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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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도움이 될 거예요
2022.04.16.
조카가 사라진 후로, 밀턴 부인은 걱정에 잠도 못 이룬다는 모양이었다.
밀턴 부인이 그러하니, 아이를 잃어버린 시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시녀는 오래전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냈는데, 남편을 닮은 아이를 애지중지 키워 왔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엄마 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까.’
예전부터 엘로윈 왕국의 크나큰 말썽이었던 수인 아동 납치범은, 그 단서를 잡을라 치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려 여태 잡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납치된 아이들을 되찾을 방법도 요원했다.
그래서 아이를 잃은 부모 중에는, 납치범을 잡기 위한 결사대를 꾸린 이들도 있다고 하던가…….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단순한 납치범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인신매매범이라도, 언젠가는 꼬리를 잡히기 마련.
올해만 해도, 엘로윈 왕국에 숨어든 인신매매범들을 솔즈베리를 비롯한 다수의 귀족 가문에서 잡아들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수인 아동 납치범은, 엘로윈 왕국을 오래 혼란스럽게 했음에도 작은 단서조차 찾기 어렵다고 하니…….
그 배후에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강하게 들 수밖에.
‘배후로 짐작 가는 인물은…… 으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원작에서 비롯된 거다.
원작과 현실이 100%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참고용이지만, 원작의 정보를 기반으로 유추해 본다면…….
‘……악역이, 너무 많아.’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 속 악역 목록은, 말하자면 남주 후보들의 살생부였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자잘한 악역들이 사이다 전개를 위해 남주들의 손에 썰려 나갔으니까.
‘글로리아를 포함해서 말이지…….’
하찮은 악역들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납치 사건의 배후일 만큼 영리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최종 보스가 배후라기엔, 그 녀석은…….
‘수인 아동을 납치할 이유가 없지.’
그러니 ‘악역’이 아닌 ‘악인’을 떠올려 보자.
가장 위협이 될 법한 인물. 대규모 납치 사건을 벌이고도 증거를 철저하게 은폐할 수 있는…….
그럴 만한 사람은…….
“…….”
에이, 설마.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납치 사건의 배후가 될 만한 능력은 있어도, 그럴 동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경우에는.
그러니, 일단 보류.
‘원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배후일지도 모르지. 일단은 그레이안과 얘기해 보자.’
발걸음을 서둘러 그레이안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고 선 시종이 내가 왔음을 고하자, 곧바로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시종이 문을 열자마자 나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일을 끝내고 떠나려던 참인 듯, 검을 챙겨든 그레이안이 나를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부인, 어쩐 일이십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가 허리춤에 검을 차는 것을 흘끗 곁눈질했다. 이어서 외투를 챙겨 입는 것을 보니, 과연 내 예상대로인 듯하다.
“수인 납치범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가는 거죠?”
불쑥 묻자, 멈칫한 그레이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이윽고 그는 미소가 엷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그에 대해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저도 도울게요. 함께 가죠.”
내 답이 무척 뜻밖이었던 모양인지, 그레이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을 달싹이던 그가 못내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부인께선……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셨는데…….”
“단순한 감기일 뿐이었는걸요, 뭐.”
“감기도 종류에 따라서는 위험합니다. 심하면 폐렴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따뜻하게 입고 나왔어요. 자, 봐요. 완전 무장이나 다름없죠?”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빙그르르 돌자, 도톰한 원단으로 지은 드레스 자락이 넓게 퍼졌다가 착 가라앉았다.
그레이안은 왜인지 멍하니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엷은 홍조가 떠오른 얼굴로 작게 헛기침했다.
“……?”
영문 모를 반응이었다.
곧이어 그가 말했다. 조금 수줍은 듯이.
“……잘 어울리십니다, 부인.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입만 달싹거렸다. 아니,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
“어……. 고마워요.”
여하튼 칭찬인 것 같으니 예의상 감사를 표했다. 여러모로 황당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수색에 동참하시는 것은 역시 안 됩니다, 부인.”
그레이안이 싱긋 웃으며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나는 별안간 뺨이라도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직전에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어쩌고 아부해 놓고,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다니?
“하지만, 나에겐 세계수의 나비들이 있잖아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물러서지 않고 재차 설득을 시도했다. 내 말에 그레이안은 납득이 간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나 웃으며 딱 잘라 반대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하니까요.”
“아니…….”
할 말을 잃은 난 입만 달싹거릴 따름이었다. 이 사람, 가만 보니 고집이 장난 아니게 세다! 저렇게 유들유들하게 굴면서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다니!
‘하지만 포기할 내가 아니지!’
나는 그레이안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그레이안은 놀란 듯 굳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좁혀지니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하지만 꿀릴 건 없었다. 나는 그 못지않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
“세계수의 나비들이라는 치트…… 아니, 유용한 능력이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요.”
나를 보는 그레이안의 눈빛이 멍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거절은 거절하겠어요. 자, 어서 가죠!”
앞장서 걸어가는 나를 향해, 그레이안의 시선이 따갑도록 박혀 왔다.
불만스러워하는 느낌의 시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라 해야 할까…….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내가 부담스러워지는…… 그런 종류의 시선이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되나요……? 공작 부인 곁에 얌전히 붙어 있을게요. 네? 제발요…….”
그레이안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뜻밖의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토끼가 또.’
용감한 토끼는 위대하다. 하지만 너무 용감해서 탈이다!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니까.
“안 돼.”
나는 에이프릴의 부탁을 단호하게 쳐냈다. ……여러모로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그레이안도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이었나?
‘하지만 나는 어른이고, 에이프릴은 어린이니까.’
이번 일은 에이프릴이 끼어들어서는 절대 안 될 사안이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수인 아동 납치범이잖아. 네가 표적이 될 수도 있어.”
내놓은 자식이기는 해도 어쨌든 나는 아인스턴 국왕의 딸이었다. 혹시 내가 위험해지더라도, 이 신분을 무기로 휘두를 수 있을 터.
……수인 아동 납치범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스턴의 왕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란 건 자명했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경우에는 다르다.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귀한 토끼 수인. 게다가 솔즈베리 공작의 친자가 아닌 입양아니, 걸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겠지.
한마디로, 수인 아동 납치범에게 아주 만만한 먹잇감이라는 뜻이다.
“그건…… 저도 알지만…….”
똑똑한 에이프릴은 이해가 빨랐다. 대번 얼굴색이 어두워져서는 고개를 푹 숙인다.
으윽, 왠지 미안해지려 하는데.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안 돼! 상대가 너무 위험하다고!
깊게 심호흡한 나는 에이프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에이프릴.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난 괜찮을 거야.”
그렇다. 에이프릴이 굳이 나와 함께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나를 걱정해서다.
에이프릴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컸다. 게다가 예지 능력으로 그러한 미래를 보게 되면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미래가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걱정하는 모양이고.
‘이번은 그레이안이나 내 미래가 안 보인다고 했던가…….’
미래는 어떤 기준으로 보이고, 안 보이는 걸까?
참으로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수인 아동 납치범을 잡고 나면, 로드리랑 셋이서 놀러 가는 거야. 자, 약속.”
“…….”
허리를 살짝 숙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던 에이프릴이 제 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에이프릴과 이어진 손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에이프릴은 사람일 때의 손도 조그맣고 새하얘서…… 꼭, 토끼 앞발 같았다…….
“네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게. 다녀와서 같이 저녁 먹자.”
“……네.”
조금 울먹일 듯이 대답한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머리통 위로 커다란 손이 쓱 뻗어 왔다. 손의 주인은 그레이안이었다.
그는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부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있으려무나.”
“…….”
그러자 에이프릴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쯤 포기한 듯한 기색이었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는 에이프릴의 머리를 그레이안이 두어 번 더 쓰다듬었다. 그는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못내 안쓰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로드리 경.”
에이프릴의 머리에서 천천히 손을 떨어트린 그레이안이 로드리를 넌지시 불렀다.
우리와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 서 있던 로드리는 자신이 호명받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긴장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네, 공작 각하.”
“호위 기사로서, 에이프릴을 잘 부탁하지.”
“예……!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공녀님을 지키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로드리의 대답에, 그레이안은 ‘그렇게까지 진지할 필요는 없는데…….’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로드리,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그래……. 로드리 경을 믿지. 자, 그럼…….”
다음 차례로는 그레이안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우리를 지켜보는 에이프릴과 로드리를 뒤로한 채, 그레이안과 나는 마차에 올랐다.
드디어, 본격적인 수색에 나설 시간이었다.
마차는 너무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일단은 그레이안과 내가 야유회를 나온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모양이었으므로.
그러니까, 일종의 위장인 셈이다.
“부인의 역할은,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후방 지원’입니다.”
그레이안이 다시 작전을 설명해 주었고, 나는 가만히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까요. 물론 부인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단독 행동은 삼가라, 이 말이죠? 기억하고 있어요.”
“예, 저와 동행하실 땐 괜찮습니다만, 일단은 저 혼자 미끼가 되어 수색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런저런 논의를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도심에 자리한……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
“…….”
프러포즈, 혹은 결혼기념일에 오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 우리 둘이 외출한 거니 이런 장소를 고르는 편이 그럴듯하긴 한데…….’
그레이안과 이런 곳에 오다니, 어째 좀 기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