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정령의 미로 2022.05.07.
“…….”
“…….”
토끼와 나 사이에 조용히 시선이 오갔다. 살금살금 내 눈치를 살피는 토끼와, 그런 토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
“꺄웅…….”
“…….”
마치 ‘혼낼 거야?’라고 묻는 듯한 토끼. 나는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일단 이리로 오렴, 에이프릴.”
“끼아웅…….”
앞발을 슬쩍 땅에 내려놓은 에이프릴이 이내 폴짝폴짝 뛰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가까이 오진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머뭇거린다.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냉큼 손을 뻗어 토끼를 낚아챘다.
“끼앙!”
“요 녀석!”
에이프릴은 속았습니다. 못 도망치게 꽉 붙잡고서 혼낼 생각이었거든요.
“이번 일은 위험하니까 어린이는 얌전히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또 말 안 듣지!”
“끼야앙!”
토끼가 앞니를 드러내며 반항적으로 소리쳤다. 어쭈? 오히려 화를 다 내고?
“게다가 아까 같은 상황에서……! 네가 뛰어들면 어떡해! 이 바보 토끼야……!”
“끄앵!”
토끼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며 앞발을 샥샥 휘둘러댔다. 나에게 앞발 펀치를 날리려는 모양이었지만, 워낙 짧아서 닿지 않았다.
“요 솜방망이!”
“끼애앵!”
토끼를 품으로 쏙 끌어당겨 안고서 한 손으로 토끼 앞발을 덥석 잡았다. 토끼가 극대노하며 내 손을 뿌리쳤다.
“끄애웅!”
“너까지 휩쓸리면 어떡해! 바보야……! 로드리는……. 네가 이럴까 봐 그 녀석을 붙여뒀던 건데, 대체 어디서 뭘…….”
“……깨웅.”
토끼의 반항이 조금 잦아들었다. 내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는 내게 미안해진 모양이었다.
“다음부턴 절대 이러지 마, 에이프릴. 아깐 정말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끼웅…….”
두 앞발을 꼼지락거리던 토끼가 이내 결심한 듯 눈을 감았다. 곧이어 토끼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얀 머리칼에 분홍 눈을 지닌,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어쩔 수 없었어요, 공작 부인…….”
내 품에 쏙 안긴 채, 에이프릴이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공작 부인이 그 문 너머로 사라지는 미래를 봤어요. 그런데 그다음은 도저히 보이질 않아서…….”
“…….”
“혹시 잘못되실까 봐, 너무 걱정이 돼서…… 그래서 달려온 거예요…….”
에이프릴이 하얀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을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귀여워……!”
“……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래! 우리 에이프릴이 그럴 수도 있지!”
이성은 이미 날아간 뒤였다. 나는 당황한 에이프릴을 꼭 끌어안은 채 주접을 남발했다.
“너무 귀여워! 내 딸이 최고야!”
“고,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라니? 엄마라고 부르렴!”
에이프릴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이 몹시도 부끄러운지 몸을 바르르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얼굴은 이미 사과처럼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고, 공작 부인, 저 좀…….”
“아이 참, 엄마라고 부르래도?”
견디다 못했는지, 에이프릴은 다시 한순간에 토끼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작고 새하얀 토끼가 나에게 앞발을 휘두르며 뭐라고 나무랐다.
“끼우웅……!”
그만 좀 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보송보송한 토끼 뺨에 대고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부끄럼도 많은 토끼.”
“……!”
“용감하지만, 부끄럼쟁이인 토끼~.”
놀리는 말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에이프릴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하하하.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속으로 마구 웃어댔다.
“끼웅꺗!”
토끼가 어서 그만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화를 냈다. 통역 귀걸이가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양심을 밖으로 빼놓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화내는 모습도 너무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놀리고 싶어지는걸!”
“끄애웅―!!”
휘익―! 새하얀 솜방망이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결국 토끼 앞발에 한 대 맞고 말았다. 극대노한 토끼와 겨우 화해한 뒤에, 나는 여러모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레이안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 주접을 그레이안이 다 지켜보고 있었다니…… 창피하다.’
다음부턴 진짜로 자제해야지. 에이프릴 좀 그만 놀리고…….
“일단, 이곳은 ‘정령의 미로’인 것 같습니다.”
“정령의 미로……?”
의아해하며 되묻자니, 그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예, 정령의 미로는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무시하지요. 아무래도 그 문 너머에 있던 것은 바로 이 정령의 미로였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미로에 휩쓸린 것이고요.”
우리…… 그러니까 그레이안과 나, 에이프릴이 정령의 미로에 휩쓸린 것은 전부 나 때문이다. 내가 문에 홀리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닙니다, 부인 잘못이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정령의 미로는 원래 사람을 쉽게 홀리는 데다…….”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대꾸한 그레이안이 내 근처의 나비들을 흘끗 살펴보고는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나비들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정령은 성령과 유사한 기운을 띤 존재여서, 성령들이 이변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요.”
그레이안이 말을 마치자,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와 내 머리와 뺨, 옷에 달라붙었다. 이어서 소심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미안, 글로리아……}
{이 미로를 만든 건 아주 강력한 정령이야. 우리도 눈치채지 못했어.}
{네가 그 문에 닿은 순간, 이미 정령의 권역을 침범해 버린 거라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어.}
나비들도 이번만큼은 장난스러운 기색 없이 진지하게 사과해 왔다.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모양이었다.
‘아니야, 홀린 내가 잘못이지 뭐…… 가 아니라, 홀린 놈이 잘못이지! 왜 나를 홀려?!’
가만 생각해 보니 울컥했다. 도대체 뭐하는 정령이길래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홀리고 난리야?
‘물론 글로리아는 지은 죄가 많지만, 난 아니잖아! 정령이 그런 것도 몰라?!’
이 미로의 주인인 정령과 대화할 수만 있다면 A부터 Z까지 요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그,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글로리아!}
{맞아! 왜 엄한 사람을 홀려서 미로로 끌어들이고 난리야?!}
{하여튼 정령들은 성격이 나쁘다니까!}
나비들이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내 말에 찬동하고 나섰다. 후―, 한숨을 쉰 나는 품 안의 토끼를 마구 쓰다듬으며 분노를 삭이려 애썼다. 보송보송 토끼 털은 화를 가라앉히는 데에도 효능이 뛰어났다.
‘좋아, 이 미로의 주인을 만나서 따져야겠어. 미로를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거지?’
내 물음에, 나비들은 왜인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렇긴 한데…….}
{미로를 통과하는 게 쉽지 않아.}
{정령의 미로는 길을 찾기 까다롭거든.}
{하지만, 우리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글로리아!}
{맞아! 우리가 도와줄게!}
“…….”
이 녀석들, 믿어도 되는 건가? 어째 불안한데…….
{자, 그럼 출발~!}
{우리가 앞장설게! 가보자고!}
여러모로 못 미더웠지만, 어쨌든 이번엔 나비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녀석들, 길 하나는 기막히게 잘 찾으니까.
{와, 저 꽃! 꿀이 엄청 달콤한데!}
{저 열매도! 진짜 오랜만에 본다!}
‘…….’
이 자식들……. 찾으라는 길은 안 찾고 쓸데없는 거에 정신 팔리면 어쩌자는 거야?!
‘너희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진지해야 할 상황에서는 제발 좀 진지해져라!’
{칫…… 시부모님 같은 글로리아.}
{심각한 상황일수록 유머를 겻들여야 하는 거야~. 글로리아는 풍류를 모르는구나?}
{겻이 아니라 곁이야.}
{아앗! 저기 좀 봐! 만년설 열매가 열리는 나무야!}
“아 너희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머지 육성으로 소리쳤다가,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을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늑대와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해명했다.
“그게, 나비들이 자꾸만 헛소릴 해서요…….”
“아하…….”
그레이안도, 에이프릴도 나비들이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위대한 세계수의 성령들이 저런 푼수 같은……! 허당들이라는 진실은 차마 밝힐 수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걱정이로군요…….”
“……?”
그레이안이 넌지시 꺼낸 이야기에 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안의 시선은 뿌옇고 짙은 안개 너머를 향해 있었다.
“어서 이 미로를 탈출하지 않으면…….”
“아, 않으면……?”
“우리의 존재가 현실 세계에서 사라질 겁니다.”
“……예?”
“간단히 말해,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
뭐, 뭐야, 그게? 무서워!
‘아니, 이 미로가 그렇게나 위험한 거였단 말이야?!’
인세구원회 놈들은 시설에 이런 미로를 두고 대체 뭘 해왔던 거지……?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정령이 만든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은 존재를 상실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엘로윈 왕국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지요.”
“…….”
종종 있는 일이라고……? 이런 게?
“하지만 여긴…… 사이비 종교 시설이잖아요? 왜 이런 곳에 정령의 미로가 있는 건지, 도통…….”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레이안이 막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글로리아! 이거 먹어 봐!}
{만년설 열매야!}
{얼른, 얼른 먹어 봐!}
나비들이 힘을 합쳐 영차영차 무언가를 들고 왔다. 난 이 녀석들이 물체를 들어 올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다…….
‘아니…… 뭔데 그래?’
심각한 상황에 자꾸만 성가시게 하는 나비들이 못마땅했다. 부루퉁하게 묻자니 나비들이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날개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이건 만년설 열매야. 정령의 권역에서만 자라는 만년설 자작나무에서 열리는 거지. 이걸 먹으면 시력이 좋아지고 병이 싹 낫고 몸이 튼튼해지는 데다, 때론 신기한 능력이 생기기도 해!}
{근데 맛없―.}
{조용히 해.}
“…….”
나는 나비들이 가져온 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품 안의 토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예의 만년설 열매를 살펴보고 있었다. 열매는 눈처럼 새하얬는데 과연 이름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맛도 눈 맛은 아니겠지……. 일단 모양만 봐선 체리와 매우 흡사해 보였다.
{우리가 글로리아 주려고 가져온 거야!}
{맞아! 어서 먹어 봐!}
‘……그래, 잘 먹을게. 고마워.’
어김없이 촐싹거리는 나비들을 향해 영혼 없이 대답하며 열매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거, 의외로 묵직했다.
‘뭐, 뭐야. 쇠구슬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열매 같은데……. 그래도 촉감은 과일이 확실했다. 말랑말랑 탱글탱글한 게. 옆에서 그레이안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흘끗 곁눈질하다가, 하얀 열매를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으음, 이건…….’
……확실히, 이 맛은……!
‘눈 맛이잖아!!’
이름만 만년설 열매인 게 아니라 맛도 눈 맛이잖아! 아니, 눈 맛이라 만년설 열매인 건가?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맛없어! 이게 뭐야!’
{역시 맛없―.}
{원래 그 맛으로 먹는 거야. 어때? 막 힘이 솟는 거 같지 않아? 갑자기 눈이 밝아진 거 같다든가!}
‘글쎄…….’
딱히 뛰어난 효능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토끼에게도 열매를 줘 보았다. 토끼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이내 눈매를 와락 구기고는 앞발을 휘둘러 열매를 패대기쳤다.
{아앗! 귀한 만년설 열매가!}
{나쁜 토끼!}
{폭군 토끼!}
나비들이 자신을 매도하는지 알 길이 없는(사실 알아도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은) 에이프릴은 “키훙.” 하고 코웃음 치더니 두 앞발로 쓱싹 세수를 했다. 마치 ‘저런 맛없는 걸 왜 먹어?’라고 비웃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