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아프지만 행복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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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아프지만 행복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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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아프지만 행복한 때
2022.04.09.
뻣뻣이 굳어 있는 내 옷자락에 에이프릴이 뺨을 비비적거렸다. ……사람일 때의 행동도 토끼 같았다! 귀여워!
‘아니, 이게 아니고!’
이러다 감기 옮길지도 몰라! 나는 에이프릴의 어깨를 잡고 슬그머니 밀어냈다.
그러자 내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생각했는지, 에이프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랑 너무 붙어 있으면 감기 옮아, 에이프릴.”
“…….”
그제야 에이프릴의 눈에 이해의 빛이 떠올랐다. 표정을 푼 에이프릴이 내게서 살며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웃으며 손을 뻗어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감촉이 꼭 실크 같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간호는 괜찮아! 간호하다 네가 감기 옮으면 어떡해.”
“하지만…….”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을 흘끗 곁눈질했다.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공작님은 계속 여기 계실 거잖아요?”
“어…… 나를 간호해 준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그레이안을 슬쩍 보자 그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프릴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저도 여기 있을래요……. 공작 부인이 다 나으실 때까지.”
그러더니 에이프릴은 토끼로 변해 내 품에 포옥 안겨들었다.
이, 이 녀석……! 토끼 모습을 하면 내가 차마 떨쳐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이러는 거다! 계략 토끼!
“꺄앙.”
‘그렇지만 역시 너무 귀여워……!’
내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애교를 부리니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토끼를 꼬옥 껴안았다. 아, 행복해. 토끼 테라피만으로 감기가 싹 낫는 느낌이야.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가 귀걸이를 하는 날이잖아?’
통역 귀걸이에 퍼뜩 생각이 미친 나는 얼른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귀걸이를 내놓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역시 귀신같은 남자다. 눈치가 참 빠르다니까. 귀걸이를 냉큼 낚아챈 나는 서둘러 착용하고서 에이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프릴?”
“꺄웅?” (왜?)
“헤헤헤.”
토끼 말소리가 들리니 무척 즐거웠다. 나는 계속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
“점심 뭐 먹었어?”
“끼얏웅.” (고기.)
“……그렇구나.”
저녁 뭐 먹을래? 하고 물으면 또 “고기.” 하고 대답하겠지?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 준다.
“저녁 뭐 먹을래?”
“……끼우웅, 꺄앙.” (……엄마가 먹고 싶은 거.)
“……?”
잠깐, 방금 나더러 ‘엄마’라고 한 건가?
심지어 식단 선택을 나에게 양보했어?!
‘우리 토끼가 철이 들다니……!’
못내 감격한 나는 토끼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마시멜로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자주 엄마라고 불러 줘, 에이프릴.”
“끼앙.” (응.)
토끼 모습일 땐 이렇게나 적극적인데. 사람 모습일 때는 여전히 조금 낯을 가린단 말이지.
뭐, 에이프릴이 토끼 모습이 더 편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토끼를 꼭 껴안으며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곁에 있어 준 덕분에 쓸쓸하지 않았지만, 오후 네 시쯤 되자 열이 더 올라 버렸다.
“으…….”
열이 펄펄 끓으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감기가 참 지독하네…….
“끼웅…….”
토끼가 걱정스럽게 울며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통역 귀걸이는 누운 자세로 오래 하고 있기엔 불편해서 잠깐 빼둔 상태였다.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
토끼의 동그랗고 까만 눈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이런 울보 토끼……. 걱정도 많고 눈물도 많다.
고작 감기일 뿐인데 이렇게나 걱정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언제쯤 다 나을지는 예지할 수 없나 보다.
그 예지 능력이라는 게…… 에이프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현듯 떠오르는 거랬나.
“부인, 물수건을 바꿔 왔습니다.”
울먹이는 토끼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잠시 욕실에 갔던 그레이안이 대야를 들고 다가왔다.
그는 셔츠만 입은 가벼운 차림새로 내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다.
고맙긴 한데…… 역시 조금 미안하다.
“에이프릴? 잠시 옆으로 비켜 주겠니?”
“끼우웅.”
그레이안의 부탁에 에이프릴이 군말 없이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그레이안이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내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주고는, 또 다른 수건을 집어 들더니 내 목덜미에 살짝 가져다 댄다.
차가운 감촉에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걱정이로군요. 열이 이렇게나 높으니……. 수프라도 조금 드시고 해열제를 복용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일어나서 식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조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사실 입맛도 없고, 목이 아파서 음식을 삼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먹을 순 없으니까…… 뭐라도 먹는 편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사람을 시켜 식사를 가져오라 하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고 얼마 후, 시녀 두 명이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둘이 차린 식사는 아주 간단했다. 닭고기 수프에 빵 몇 조각, 에그노그와 꿀에 절인 오렌지.
‘이제는 이런 식단에도 슬슬 익숙해지려 해…….’
흰쌀죽이라든가, 참치야채죽, 단호박죽, 콩나물국, 북엇국 등등……. 나에게 익숙한 한식이 그리운 건 여전했지만.
‘아, 라면 먹고 싶어. 남은 국물에 밥도 말아서…… 크으, 맛있겠다.’
하지만 지금 저는 치킨 수프나 홀짝이고 있죠. 그래, 뭐…… 이것도 맛있긴 해. 솔즈베리 성의 요리사가 실력이 좋다니까.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은 배 안 고프려나?’
저녁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누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배고파질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에그노그를 한 모금 마시며 토끼를 힐끔 살펴보았다. 토끼는 내 옆자리에 앉아 뒷발로 귀를 긁고 있었다.
‘흐음.’
마치 ‘나는 이 음식들에 관심 없어.’ 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듯한 모양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물어보도록 할까.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 너도 뭐 좀 먹을래?”
그러자 토끼는 왜인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나를 응시하더니, 작게 코웃음 쳤다.
……뭐랄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고 항의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뭐라고 생각하긴. 귀여운 먹보 토끼라고 생각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에그노그가 담긴 잔을 토끼 앞에 슬쩍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토끼는 코를 씰룩이더니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홱 등을 돌렸다. 명백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음, 그러시군요. 우리 토끼님께선 뭔가 드실 마음이 없으시군요.’
나는 토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에그노그를 홀짝였다. 지금은 저래도 이따 저녁에는 분명 배고플 테니, 사람을 시켜 맛있는 식사를 내오라고 해야지.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서 푹 자라고 해야겠어.’
난 괜찮으니 말이다. 굳이 에이프릴이 내 곁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감기는, 뭐…… 내일이면 다 낫겠지. 단순한 감기일 뿐이잖아?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금방 다 낫지 못했다.
감기는 무려 사흘 뒤에야 내게서 뚝 떨어져 나갔다. 감기를 이렇게 오래 앓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 몸의 체력은 역시 너무 약해 빠졌어!
‘게다가 그사이에 살도 더 빠진 것 같네. 으아아, 이게 사람 팔이야, 나뭇가지야? 오늘은 기필코 고기를 먹겠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말고 “으윽.” 소리를 내며 도로 누웠다.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허리가 시큰거렸다.
‘스, 스트레칭……. 스트레칭을 해야겠다.’
다시 살금살금 일어나 허리에 좋은 스트레칭을 하던 중, 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안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위로 쭉 뻗고 있던 팔을 내리며 못내 민망해하는데, 안나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을 건넸다.
“마님, 기운 차리고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아침 식사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준비할까요?”
“음, 그래……. 그렇게 해 줘.”
“네, 알겠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다 낫자마자 배에 기름칠하면 탈이 날지도 모르지.
아침은 간단히 먹고, 점심에 에이프릴이랑 같이 고기를 먹어야겠다!
‘후후후……!’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리고 그레이안도…… 함께 먹자고 할까?
그 사람, 내가 감기에 걸린 첫날 이후로도 계속 내 곁에 있으려 해서…… 결국 보좌관 손에 붙잡혀 갔다.
일이 산더미처럼 밀린 모양이던데, 괜찮으려나…….
‘지금 보러 가면 방해만 될 테니…… 이따 점심때 만나러 가야겠어.’
식사와 목욕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추웠다. 바깥은 더 춥겠지. 나는 코트 앞섶을 여미며 걸음을 서둘렀다.
에이프릴이 기사단 본부에 있다는 정보를 막 입수한 참이었다.
‘오늘 로드리도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됐어.’
실력 평가 대회가 끝나고 나서 좀 더 챙겨 줬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로드리에게 줄 선물도 미리 준비해 뒀었는데.’
계획보다 늦어지고 말았지만, 오늘이야말로 주려고 챙겨 왔다. 별건 아니고…… 기사단복의 망토에 장식하는 브로치였다.
은색의 단순한 디자인이어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을 테니, 적절한 선물이겠지.
‘원래 이런 건 가족이 챙겨 주는 거라던데…….’
로드리에게는…… 가족이 곁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나라도 대신 챙겨 줘야지.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과 로드리는, 여전히 사이가 안 좋으려나……?’
으음, 내가 로드리에게 선물을 주면 에이프릴이 또 질투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토끼를 속상하게 만들 순 없으니, 조만간 토끼 선물도 따로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
‘아, 생각해 보니 에이프릴 생일 선물도 준비해야 하잖아?’
그럼 선물을 두 개 준비해야 하는군. 흐음, 뭐가 좋을까?
‘생일 때는 편지도 써 줘야겠다. 헤헤.’
앞발로 편지를 펼쳐들고 읽는 토끼의 모습을 상상하자,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토끼는 왜 뭘 하든 다 귀여울까? 귀여움이 세포마다 새겨져 있나 봐.’
혼자 실실 웃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기사단 본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입가에 걸려 있던 헤픈 웃음을 싹 지우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 부인의 체면을 지키겠다는 결심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지 관리 따위, 이미 망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연기고 뭐고 계속 내 원래 성격이 자꾸 튀어나와 버려서…….’
기사단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기사들이 나를 보며 흠칫흠칫 놀랐다. 저기, 제가 무슨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라도 되나요? 왜들 놀라고 난리야.
나는 기사들을 흘겨보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에이프릴은 아마 연무장에 있을 테지? 제이드와 대련하는 중인가?
‘우리 전투 토끼가 그새 또 실력이 늘었으려나…….’
에이프릴이 진짜 전투 토끼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단하신 토끼님께서 오늘은 어떤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실까. 조금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기대하며 연무장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지금은 기사들의 휴식 시간인 모양인지 연무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내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연무장 중앙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것일까?
심지어는 기사단장도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 슬그머니 선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연무장 중앙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시야로 들어온 광경에,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건…… 로드리와 에이프릴이잖아?!’
뜻밖에도, 로드리와 에이프릴이 대련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