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내 저질 체력도 다른 의미로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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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내 저질 체력도 다른 의미로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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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내 저질 체력도 다른 의미로 굉장하다
2022.04.06.
나는 로드리를 향해 살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토끼는 여전히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로드리, 너 정말 굉장하더라! 보면서 내내 감탄했잖아. 여태 훈련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따 저녁에 기사단을 위한 만찬이 열린다던데, 눈치 보지 말고 많이 먹어!”
조금 신이 난 목소리로 칭찬을 건네며 로드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로드리가 나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집사를 훔쳐보는 새끼 고양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붉은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어주자니, 작게 움찔한 로드리의 귀가 금방 새빨개졌다.
‘귀여워……!’
이런 녀석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던 적호 수인이라니, 하나도 안 믿긴다. 그냥 개냥이 같아.
“그래, 로드리. 내가 보기에도 네 실력이 제법 훌륭하더구나.”
“……!”
“무엇보다, 앞으로 더 강해질 가능성이 커 보였고.”
그레이안도 로드리를 향해 웃으며 칭찬을 건넸다. 설마 그레이안에게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몹시 당황한 듯 보이는 로드리가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조만간 정식 기사로 서임해도 되겠어. 물론, 넌 아직 배울 게 많지만. 원한다면 내가 직접 가르쳐 주마.”
“그, 여…… 영광입니다, 주군.”
고개를 꾸벅 숙인 로드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그레이안은 설핏 웃더니 로드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정정해 주었다.
“아니, 나를 ‘주군’이라 부르진 마라. ‘각하’로 충분해. 네가 주군으로 모셔야 할 상대는…… 여기, 내 딸이니까.”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내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토끼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은데. 에이프릴이 로드리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아, 그러니까…… 공녀님. 앞으로 제가…….”
우리의 눈치를 보던 로드리가 에이프릴을 향해 더듬더듬 말하는데, 도끼눈을 뜨고 로드리를 노려보던 에이프릴이 갑자기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앗……!”
그러고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토끼가 또!
‘에이프릴 녀석, 정말이지……!’
가만 보니 로드리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던데……. 이거 큰일이다. 에이프릴♡로드리가 아니라 에이프릴VS로드리가 되어버렸어!
‘둘이 친해지기 전까진 호위고 뭐고 불가능할 거 같은데…….’
에이프릴에게 외면당한 로드리가 못내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침착한 태도로 로드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에이프릴은 원래 기분을 맞춰 주기가 영 까다로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잘 얘기해 볼게.”
“……예, 공작 부인.”
애써 진정하려는 듯 보였으나, 로드리는 무척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에이프릴과는 대화도 얼마 나눠보지 않았는데 졸지에 미움을 받게 생겼으니…….
‘까다로운 토끼 같으니라고…… 이번엔 또 어디로 갔을까?’
뒷수습은 그레이안에게 맡긴 후, 나는 연무장을 빠져나와 토끼를 찾아다녔다.
여기저기 한참 찾아다닌 게 허무하게도, 토끼는 다름 아닌 내 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뾰족한 눈을 한 토끼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 녀석, 로드리도 마음에 안 들고, 로드리에게 친절한 나도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이거 여러모로 곤란한데. 나는 둘이 친하게 지내길 바랐단 말이야.
‘흑화하지 않는 로드리라면, 얼마든지 믿고 에이프릴을 맡길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호위 기사나 친구로서 말이다. 사위로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 무엇보다 에이프릴이 로드리를 연애 상대로 느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지금으로선…… 연애 상대는 개뿔, 친구도 못 될 거 같은데.’
절망적이다. 우리 토끼의 경쟁심과 질투심을 어쩌면 좋지?
나는 토끼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앉았다. 토끼는 늘 그렇듯 소파에 놓인 가장 푹신한 방석 위에서 빵을 굽고 있었다.
‘하얗고 보들보들한 빵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니, 토끼가 “캬악.” 비슷한 소리를 내며 앞니를 드러냈다. ……너, 그렇게 울 줄도 아는구나? 사실 사람 말도 할 줄 아는 거 아니야……?
‘여하튼, 건들지 말라는 뜻이로군.’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에이프릴은 마치 ‘흥.’ 하듯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나를 외면해 버렸다. 제대로 삐진 모양인데.
‘그런데 내 방에 와 있다는 말이지.’
이 녀석, 내가 제 기분을 풀어주길 바라고 시위하는 게 틀림없다. 척 보면 알지. 통역 귀걸이가 없어도 이 정도쯤이야.
나는 잠시 에이프릴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슬그머니 제안했다.
“……에이프릴, 우리 사람 모습으로 대화하지 않을래?”
“…….”
“내가 지금 통역 귀걸이가 없어서…… 아, 가져올 걸 그랬네.”
자못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던 에이프릴이 이내 한숨을 쉬고는 방석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종알거렸다. 마치 나 들으란 듯이.
“끼우웅꺗, 끼애앵.”
“……?”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토끼 울음소리만 남기고는, 에이프릴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방에서 나가 버렸다.
“……??”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아직 덜 닫힌 채 흔들리는 토끼용 출입문을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에이프릴……. 우리 대화 좀 하자니까?!
* * *
다음 날, 나는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딱히 어제 에이프릴의 방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해서가 아니었다.
에이프릴에게 거절당한 후 30분이나 문밖에서 기다리긴 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내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이 으스스하고 재채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 일로 감기에 걸린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에취!”
어제 날씨가 너무 추웠던 탓에 면역력이 떨어져서 감기에 걸린 거겠지. 하하하……. 워낙에 이 몸이 저질 체력이기도 하고.
‘젠장, 원래 내 몸은 이렇게 약하지 않았는데.’
감기? 1년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했다고! 친구들이 나에게 체력 좀 나눠달라고 했을 정도로 건강했는데 말이다…….
“그랬던 내가 이런 최약체…… 푸에취!”
아, 재채기를 대체 몇 번째 하는 건지……. 기침은 심하지 않아서 다행인데, 목이 너무 아프고 코가 자꾸만 간지럽다.
흑흑, 아프니 입맛도 없어서인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수프만 한 그릇 먹었다.
우리 토끼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누가 내 옆에 보송보송 말랑말랑한 토끼를 데려다 놓아주면 좋으련만.
‘음, 아니지. 그러다 토끼가 감기를 옮을 수도 있어.’
오늘은 아무하고도 만나지 말고, 이렇게 방 안에만 있어야겠다.
하지만 에이프릴이 내가 저를 피하는 줄로 오해하면 곤란하니까…… 간단하게 쪽지라도 써서 보내야지.
‘뭐라고 쓸까…… 으흠…….’
비적비적 걸어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펜과 종이를 꺼내 놓고 쓸 말을 고민하는데, 마침 안나와 함께 그레이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그새 그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부인, 몸은 좀 어떠십니까? 주치의 말로는 열이 있다던데요.”
쓱 뻗어온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흠칫한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그레이안의 눈동자는 사뭇 걱정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어…… 괜찮아요!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감기라고 하니까요. 하하, 네, 뭐…….”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스윽 피하자, 그레이안이 바짝 다가와서는 가까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못내 부담스러워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레이안은 얼마간 말없이 나를 살펴보더니, 왜인지 심각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부인.”
“……네?”
덩달아 긴장해 새된 목소리로 되묻는데, 생뚱맞은 답이 돌아왔다.
“얼굴이 빨갛습니다.”
“……!”
그의 두 손이 내 양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심장이 쿵쿵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열도 높은 것 같고요.”
“아, 그, 저기…….”
내가 얼굴이 빨간 건…… 당신 때문인 거 같은데!
얼굴이 뜨겁게 느껴지는 건, 얼굴에만 피가 몰려서 그런 것 같고!
“어서 침대로 가서 누우시지요. 제가 간호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잠시만요……!”
그레이안에게 등을 떠밀려 도로 침대에 눕게 됐다. 어안이 벙벙한 채 눈만 깜박이다가, 책상 위에 꺼내 둔 종이와 펜에 번뜩 생각이 끼쳤다.
‘에이프릴한테 쪽지 보내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그레이안의 손이 내 어깨를 꾹 누르는 바람에 다시 눕게 됐다.
나는 못내 황당한 기분으로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 지금 업무 봐야 하는 시각 아니야……?
“제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급한 사안은 전부 처리하고 왔으니까요.”
“아니, 그래도…….”
나 때문에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되는 거 아니야……? 미안한 마음에 입을 달싹이는데, 그레이안이 싱긋 웃고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진짜로 열이 나는 건지…… 그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괜찮으니 푹 쉬십시오. 제가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
이쯤 되니 그의 지나친 다정함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늑대…… 너무 착한 거 아닐까? 여태 사기당하지 않고 살아온 게 용하다.
‘사실 착한 것과는 별개로 손해 보고 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달빛 같은 은회색 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곱게 휘어졌다. 홀릴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듯이 불안정하게 뜀박질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
오, 꽤 오랜만에 보는 에이프릴의 사람 모습이다.
‘이번에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고 있군! 예뻐, 귀여워!’
에이프릴의 이런 모습을 자주 보고 싶은데, 거의 매일 토끼 모습을 하고 있으니 볼 기회가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실컷 봐 둬야지!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부릅뜨고 에이프릴의 모습을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섬세한 레이스로 장식한 드레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지난번에 에이프릴과 함께 카탈로그를 보며 내가 직접 골라준 드레스였다.
‘음, 역시 나야. 내가 안목 하나는 뛰어나다니까. 하하하……!’
“콜록……!”
“공작 부인……!”
기침 한 번 했을 뿐인데, 에이프릴은 사색이 되어서는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바로 옆에 있는 그레이안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말이다. 그레이안은 지금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두 손을 가슴께로 꼭 모아 쥔 에이프릴이 울먹이며 말했다.
“공작 부인, 죄송해요……. 제가…… 저 때문에…….”
“응? 아니야. 이건 그냥―.”
“폐렴에 걸리시다니……!”
“……?”
웬 폐렴?
그런 중증이 아니라 단순 감기인데요……?
“북부는 추우니까, 몸이 약하신 공작 부인은 늘 조심하셔야 하는데…… 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탓이에요. 제 방까지 찾아오신 공작 부인을 모르는 척하고…….”
“저기, 에이프릴?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공작 부인께서 다 나으실 때까지, 제가 옆에서 간호할게요……!”
그건 좋은데. 에이프릴에게 간호를 받는다니! 그렇지만 사실 정정부터 하자.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에이프릴, 나 폐렴에 걸린 거 아니야.”
“네? 하지만…….”
“그냥 감기야. 그렇죠? 그레이안.”
그레이안에게 동의를 구하자, 그가 설핏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굳어 버린 에이프릴을 보며 그레이안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얘기가 어디서 와전된 모양이로구나. 부인은 단순 감기에 걸렸을 뿐이니, 걱정은 내려놔도 된다.”
망연하게 나를 응시하던 에이프릴이 두 손을 툭 떨어트렸다. 황당해하는 건지, 안도하는 건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와중에 또 기침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아, 에이프릴에게 감기 옮기면 안 되는데.’
“정말…….”
“……?”
오도카니 서 있던 에이프릴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정말 다행이에요, 공작 부인……!”
“……!”
에이프릴이 나를 꼭 껴안았다.
가, 감기 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