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만 장르가 달라2022.03.26.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레이안과 나에게 말도 안 하고 위험한 짓을 계속해 왔다는 말인가……. 어쩐지 서운하기도 하고, 속상한 기분이 들어 울상을 지은 채로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이프릴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머뭇거리며 이야기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공작 부인……. 제이드가 저를 상대로 힘 조절을 잘하거든요. 하나도 위험하지 않아요.”
“그건…… 그야 그렇겠지만.”
제이드가 미쳤다고 너를 상대로 온 힘을 다하겠니……. 녀석이 알아서 강도를 조절할 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걱정하는 거지.
“에이프릴……. 강해지고 싶다는 네 뜻은 항상 진심으로 응원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걱정이 돼서 그래. 만일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속상할 거야.”
“공작 부인…….”
내 말에 에이프릴은 자못 감동한 듯이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 사이에 훈훈한 기류가 흐르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슬슬 대련 시작하죠? 저 3시에는 가 봐야 합니다, 공녀님.”
‘저 자식…….’
빤질거리는 모양새가 나와 에이프릴의 친근한 사이를 질투하는 게 틀림없었다. 보나 마나, 연애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에이프릴이 여전히 철벽을 치고 있겠지. 그 탓에 제이드 녀석은 속이 타들어 갈 테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에이프릴과 친밀한 대상은 그게 사물이어도 질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지.’
제이드의 질투는 원작에서 진짜 심했었는데. 실제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그런 낌새가 좀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아무튼, 에이프릴의 검술 실력이나 좀 보도록 할까.’
곧 에이프릴과 제이드가 각자 목검을 들고 마주 섰고, 그레이안이 10초를 세 주었다. 에이프릴의 자세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검을 휘두르게 되면 어떨지 모르지만…….
‘토끼일 땐 공격력이 0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사람일 땐 조금 다르려나?’
“……3, 2, 1, 시작!”
그레이안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이프릴과 제이드가 재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어찌나 빠른지, 내 눈에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뭐, 뭐야……? 왜 잘해? 왜 대단한 건데?!’
하찮은 에이프릴을 예상했던 나는 멘붕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캐붕이야. 우리 토끼 에이프릴은 조그맣고 하찮다고요! 휙휙 날아다니는 저건 대체 누구야……?!
‘미……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나만 장르가 달랐다. 나만 로판 빙의고, 쟤넨 무협지였다. 무림인들 사이에 낀 내공 없는 일반인 1이 된 듯한 이 기분…….
‘에이프릴이…… 진짜로 전투 토끼였다니.’
한 손으로 목검을 들고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에이프릴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나는 넋 놓고 응시할 따름이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에이프릴.”
“정말요?”
와중에 대화를 나누는 여유까지 보여주니 더더욱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이드의 칭찬에 화색이 된 에이프릴이 좀 더 호전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에이프릴의 검을 적당히 받아쳐 주고 있었는데, 확실히 경기장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묵직함이 덜했다. 에이프릴을 상대하느라 힘 조절을 하는 걸 테지. 그렇다고는 해도, 제이드와 능숙하게 검을 부딪치는 에이프릴은……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훨훨 날아다니며 싸우는 에이프릴의 모습이라니.’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에 대련은 끝이 났고, 승자는 제이드였다. 일부러 져 주지 않은 게 의외이긴 한데……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지 않으면 에이프릴이 싫어할 테니, 실력대로 결과를 낸 것이겠지.
“저…… 어땠어요?”
내 곁으로 살며시 다가온 에이프릴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충격에 빠져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응, 엄청났어……. 대단하다, 에이프릴…….”
“그럴 리가요……. 저, 제이드에 비하면 실력이 한참 부족해서…… 어떻게 해야 더 발전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해요.”
아니, 일반인인 나에 비하면 넌 완전 무림 고수야! 지금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비교 대상을 제이드로 삼으니 기준이 자꾸만 높아지는 걸 테지만……!
“……공작님이 보시기에는…… 어땠어요?”
에이프릴이 이번에는 그레이안을 향해 다소 소심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에게 물었을 때보다 훨씬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역시 얘도 내가 검술에 문외한인 걸 아는 거다. 전문가한테 물어볼 때는 더 긴장하는 거지.
“……정말로 놀랐단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네 실력이 뛰어나서.”
“……!”
“많이 연습했구나, 에이프릴.”
격려와 칭찬이 담긴 그레이안의 대답에, 에이프릴은 자못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레이안에게 그 말을 듣기만을 여태 고대해 왔던 것처럼.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었죠? 저는 공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약하지 않다고…….”
“…….”
“저도…… 강해질 수 있어요.”
에이프릴이 가슴께로 모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분홍색 두 눈은 곧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물기 어린 채 빛나고 있었다.
“그래, 넌 정말로 강한 아이로구나, 에이프릴.”
다정한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그가 에이프릴을 정말로 대견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밀턴 부인에게 말해둬야겠구나. 앞으로는 네가 수련하는 것에 일절 간섭하지 말라고.”
“저…… 정말요? 정말 그래 주실 거예요?”
“그래. 네가 가망 없는 일에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에이프릴은 무척이나 기뻐하는 기색으로 입을 달싹이더니, 별안간 두 팔을 뻗어 그레이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
깜짝 놀란 그레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프릴을 쳐다보았다. 손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허공만 더듬는 모양새가, 몹시도 당황한 듯이 보였다.
“정말 감사해요, 공작님……!”
“으음, 그래…….”
“저 정말로 열심히 할게요! 공작님처럼 훌륭한 검사가 될게요……!”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고…….”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아이에게 꼭 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작게 소리 내어 웃자니 그레이안이 나를 힐끔거리며 뺨을 옅게 붉혔다.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에이프릴? 이제 그만 놓아주는 편이…….”
“……!”
그레이안이 넌지시 말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움찔한 에이프릴이 곧바로 뻣뻣이 굳어 버렸다.
‘저 녀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충동적으로 그레이안을 꼭 껴안았던 게 틀림없었다.
“죄, 죄송해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아니, 사과할 필요는…….”
황급히 몸을 떨어트린 에이프릴을 그레이안이 달래 주려 했지만,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에이프릴은 기어코 토끼로 변해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에이프릴을, 그레이안과 나는 한참 찾아다닌 끝에 온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조그맣고 새하얀 토끼가 딸기 넝쿨 뒤에 숨어서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단 1절만이라도 놀렸다간 ‘끄앵!’ 하고 울며 또 다른 곳으로 도망쳐 버릴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토끼를 살살 달래며 꼬드겼다.
“에이프릴?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제이드에게 들었는데, 활 연습도 했다며? 활 쏘는 것도 보여주라. 너무너무 보고 싶어.”
“…….”
나를 향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던 에이프릴이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에이프릴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어서 안기라는 뜻이었다. 토끼는 마치 사람 모습일 때처럼 소심하게 거리를 좁혀 오더니, 이윽고 폴짝 뛰어 내 품에 포옥 안겨 왔다.
‘……부드럽고 보송보송해!’
그리고 말랑말랑해! 나는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는 기분으로 에이프릴을 꼭 껴안았다. 토끼가 최고야! 늘 귀엽고 짜릿해!
“끼야웅, 꺗……?” (정말 활 쏘는 거 봐 줄 거야……?)
내 품에서 고개를 쏙 내민 토끼가 소심하게 물어왔다. 아, 당연하지!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보고 싶어! 에이프릴이 활 쏘는 거!”
“꺄항!” (좋아!)
에이프릴은 신이 난 듯 귀를 마구 쫑긋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난 충동적으로 토끼 볼에 뽀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얼음처럼 굳어 버린 토끼가 이내 구겨진 삼각형 눈을 하곤 나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앞발 펀치를 날리진 않는군. 나는 실실 웃으며 토끼 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너무 귀여워. 좋아해, 에이프릴.”
“……!”
당황한 듯이 수염을 씰룩거리던 토끼가 기어코 앞발로 내 뺨을 꾸욱 눌렀다. 그만 좀 하라는 뜻인가 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토끼님 말씀에 따라 드렸다. 토끼는 살짝 뾰로통한 눈으로 나를 힐끔거리더니, 별안간 폴짝 뛰어 내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앗……?!”
“끼훙.”
곧바로 코웃음(?)을 치고는 등을 홱 돌리는 토끼. 완전 츤데레 토끼였다…….
‘하, 정말…… 너무 귀엽다니까.’
감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한편에서 그레이안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에이프릴은 활쏘기 실력마저 대단했다. 그야말로 백발백중. 10번 쏴서 전부 10점을 맞췄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양궁 천재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장르가 달라…….’
왜 다들 무림인 수준으로 엄청난 실력을 지닌 거지……? 왜 나만 일반인이지? 심지어 내 전속 시녀인 안나도 단검 정도는 다룰 줄 안다고 한다.
‘흑흑, 너무해. 나만 저질 체력에 최약체야.’
{괜찮아, 글로리아! 너한테는 우리가 있잖아!}
{맞아! 넌 원딜이야!}
“…….”
이 수상한 나비들……. 원딜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지? 그리고 내가 무슨 원딜이야! 난 딜이 아예 안 들어가는 캐릭터 아니야? 원딜이 아니라 힐러겠지!
{힐러가 얼마나 중요한데! 자신감을 가져!}
{맞아. 파티에서 힐러는 절대 빠질 수 없지.}
{근딜이든 원딜이든 힐러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너희 진짜 뭐야……. 왜 이렇게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무슨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이랑 대화하는 것 같았다. 진짜 희한한 나비들이다.
{그나저나 오늘 그거라며!}
{맞아, 그거!}
‘아……. 응, 그랬지.’
호들갑 떠는 나비들의 말을 대충 받아쳐 주며, 나는 안나의 도움을 받아 나갈 채비를 했다. 솔즈베리 영지의 수인들은 대다수가 한겨울에도 가벼운 옷차림인데, 나만…… 나만 잔뜩 껴입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넌 일개 인간에 불과하니까.}
“…….”
그걸 위로라고 해? 지금 누구 놀리냐? 아무튼 간에, 나는 준비를 마치고서 밖으로 나왔다. 나름 따뜻하게 입었는데도 너무 추워서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특히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숨 쉴 때마다 폐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아니, 진짜……. 여기 왜 이렇게 추워. 북극이냐고. 물론 북부이긴 한데…….
“……부인?”
마침 저쪽에서 북부 공작님께서 오고 계셨다. 어김없이 케이프 한 장만 달랑 걸친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좋겠다……. 체온 높아서 좋겠다!
“많이 추워 보이십니다, 부인.”
“네 진짜 너무 추워요 얼어 죽을 것 같아요.”
“……그럼, 제가…….”
“……?”
별안간 곁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그레이안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난데없이 그의 품에 폭 파묻히게 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뻣뻣이 굳어 버렸다. 뭐…… 뭐야?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따뜻하십니까?”
“……? ……??”
아니, 이런다고 따뜻……하긴 하네? 늑대 수인의 체온이 워낙 높아서인지 내 몸도 덩달아 금방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 상태로 기사 연무장까지 갈 수는 없잖아…….’
그렇다. 오늘 나의 목적지는 기사 연무장! 12월 15일인 오늘, 드디어 기사단 실력 평가 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마침내 로드리가 실력 발휘를 할 순간이 왔지.’
그간 틈틈이 로드리를 보러 갔는데, 제이드와 대련하는 모습을 보니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훗……. 그럴 줄 알았지.’
제이드 녀석도 무섭게 쫓아오는 로드리를 보며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요즈음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수련한다는 모양이다.
‘그래 봤자 그레이안에게는 쨉도 안 되는 뽀시래기들이지만…….’
흘끗 올려다보자, 마침 시선이 마주친 그레이안이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에게 ‘관심이 간다’라고 했던 말이 또다시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는 비밀이 무엇인지…… 전부 알고 싶습니다.’
‘……우……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 도망쳐야겠어. 나는 그레이안의 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그가 나를 꼭 감싸 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저기요……?
“부인, 기사 연무장까지 제가 안고 갈까요?”
네? 그가 방금 뭔 말을 한 건지 머릿속에 바로 입력이 안 됐다. 얼마쯤 지나서야 퍼뜩 깨우친 나는 못내 당황해 입을 달싹거렸다.
“아니, 그건, 체면상 조금.”
“얀센의 로베르트는 자신의 부인을 너무 아껴서 어딜 가든 안고 다닌다더군요.”
그게 누군데요.
“그래서, 저도 그럴까 합니다.”
싱긋 웃은 그레이안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비명을 지를 타이밍조차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