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질투하는 집착 토끼2022.03.30.
그레이안은 진짜로 나를 안고 연무장까지 갔다. 심지어 연무장에 도착해서도 바로 내려주지 않아서, 기사들의 경악 어린 시선이 우리를 향해 부담스럽게 꽂혀왔다.
‘젠장……. 이게 무슨 창피야.’
우리가 서로 좋아 죽는 신혼부부 사이도 아니고……! 물론 그레이안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또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러니까, 괜히 설레지 않으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조금 두근거리는 것뿐이라면 괜찮다. 정말로 페로몬이라도 내뿜는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홀리는 것도, 참을 수 있고. 하지만 진심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이러다 나중에 나를 향한 그레이안의 관심이 식기라도 하면? 나 혼자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럼 보나 마나 마음고생 심하게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느니 미리 예방(?)하는 게 낫지! 암, 그렇고말고.
“저기, 이제 좀 내려주실래요……?”
넌지시 부탁하자, 그레이안은 여태 나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기라도 한 듯 “아.” 하고 외마디를 흘렸다. 그러고는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늘 그렇듯 그레이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섰다. 그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내가 일부러 두고 있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유지한 채, 우리는 나란히 걸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연무장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상석이었다.
“연무장이 좀 춥군요. 사람을 시켜 따뜻한 차를 내어오라 할까요?”
“네? 아니요, 그럴 필요는…….”
“감기에 걸리시는 것보다는, 따뜻한 차라도 드시며 미리 예방하는 편이 낫습니다.”
극구 사양했지만, 그레이안은 기어코 시녀를 불러 따뜻한 차를 내어오라 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 위에 둘러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다정함이 죄라면, 그레이안은 무기징역이다…….
“꺄웅~!”
그때, 어디선가 토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홱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제이드의 품에 안긴 에이프릴이 그레이안과 나에게 앞발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를 발견한 제이드도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며 꾸벅 묵례했다. ……에이프릴이 저 녀석의 품에 저렇게나 편히 안겨 있다니. 그것도 털이 보송보송 찐 귀여운 모습으로……!
‘……나도 털 찐 토끼 안아보고 싶어!’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제이드 녀석이 그새 에이프릴을 꼬신 건 아니겠지? 최근 들어 둘이 부쩍 친해진 느낌이…….
“끼양!”
그때였다. 제이드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토끼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토도돗―. 타앗!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멋지게 도약한 토끼가 내 품에 쏙 안겨들었다.
“……!”
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크게 감격한 나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달싹이며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토끼는 내 옷자락에 뺨을 부비작거리더니 “꺄아앙.” 하고 울었다. 동물 통역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왠지 애교를 부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인이 무척 좋다는군요.”
바로 옆에서 그레이안이 통역해 주었다. 그와 나는 통역 귀걸이를 날마다 번갈아 가며 사용하기로 했는데, 오늘은 그가 착용하는 날이었다. 에이프릴과 나를 번갈아 보는 그의 눈동자가 따스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토끼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 에이프릴.”
“웅꺄앙.”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꺗잉!”
토끼가 이렇게 먼저 달려와 준 데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주다니, 너무나 감동이었다. 훈훈한 가족 드라마를 찍고 있는 우리를, 한편에서 제이드가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으며 표정을 고쳤지만 말이다. 분명 노려보는 거였다, 저 녀석…….
‘부럽냐?’
―하고 입 모양으로 약을 올리려다 13세 소년을 상대로 너무 유치한 게 아닌가 싶어 관뒀다. 어찌 됐든, 에이프릴이 제이드에게 넘어간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역시 우리 토끼는 나를 가장 좋아한다! 아직 엄마가 제일 좋을 나이지, 그렇지?
“헤헤.”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헤프게 웃으며 토끼 앞발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얌전히 악수해준 토끼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뭐라고 재잘거렸다.
“꺄잉, 끼애웅?”
“…….”
뭐라는지 모르겠으므로 통역이 가능한 그레이안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는 조금 웃더니 토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통역해 주었다.
“부인이 로드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궁금해하는군요.”
“아하…….”
역시 전투광 토끼. 너도 로드리의 실력이 궁금해서 왔구나? 혹시 로드리에게 경쟁심이라도 느끼는 걸까?
“난 로드리를 네 호위 기사로 임명할 생각이었거든. 로드리가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기사로 서임된다면 말이지…….”
“…….”
“그런데, 음…….”
에이프릴의 무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호위 기사는…… 딱히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솔즈베리 가문의 공녀이니 수행원이 꼭 필요한 신분이었다. 그러니 형식적으로라도…… 호위 기사를 붙여주는 편이 좋겠지. 에이프릴이 아무리 대단한 토끼여도, 호위 기사가 있는 편이 더 안전할 테고.
‘물론 에이프릴이 외출할 때 대동하는 기사들이 이미 있기는 하지만, 오직 에이프릴에게만 충성을 바친 전속 기사라고는 볼 수 없지.’
언제 어디서든 에이프릴을 지켜줄 사람, 오직 에이프릴만을 위한 호위 기사. 제이드 녀석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저 녀석은 언젠가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분이니까. 그렇다고 다른 견습기사들 중에 고르자니…… 마음에 드는 녀석이 영 없고, 죄다 그레이안에게 충성하는 놈들이고.
‘하지만 로드리라면 다르지.’
로드리는 내가 데려왔으니까. 아직 에이프릴과 유대를 쌓기 전이지만, 둘은 성격상 제법 잘 맞을 거라고 확신한다. 적호 수인과 토끼 수인…… 비슷한 배경을 지닌 동병상련의 처지이기도 하고.
“끼애웅.”
“……?”
별안간 팔짱을 낀 토끼가 약간 불만스러운 투로 뭐라고 종알거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레이안이 통역을 해주었다.
“자신이 로드리보다 더 강하다는군요.”
“으흠?”
그건 자존심을 세운 허세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뭐, 로드리와 에이프릴이 대련을 해 봐야 알 수 있겠지.
‘그걸 지켜봐야 하는 나는 에이프릴이 다칠까 봐 심장이 떨리겠지만…….’
마침 로드리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런 로드리를 에이프릴은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어디,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가 보자.’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까다롭고, 호전적이고, 경쟁심도 있는 토끼.’
하지만 지금은 내 품에서 마구 쓰다듬 받고 있죠. 귀와 머리를 조금 거칠게 쓱쓱 쓰다듬어도, 토끼는 로드리에게 집중하느라 가만히 있기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더욱 격하게 쓰다듬는데, 토끼가 움찔하더니 나를 홱 돌아보았다. 구겨진 삼각형 눈이다.
“끄앵!”
“헷……. 미안…….”
얼른 손을 떼며 사과하자니, “키훙.” 하고 코웃음 친 토끼가 다시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끼의 까만 두 눈이 몹시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
‘마구 쓰다듬고 싶어도 참아야겠다…….’
슬프게 토끼를 응시하던 나는 이내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로드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로드리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붉은색의 두 눈동자 안에 깃든 불안을, 나는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겠지. 무슨 말로 응원해줘야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마땅한 말을 골라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만 말을 전했다.
‘결과가 어떻든, 나는 네 편이 되어줄게.’
“……!”
그러자 움찔한 로드리가 연약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 버려진 처량한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괜찮다고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져서 손이 움칫거렸다. 로드리는 얼마간 조용히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이쪽이 아닌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에, 방금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침착함이 깃든 듯했다.
‘내가 해준 말이 효과가 좋았나 본데……?’
내심 뿌듯해하는데, 나를 쏘아보는 뾰족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내 무릎 위에서 전해져 오는 이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에이프릴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려 에이프릴의 눈치를 살피자니, 토끼가 조금 화난 기색으로 뭐라고 조잘거렸다.
“끼우우웅― 끼아앙.”
“…….”
뜻은 몰라도 평소와 다른 울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통역을 바란다는 눈빛을 슬쩍 보내자, 그레이안이 조금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이 로드리를 질투하는 것 같군요.”
“끼앙!”
“그러니까, 정확히는 ‘저 녀석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라고 했습니다.”
“아하…….”
확실히 그건 질투가 담긴 질문이다. 토끼가 앞발로 그레이안의 팔뚝을 마구 때렸다. 뭔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끼애웅!”
“그, 그래. 네 말대로 하마.”
“……?”
뭐라고 한 건데……? 의아해하기도 잠시, 폴짝 뛰어오른 토끼가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왜인지 내 껌딱지가 된 토끼의 뒷발을 손으로 받쳐주는데, 토끼가 화난 듯이 소리쳤다.
“웅꺄앙!”
그 순간 갑자기 그레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뭐라고 하는 거냐니까? 왜 통역 안 해주는데?
“공작님? 에이프릴이 뭐라고 한 거죠?”
“아, 그게, 부인…….”
그레이안은 계속 웃기만 할 뿐, 토끼 말을 통역해 주지 않았다. 이쯤 되니 너무 답답해서 그를 노려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토끼가 느닷없이 내 옷자락에 뺨을 비비며 귀엽게 울었다.
“꺙.”
“……?”
마치 애교를 부리듯이.
‘뭐, 뭐야……?’
뭔데 이 상황? 당황한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부인……. 에이프릴이 통역하지 말라는군요.”
“네……? 아니, 왜…….”
그때였다. 토끼가 두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꼬오옥 붙잡았다. 그러고는 더욱 격하게 뺨을 비비적거리며 조금 사납게 우는 게 아닌가.
“캬웅.”
“……?”
……지, 집착 토끼……? 눈빛에서 집착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우리 엄마야! 하는 딸과 같은 모먼트!’
그제야 나는 집착 토끼가 왜 이러는지를 이해했다. 로드리에게 나를 빼앗길까 봐 불안한 거로구나?
‘바보 토끼…… 그럴 리가 있나. 내 딸은 우리 토끼뿐인데.’
물론 내가 로드리를 많이 신경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으로서, 보호자로서 그러는 거고. 로드리가 내 아들처럼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조카? 그리고 사위 후보?
‘원작에서처럼 에이프릴과 로드리 사이에 로맨스가 싹틀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로맨스는커녕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듯한데……. 집착 토끼의 오해를 얼른 풀어줘야 할 듯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 내 딸은 너뿐이야.”
“…….”
“진짜야. 엄마는 우리 토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러면서 꼭 끌어안아 주니, 내 품에 얌전히 안긴 토끼가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밀어내거나 성질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해가 풀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토끼의 보송보송한 털을 마음껏 쓰다듬었다. 그렇게 다시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기사단 실력 평가 대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순서는…… 로드리를 괴롭힌 바로 그 견습기사 녀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