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감당이 안 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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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감당이 안 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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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감당이 안 될 만큼
2022.04.27.
……두 사람 다 수인이 아닌 보통의 인간. 그리고 ‘인세구원회’라…….
‘……그러네, 느낌이 안 좋네. 구린 냄새가 나.’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여길 둘러볼게!}
{수상한 장소의 수색은 우리에게 맡겨 줘!}
{이런 건 전문이니까 말이지!}
올리비에는 그레이안을 데리러 다시 지상으로 향했고, 나비들은 복도를 높이 날며 이 수상한 은신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비들의 대단한 점은 아무런 저항 없이 벽을 쑥 통과할 수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투명하고 소리가 없어서 들키지도 않으니, 과연 수색에 적합한 녀석들이었다.
‘매우 쓸모가 있는 나비님들. 인정.’
{뭐라고? 우린 당연히 쓸모가 있지! 여태 우리를 뭐라 생각했던 거야?}
{글로리아는 우리를 좀 더 소중히 여겨야 해.}
{맞아. 우리에게 온천이 있는 호캉스를 보내 줘야 한다고!}
“…….”
너희가 온천에 가서 뭘 할 수 있는데……?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는 나비들을 잠시 상상했다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장면이라 얼른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온천에 들어가면 익어 버리는 거 아니냐고……. 물론 이 녀석들은 진짜 나비는 아니지만.’
{으음, 식당, 독서실, 놀이방, 그리고…… 기도실? 같은 게 있네.}
{의외로 평범해.}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겠어.}
나비들의 탐색은 계속됐다. 지켜보며 느낀 건데, 이 녀석들은 프로였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나 이전에 다른 사람과도 계약했었을 테고, 그때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지.
‘세계수의 나비들은 대대로 아인스턴 왕가의 혈통을 잇는 자와 계약해 왔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건 글로리아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의아한 일이긴 하다. 세계수의 나비들이 선택한 게 ‘나’라는 게.
{여긴…….}
그때, 나비들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나비들의 시야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머릿속에 그려진 광경은―.
‘이…… 아이들은…….’
결벽적일 정도로 새하얀 방 안,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는 수인 아이들.
수인 아이들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은, 수인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아이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수인 아이들이야!}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어.}
{게다가…… 다들 상태가 이상해.}
{눈에 생기가 없어…….}
{움직임도 좀 이상하고.}
“…….”
나는 충격에 굳은 채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이 아이들은 마치…… ‘생명력’을 빨린 듯한 상태였다. 시들어가는 식물처럼 생기가 없고, 눈에는 아무런 의지도 엿볼 수 없었다.
‘아이들의 상태가 왜 이렇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가장 먼저, 나는 분노했다. 이건 그 인세구원회인가 뭔가 하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짓이 틀림없었다. 역시 느낌이 싸하더라니. 빌어먹을 개자식들이었던 거였다.
이렇게 수인 아이들만 모여 있는 걸 보니 ‘인세구원회’가 납치의 배후임은 의심할 여지 없고.
‘당장…… 쳐들어가야겠어.’
나는 이동 마도구를 손에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납치범들의 아지트를 알아냈으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나와, 바깥에 서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죠. 납치범들을 찾았어요.”
“주군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까?”
“그레이안은…….”
나는 재차 정신을 집중하고 그레이안 쪽을 살펴보았다. 그는 예의 사이비 전도사, 올리비에와 함께 어두운 통로를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러다간 그레이안이 고립되겠어.’
통로는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벽돌을 순서대로 두드려야 나타나는 비밀 통로이니, 닫혀 버리면 우리로선 돌파할 방도가 없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그 앞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마침 그레이안이 통로가 있는 골목에 표식을 남겨둔 모양이니까.’
기사들과 나는 그 표식을 이정표 삼아 이동 마도구를 쓰면 될 일이었다.
이 이동 마도구는 표식을 남긴 자리로 즉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레이안이 위험해요. 어서 지원하도록 하죠.”
“예? 주군께서 위험하시다니…….”
기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내 말에 더는 토 달지 않고 빠르게 행동에 나서 주니 다행인 일이었다. 성가시게 구느라 시간을 지체했더라면 이 기사들에게 화를 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래, 확실히, 나는 날이 서 있었다.
‘그 아이들…….’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아이들을 떠올리자,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사이비 납치범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좋지 않은 종류이리란 것은 분명했다.
‘끽해야 에이프릴의 또래거나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인데…….’
……도대체 얼마나 잔인한 악마 새끼들이어야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수인 아이들이라서? 역시 인세구원회인가 뭔가는 수인 혐오 집단인 건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때마침 들려온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기사들과 한 데 모여 동시에 이동 마도구를 사용했다.
이렇게 뭉친 모양새로 이동하는 것은 오차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이동한 사람이, 먼저 도착한 사람의 몸 위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모양이니까.
‘그랬다간 최소 한 명은 뇌진탕 확정이지.’
기사들과 나는 둥글게 모인 모양새로 예의 골목에 도착했다. 비밀 통로는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그곳을 가리키자, 기사들은 빠르게 눈치채고는 바삐 달려갔다.
나 역시 뒤처질세라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렇게 해서 입구가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어두운 통로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척 어둡군요……. 공작 부인, 제 손을 잡으십시오. 혹시 발을 헛디디실지도 모르니…….”
워낙 어두워서 누구인지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기사 중 한 사람이 제법 친절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맙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곁을 날아다니던 나비들이 별안간 투명화를 해지하고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우리가 길을 비춰 줄게!}
{자, 이제 어둡지 않지?}
……맞다, 이 녀석들, 손전등(?) 역할도 할 수 있었지.
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기사의 손을 놓았다. 밝아진 데서 보니 꽤 잘생긴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손은 잡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잘생긴 금발의 기사도 납득했는지 설핏 웃고는 나비들을 힐끔거렸다. 나비들은 타격감 없는 날개로 기사의 뺨을 파닥파닥 치며 위협했다.
{뭘 봐? 잘생긴 놈아.}
‘…….’
나는 어이없어하며 나비들을 흘겨보다가 이내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내 뒤를 바짝 따랐다.
통로는 제법 길었다. 지하까지 약 3층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공작 부인, 주군께서 어디 계신지 보이십니까?”
“잠시만요…….”
나비들의 시야를 엿보자, 그레이안의 모습이 바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레이안은 올리비에와 함께 식당에 가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여서 경계를 푼다, 이건가.’
쫄쫄 굶은 채 길을 헤매던 아이라면 쉽게 회유될 법했다. 이 사이비 자식들, 생각 이상으로 체계적이다.
‘하기야,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사이비들은 치밀하게 남을 속이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어쨌든 당장은 그레이안에게 위험이 닥칠 일은 없을 듯싶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내가 본 것을 말해 주었다.
“그렇군요, 식당이라……. 그럼 주군께서는 안전하신 거로군요.”
“당장은요.”
이놈들이 밥을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 들지가 문제다.
물론, 순순히 당해 줄 그레이안이 아니지만.
잠시 후 지하층에 도착해, 나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그레이안은 스스로 지킬 힘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 없어요. 문제는 이곳에 잡혀 있는 아이들이에요. 그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구출해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나는 미리 생각해둔 작전을 설명했다.
“세 분은 저와 함께 가고, 다른 두 분은 그레이안을 찾으러 가요. 길은 나비들이 안내해 줄 거예요. 그레이안과 합류하고 나면 나비들을 따라 제 쪽으로 오세요. 먼저 아이들을 구출하고 있을 테니까요. 혹시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지거든 조심하시고요.”
“……예, 공작 부인께서도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너희, 공작 부인을 잘 호위해야 한다!”
“물론이지!”
“맡겨만 주십시오.”
잘생긴 금발 기사의 당부에 다른 기사들이 듬직하게 대답했다.
작게 웃어 보인 나는 이윽고 문을 활짝 열었다. 역시나, 이질적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 서두르죠.”
“넵!”
그리하여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세 명의 기사와 함께 아이들이 갇힌 장소로 빠르게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인세구원회’의 신도 몇 명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자들을 재빨리 기절시켜야 했다.
그 역할은 의외로 나비들이 적성이었는데, 녀석들은 신도들의 눈에 빛의 가루 같은 것을 뿌려 잠들게 했다.
하여튼 생각보다 기능이 많은(?) 나비들이었다.
“도착했어요, 여기예요.”
아무튼 크게 발각당하는 일 없이 아이들이 갇힌 방까지 왔다. 문제는 문을 열 방법을 모르겠단 거였다.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잠금 장치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열쇠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때, 기사 한 명이 나에게 이르더니 근처에 쓰러져 있는 신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신도의 옷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쑥 꺼냈다.
열쇠 꾸러미였다.
“이럴 거 같았는데, 역시 지니고 있군요. 여기 있습니다, 공작 부인.”
그 기사가 뿌듯해하며 나에게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나는 설핏 웃으며 그것을 건네받았다. 칭찬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했어요, 경.”
“……! 아닙, 니다.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지요…….”
기사는 왜인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더듬더듬 대꾸했다. 칭찬에 약한 걸 보니 개 수인인가 보다. 나는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하나씩 끼워 보며 물었다.
“경은 개 수인이죠?”
“헉,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야 다 티가 나니까……. 어느 모로 보나 개 같으니까…….
“이름은 뭔가요?”
“이름을 물어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저는 카빌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카빌 경.”
“넵……!”
카빌 경 뒤로 붕붕 휘둘러지는 개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다.
어찌 됐든, 네 번째 열쇠로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기사들과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진입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아이들은 멍하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낯선 사람이 왔는데도 희미한 반응이었다.
‘역시 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기사들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몹시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나직이 이야기했다.
“이 아이들을 구출하려면 이동 마도구를 여러 번 쓰는 수밖에 없어요. 각자 세 명씩 끌어안고 이동을…….”
그때였다.
달칵―.
우리가 들어오고서 닫아 뒀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사들과 나는 긴장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는데―.
“……?”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리고 기사 두 명.
어쩐지 맥이 풀려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부인.”
그레이안은 나를 보며 자못 안도한 표정을 짓더니, 단숨에 앞으로 다가와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나는 뻣뻣이 굳고 말았다.
저, 저기요……? 공작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어, 그, 렇죠? 아무래도? 무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세계수의 나비들도 있고, 실력이 출중한 기사들도 함께이니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너무 용감하십니다, 부인.”
“…….”
“너무…… 너무나 용감하십니다. 제가 감당이 안 될 만큼.”
그레이안이 내 몸을 좀 더 힘껏 끌어안았다. 서늘한 겨울바람을, 혹은 깊은 숲속을 닮은 특유의 체향이 전해져 왔다.
무척이나 따뜻한 체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