 우리가 어떻게든 막아볼게!}
나비들이 눈토끼 무리의 앞을 잽싸게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종잇장처럼 펄럭이는 나비들이 저 어마어마한 토끼 무리를 막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토끼 무리에 부딪혀 하늘로 날아가지만 않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
‘차라리 그레이안이 늑대로 변해서 위협하면…… 음?’
두두두두―!!!
이제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거세진 울림. 그리고…….
한순간 시야로 들어온…… 저건…….
‘……강아지?’
웬 강아지 한 마리가, 토끼 무리 바로 앞에서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앍앍!”
회색 강아지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이쪽을 향해 짖어댔다.
마치 구조 요청 같았다.
“웅꺄앙!”
강아지를 발견한 에이프릴이 귀를 쫑긋 세우고는 뭐라고 소리쳤다.
두두두두두―!!!
지진을 방불케 하는 진동 속, 토끼와 강아지의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앍―!”
“끼앙꺗!”
“앍앍……! 아오오―!”
“끼우웅……!”
‘대체 뭐라고들 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통역 귀걸이를 가져오는 건데. 그나저나…….
“…….”
저 눈토끼들, 뭐랄까, 좀…….
좀…….
너무 크지 않아……?
‘근육질 중세 토끼……?’
두두두두―!! 다닷―!!!
미친 속도로 달려오던 눈토끼 무리가 우리로부터 2m 남짓한 거리에 멈춰 섰다. 그 순간 땅의 진동이 뚝 멎으며 찬바람이 확 몰려왔다.
눈토끼 무리를 피해 도망치던 회색 강아지는 어느 틈엔가 그레이안의 등 뒤로 쏙 숨어 버렸다.
벌벌 떠는 모양새가, 저 눈토끼들을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무서워할 만도 해.’
그도 그럴 게, 이 토끼들은…….
웬만한 대형견 사이즈인 데다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었기 때문이다.
‘눈토끼라는 게…… 에이프릴처럼 귀엽고 깜찍한 토끼가 아니었다니!’
에이프릴의 솜방망이는 하찮기 그지없지만, 이 눈토끼들의 솜방망이는…… 맞는 순간 저 멀리 날아갈 것만 같다. 그야말로 맹수 토끼들이었다.
눈토끼들은 가만히 멈춰 선 채로 우리 일행과, 우리를 지키듯 앞을 가로막은 나비들을 훑어보았다.
이 토끼들 모두 새하얀 털(?)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실, 털인지 눈송이인지 모르겠는 재질이었다.
그리고 토끼들의 눈은 놀랍게도 파르스름한 색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토끼가 아니라 요정 같아 보였다.
‘저 중에 몸집이 가장 큰…… 저 토끼가 대장 토끼인가?’
―라고 생각하자마자, 몸집이 가장 큰 토끼의 어깨 위로 조그만 토끼 하나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
아기 토끼인가?
다른 토끼들에 비하면 크기가 엄청 작은데?
“끼웅꺗.”
그 아기 토끼가 몸집이 큰 토끼에게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 토끼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기 토끼를 어깨에 태운 채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니, 잠시만.’
설마 쟤가 보스야? 저 아기 토끼가?
말도 안 돼! 저렇게나 조그만데?
“꺄잉낏― 끼야웅 꺗.”
큰 토끼가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서자, 아기 토끼가 우리를 보며 무슨 말인가 근엄하게 건네왔다.
……당연히,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레이안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끼애웅!”
에이프릴은 알아들을 수 있다. 동족(?)이니까.
어느샌가 그레이안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탄 에이프릴은, 두 앞발로 그레이안의 머리채를 잡고 마치 우주선처럼 그레이안을 조종했다.
머리채를 앞으로 쭉 밀면 ‘전진!’ 뒤로 당기면 ‘멈춰!’인 것 같았다. ……졸지에 탈것이 된 그레이안은 겸연쩍게 웃으며 에이프릴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탈것 취급을 당하면서도 화내지 않다니, 저 사람은 역시 성인군자다…….
“끼애앵, 꺄앙?”
아기 눈토끼의 앞으로 다가간 에이프릴이 토끼 소리로 물었다. 편의상 ‘토끼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 참, 내가 토끼 울음소리에 이런 명칭을 붙이게 될 줄은…….
“끼우우웅, 끼얏웅!”
“웅꺗, 꺄잉잇 꺄앙.”
뭐라는 거야 진짜.
그런 알 수 없는 대화가 5분쯤 오갔다. 대화하는 동안 아기 토끼는 씩씩 화를 내다가, 잠시 진정했다가, 다시 화를 내고는 잠시 후 조용해졌다.
토끼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아기 토끼가 뭐에 화내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에이프릴이 화난 아기 토끼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웅꺗.”
“웅꺄앗?”
“꺗.”
대화는 그것으로 끝난 모양이었다. 아기 토끼를 태운 큰 토끼가 우리로부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눈토끼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 둘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체 무슨 대화였던 거지?
‘……에이프릴에게 물어봐야―.’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레이안의 머리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에이프릴이 모습을 확 바꿨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나부꼈다. 에이프릴은 분홍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웃으며 기쁜 듯 말했다.
“눈토끼들이 우리를 출구까지 태워 주겠대요!”
“뭐……? 진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니, 에이프릴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눈토끼들이 티베리에게 화가 나 있어서…… 그 점은 저희 쪽에서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해 줘야 할 것 같아요.”
“티베리?”
내가 의아함을 내비치자, 에이프릴은 “아.” 하고 외마디를 흘리더니 허리를 굽혀 회색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나 보란 듯이 회색 강아지를 앞으로 내밀며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께서는 모르시겠네요……. 이 작은 회색 늑대가 바로 티베리예요. 밀턴 부인의 조카요.”
아니, 뭐라고? 밀턴 부인의 조카?
게다가 회색 늑대요?
강아지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여기 이…… 얘가 늑대 수인이란 말이지? 지금은 새끼 늑대 모습인 거고?”
“네……. 티베리는 늑대 모습일 때 몸집이 작은 편이라서요.”
아니, 그냥 작은 정도가 아닌데. 나는 얘가 강아지인 줄로만 알았다고!
“끼잉…….”
내심 황당해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회색 강아지…… 아니, 새끼 늑대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무서운가? 이 녀석도 글로리아의 악명을 잘 아는 모양이로군.
‘회색 털이 부들부들해 보여. 만져보고 싶다.’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짐짓 점잖게 물었다.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했기에 눈토끼들이 화가 난 거니?”
“그게요……. 티베리가 눈토끼들의 만년설 열매를 훔쳐먹었다나 봐요.”
“깨갱, 깽…….”
“배고파서 어쩔 수 없었대요.”
그 눈 맛이 나는 열매 말인가……. 그런 걸 훔쳐먹을 정도면 진짜로 배고팠던 모양이다.
하긴, 이 티베리라는 아이가 실종된 지 벌써 며칠째니까…… 그동안 제대로 못 먹고 지냈다면 딱딱한 나무뿌리조차 맛있게 느껴질 터였다.
“티베리, 그동안 고생 많았겠구나. 딱하게도.”
어느샌가 내 곁으로 다가온 그레이안이 티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티베리는 더욱 불쌍한 눈을 하며 깨갱거렸다.
“깨앵……! 깽!”
“그래, 착하지.”
“끼잉……!”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뭐지? 대화가 통하나?’
같은 늑대 수인끼리는 대화가 통하는 걸까?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레이안을 쳐다보자, 그가 날 향해 설핏 웃고는 입을 열었다.
“뜻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어렵지만, 대략적인 뉘앙스는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늑대 수인이니까요.”
“아하……. 그렇군요.”
“제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면 뜻이 완벽하게 통했겠지요……. 아무튼 간에, 눈토끼들이 태워 준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덕분에 빠르게 출구를 찾을 수 있겠군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말을 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긴 했다. 그레이안은 왜 늑대 모습을 하지 않는 것일까?
‘물어봐도…… 흠.’
당장은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꺄웅잇!”
다시 토끼 모습으로 변한 에이프릴이 커다란 눈토끼의 등에 올라타 용맹하게 외쳤다.
이어서 보스 토끼(예의 아기 눈토끼…….)가 또 뭐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눈토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 이거 괜찮은 거냐고!’
눈토끼 익스프레스!
그야말로 차가운 눈송이를 만지는 듯한 촉감인, 눈토끼의 등에 올라타 달리는 기분이란……! 정말로……!
‘무서워!!’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이놈들은 폭주 토끼였다. 괜히 요란한 땅 울림을 냈던 게 아니라니까……. 지금도…….
두두두두―!!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으니까!
‘사람 살려―!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