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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토끼의 고백 (32/144)

32화. 토끼의 고백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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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38893159.jpg‘와, 역시…….’

에이프릴의 태도가 자못 진지했기에 다소 심각한 분위기였으나, 얼빠인 나는 어김없이 감탄하고 말았다.

16550638893159.jpg‘진짜 우주 최강 예쁘다, 에이프릴……!’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반짝반짝할 수 있지? 물론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토끼 수인이지만!

16550638893159.jpg‘늘 생각하는 거지만, 머리카락이 무슨 명주실 같아.’

그냥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반지르르 윤기가 흘러서 마치 달빛 같았다. 게다가 저 보석 같은 두 눈……! 무척이나 맑고 투명해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에이프릴은 분명 나중에 엄청난 미인으로 자라지 않을까. 지금도 이렇게나 이목을 확 끄는데, 크면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 정말 너무 기대된다!

16550638893171.jpg“공작님, 공작 부인.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에이프릴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자세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역시 묘격과 인격의 차이가 크다. 물론 둘 다 귀엽지만!

16550638893171.jpg“돌아가신 제 친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여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저의 비밀에 관한 거예요.”

16550638893159.jpg“……?”

속으로 주접을 떨던 나는 ‘비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더니……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였구나.

16550638893159.jpg‘그래서 사람 모습으로 변한 거였군. 아무래도 토끼 모습으로는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으니까…….’

나도 덩달아 진지해진 채로 에이프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옆의 그레이안도 신중한 눈빛으로 에이프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깊게 심호흡하더니,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16550638893171.jpg“사실 저에게는…… 예지 능력이 있어요.”

16550638893159.jpg“예, 예지 능력……?”

나는 놀라 입을 달싹였다.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레이안도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16550638893171.jpg“처음 이 능력을 자각한 건…… 제 기억으로는 네 살 때예요.”

이야기를 이어나갈수록 에이프릴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다음 말이 들려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16550638893171.jpg“가장 처음으로 본 미래가…… 제 친어머니가 목숨을 잃는 장면이었죠.”

16550638893159.jpg“……!”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입을 굳게 다물고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굳어 있었다.

16550638893171.jpg“아니, 정확히는…… ‘여러 갈래의 미래’였어요. 한두 개가 아닌 수십 개의 미래가 보였죠…….”

그리고 에이프릴은 자신의 예지 능력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확정된’ 하나의 미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택에 따른 수십 개의 결과, 즉 평행세계가 전부 보인다는 것이었다.

16550638893159.jpg‘그럴 수가……. 그거 너무…….’

정신적으로 힘든 능력 아니야……?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에이프릴은 아직 열두 살이었다. 성인이 되려면 한참 걸릴 나이. 게다가 처음으로 능력을 자각한 게, 불과 네 살 때라니……. 그동안 에이프릴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6550638893171.jpg“……예지 능력과 제가 본 것들에 대해 말하자, 제 친어머니는 제 말을 믿어 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와 상의해 가장 안전한 도주로를 선택했죠. 하지만…….”

16550638893159.jpg“…….”

16550638893171.jpg“끝내, 운명을 바꿀 순 없었어요.”

16550638893159.jpg“…….”

16550638893171.jpg“제가 본 모든 미래에서…… 엄마는…….”

에이프릴의 눈가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덩달아 내 눈도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에이프릴이 울 때면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꼭 내 마음이 에이프릴의 마음인 것처럼.

16550638893171.jpg“제 친아버지에게는…… 이 능력에 관해 말하지 못했어요.”

16550638893159.jpg“…….”

16550638893171.jpg“이런 능력이 있는데도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저를 더욱더 미워하실 것만 같아서.”

16550638893159.jpg“…….”

16550638893171.jpg“그리고 여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어요. 제 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까 봐…… 너무 무서웠거든요.”

말을 마친 에이프릴이 손등으로 눈가를 쓱 닦았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였다. 에이프릴은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를 의연함과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16550638893171.jpg“저는 그때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내가 슬그머니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 에이프릴이 그걸로 눈가를 닦아냈다. 이어진 에이프릴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해서,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해낸 듯이 느껴졌다.

16550638893171.jpg“그래서…… 무술을 훈련했던 거예요.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16550638893159.jpg“…….”

16550638893171.jpg“사실 저도 알아요. 토끼 수인은 다른 수인들에 비해 한참 약하다는 거…….”

그리 말하는 에이프릴은 다소 억울한 기색이었다. 그러면서 그레이안을 슬쩍 힐끔거리는 것이, ‘나도 늑대 수인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16550638893171.jpg“그렇지만 정말로 강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요. 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16550638893159.jpg“……응, 그래. 할 수 있어, 에이프릴. 내가 응원할게. 저번에 보니까 지하의 늑대들도 너를 무서워하던걸?”

애써 위로하는 날 보며 에이프릴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에이프릴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나는 날 향한 신뢰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16550638893159.jpg“……생각해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좀 의아했지. 내 악명을 너도 익히 알 텐데, 나에게 친밀하게 다가와 줬으니까.”

16550638893171.jpg“…….”

16550638893159.jpg“그리고 내가 에반젤린의 가든 파티에 가겠다고 하자 말리려 들었지. 그보다 전에는, 주점에서 나와 꼭 붙어 있으려 했고.”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린 듯, 에이프릴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16550638893159.jpg“……그게 다, 네 예지 능력 때문이었지?”

16550638893171.jpg“네, 맞아요…….”

16550638893159.jpg“주점에서나, 가든 파티 날에는 내가 잘못되는 미래를 봤던 거야? 그래서 겁먹었던 거니……?”

16550638893171.jpg“…….”

에이프릴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제야 나는 ‘누군가 잘못되는 미래’를 보는 것이, 에이프릴의 트라우마를 크게 자극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에이프릴의 마음을 잘 챙겨주지 못했으니 몹시 후회가 되었다.

16550638893159.jpg“……미안해, 에이프릴…….”

16550638893171.jpg“아, 아니에요. 사과받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니까…….”

진심으로 반성하며 말하자니 에이프릴이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만류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안도 에이프릴을 응시하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16550638949017.jpg“……내가 네 양부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구나. 미안하다, 에이프릴.”

16550638893171.jpg“아니요, 전 정말로…….”

에이프릴은 한동안 쩔쩔매다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그런 에이프릴의 어깨를 그레이안이 자상한 표정을 지은 채 토닥여 주었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머릿속에 막 떠오른 생각을 말로 꺼냈다.

16550638893159.jpg“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내가 너의 새엄마가 되리라는 걸 미리 알았던 거였구나.”

그래서 에이프릴은 처음부터 나를 친근하게 대해 준 것이리라. 하지만…… 의아한 점도 있었다. 에이프릴이 여러 갈래의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내가 아니라 ‘글로리아’가 새엄마가 된 미래도 보지 않았을까?

16550638893159.jpg‘그 미래에서 글로리아는 에이프릴에게 분명 막 대했을 테고.’

그렇지만 에이프릴은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지닌 듯이 보였지. 만일 내가 아닌 글로리아가 새엄마가 된 미래를 보았더라면, 마냥 호감만 갖기란 어려웠을 텐데.

16550638893159.jpg‘희한하네.’

의문을 곱씹던 나는 결국 에이프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16550638893159.jpg“에이프릴,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네가 나에 대해 본 미래는 어떤 것들이었어? 괜찮으니 전부 말해도 돼.”

16550638893171.jpg“아, 그건…….”

그러자 에이프릴은 뺨을 살짝 붉히더니, 못내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게 아닌가.

16550638893159.jpg“……?”

뭔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라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듣게 되더라도 받아들일 각오였는데……?

16550638893171.jpg“제가 본 모든 미래에서, 공작 부인은…… 제게 무척이나 잘해 주셨어요.”

16550638893159.jpg“어…… 그랬어?”

16550638893171.jpg“네……. 그래서 저는 공작 부인을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었어요.”

16550638893159.jpg“그랬구나…….”

덤덤하게 대꾸했지만 내심 혼란스러웠다. ‘모든 미래’에서, ‘에이프릴의 새엄마’가 마냥 상냥하기만 했다는 말인가……?

16550638893159.jpg‘그럴 수가…… 있나? 내가 아닌 글로리아가 새엄마가 된 미래가 하나도 없다고……? 이상한데. 뭔가 이상하잖아? 왜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상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이쯤 되니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에서 이탈된 글로리아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16550638893159.jpg‘도대체 뭐가 뭔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일단은 침착하려 노력하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지금은 에이프릴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신중히 말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16550638893159.jpg“나도…… 널 만나게 돼서 정말 기뻐.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16550638893171.jpg“…….”

내 말에 에이프릴은 눈을 마구 깜박이며 얼굴을 좀 더 선명하게 붉혔다. 기뻐하는 게 틀림없는 반응이었다.

16550638893159.jpg“그리고 네 비밀에 대해서도 이렇게 털어놔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땐 언제든 말해 줬으면 좋겠어.”

16550638893171.jpg“……네, 공작 부인.”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작은 소리로 대답한 에이프릴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김없이 심장을 폭격하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또다시 자제력을 잃을 뻔했지만, 나는 애써 진정하며 이번에는 살짝 단호하게 말했다.

16550638893159.jpg“그리고, 이왕이면 엄마라고 불러줄래?”

16550638893171.jpg“……!”

16550638893159.jpg“네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16550638893171.jpg“그, 그건…….”

에이프릴은 손을 더욱 격하게 꼼지락거리더니, 급기야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16550638893171.jpg“노력해 볼게요……!”

16550638893159.jpg“응, 좋아.”

16550638893171.jpg“……!”

두 팔을 뻗어 꼭 껴안자, 에이프릴은 고장이라도 난 듯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팔을 살짝 푼 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어쩐지, 마음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 같다. 따뜻하고 포근한 온기가 몸의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간다. 에이프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어서, 진심으로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 * * 그레이안과 나에게 비밀을 밝힌 이후로, 에이프릴은 전보다 훨씬 밝고 씩씩해졌다. 에이프릴의 마음을 무겁게 하던 것이 하나 해소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심지어 에이프릴은 우리에게 자신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제안해 왔다! 사람 모습일 때 에이프릴이 어떻게 수련하는지 몹시 궁금했던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그레이안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에이프릴의 수련을 보러 왔다. 해가 높이 떠오른 오후 두 시쯤이었다. 에이프릴은 평소에 귀여운 느낌의 원피스를 입곤 했는데, 오늘은 편한 튜닉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팔과 발목에 보호대를 차고 있어서인지 정말로 검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에이프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나는 어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가를 불러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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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38893171.jpg“오늘은…… 제이드와 제가 대련을 할 거예요.”

16550638893159.jpg“대…… 대련?!”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끽해야 검이나 몇 번 휘두르는 걸 보여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옆의 그레이안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에이프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에이프릴이 대련 같은 것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16550638949017.jpg“대련은…… 위험하지 않겠니? 네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그레이안이 자못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만류했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인지라 고개를 격하게 끄덕여 보였지만, 에이프릴은 살짝 미소마저 머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목검을 들어 올렸다.

16550638893171.jpg“괜찮아요. 전에도 제이드와 몇 번 대련을 해봤었거든요.”

16550638893159.jpg“……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도 몇 번 대련을 해봤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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