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귀여움이 최강이야2022.03.19.
어째 이럴 거 같더라. 고기 먹고 싶다는 얘기를 안 하면 육식 토끼가 아니지. 짐짓 이마를 짚은 나는 한숨을 섞어 이야기했다.
“아니, 고기는…… 하……. 그래, 그럼 닭고기 어때? 닭고기 수프로 타협하자.”
“꺗잉!” (싫어!)
“…….”
이 토끼……. 이렇게나 스테이크에 진심이라니. 스테이크 미식가 토끼였다.
“……그럼 닭가슴살 스테이크.”
“꺙.” (싫어.)
“연어 스테이크.”
“꺄잉잇!” (싫다구!)
“두부 스테이크.”
“꺄웅?” (그게 뭐야?)
……맞다, 이 세계에는 두부가 없지. 막 던지다가 깜박하고 말았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나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혀가 꼬여서 잘못 말했어. 돼지 목살 스테이크는 어때?”
“끼앙.” (소고기.)
“…….”
이제부터 이 토끼를 소고기 스테이크 빌런으로 불러야겠다. 육식 빌런 토끼.
‘……근데 이 녀석, 계속 반말을 하잖아?’
설마 토끼일 땐 반말, 사람일 땐 존대를 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토끼일 땐 반말 캐릭터가 되고 사람일 땐 존대 캐릭터가 되는 거냐고.’
무슨 그런 이중인격 같은! ……아니지, 1명의 인격과 1마리의 묘격(?)이 공존하는 건가? 사람일 때 에이프릴은 예의 바르고 소심한 느낌이라면, 토끼일 때 에이프릴은 공격적이고 막무가내라는 느낌이 강했다. ……어느 모습이 진짜 에이프릴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에이프릴의 사람 모습은 대외적인 이미지…… 라는 느낌이고, 토끼 모습이야말로 진짜 성격인 것 같았다. 전투광에 육식파, 그리고 폭군인 토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휴, 그래. 내가 졌다. 폭군 토끼님, 금방 스테이크를 대령하도록 하겠나이다. 하지만 샐러드도 같이 드시옵소서. 너무 많이 먹진 말고.”
연극을 하듯 꾸벅 허리를 숙이자, 토끼가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렀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방금 그 울음소리는 제대로 번역이 안 되네? 왜지……?’
사람 말로 치자면 ‘하하하.’ 같은 거라서 그런가? 뜻이 없는 단순한 소리는 번역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제 주방에 사람을 보내서 에이프릴이 먹을 식사를…….’
“부인…….”
그때였다. 그레이안이 어쩐지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뭔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니, 그가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망울을 하고선 말했다.
“그 귀걸이, 저도 좀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이 사람……. 내가 에이프릴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줄곧 부러웠구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귀걸이를 뺀 다음 그레이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빠르게 화색이 된 그레이안은 곧바로 귀걸이를 착용하더니,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에이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프릴, 열을 좀 재 봐도 될까?”
“끼웅.”
“……아직 미열이 있구나. 바깥에서 찬바람을 너무 쐰 모양이야. 당분간 외출은 자제하도록 하렴.”
“끼야앙~.”
……이쯤 되니 번역기가 없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것 같다. 방금 저 소리는 ‘싫은데~.’와 같은 의미일 것이 분명하다. 역시 건방진 토끼……. 하지만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엽기 때문에 뭐든 다 용서가 되었다. 역시 귀여움이 최강이다. 잠시 후,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여전히 대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네 생일이로구나. 뭐 갖고 싶은 거 있니?”
“끼앙!”
“……그건, 사람 모습일 때 사용할 생각이지?”
에이프릴이 도대체 뭘 갖고 싶다고 했기에 그레이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식사를 다 차린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나는 토끼와 늑대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 물었다.
“에이프릴이 뭘 갖고 싶다고 한 거예요?”
“……검을 갖고 싶다는군요.”
“네……? 검이요?”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은 아직 목검 수련만 하고 있던가? 에이프릴이 검술 수련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 제이드를 통해 듣기만 했을 뿐. 에이프릴이 자신이 사람일 때 수련하는 모습을 그레이안과 내게 숨기려 하니 볼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고 몰래 훔쳐보자니 양심에 찔리고……. 에이프릴도 싫어할 테고.
“가벼운 검이 좋을 것 같은데…… 내구성은 조금 약하겠지만.”
“꺄우웅꺗.”
“음, 그래도 장식이 조금 들어간 게 좋지 않으려나? 그 편이 너에게 더 잘 어울릴 거란다.”
“꺄웅!”
“그래, 내가 잘 골라주마.”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토끼의 머리를 큰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토끼 머리가 폭 파묻힐 지경이라 조금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둘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식사 시간이에요. 에이프릴? 와서 밥 먹자.”
“네, 부인.”
“끼양!”
말을 마치기 무섭게, 에이프릴이 폴짝폴짝 뛰어 이쪽으로 달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에이프릴을 덥석 붙잡아 직접 테이블 위로 올려 주었다. 몸살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마구 뛰어다니다가 탈이 날까 봐 염려스러웠다.
“끄애웅.”
나를 보며 뭐라고 웅얼댄 에이프릴이 약간 한숨을 쉬는 듯했다. ……확실히, 번역기가 있는 편이 훨씬 좋기는 하다. 곧 그레이안도 테이블 의자에 착석했고, 제법 단란한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육식 토끼는 가장 먼저 스테이크부터 집어 들었다. 잘도 먹는다. 하얀 털에 소스와 피를 다 묻히면서…….
‘……또 목욕해야겠구만.’
흐린 눈빛으로 토끼를 응시하던 나는 토끼가 이쪽을 돌아본 순간, 아닌 척 수프를 휘적거렸다. 클램 차우더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비교적 평화롭게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이후로는 지옥이 펼쳐졌다. 양치를 거부하는 토끼와 그런 토끼를 어떻게든 양치시키려는 나……. ……를 지켜보는 그레이안…….
‘이건 아마도 전쟁 같은…… 이게 아니라, 아이고, 허리야.’
주먹을 쥐고 허리를 두드리는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그레이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넌지시 이야기했다.
“부인은…… 정말 몸이 약하시군요.”
“…….”
댁들이 너무 강한 건데요. 물론 글로리아의 체력이 평균 이하이긴 하지만! 한국의 수험생들과 직장인들도 글로리아와 비슷한 체력일 것이다. 원래 내 몸은 수험생일 때나 대학생일 때나 체력이 좋았지만…….
‘진짜 근력 운동을 좀 해야지……. 이러다 허리 나가겠어.’
속으로 투덜대는데, 이번에는 에이프릴 쪽으로 슬며시 다가간 그레이안이 토끼에게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프릴, 양치 다 하고 나면 네 소원 하나 들어주마.”
……저건 내가 썼던 수법인데. 과연 두 번 이상 통할 것인가?
“…….”
토끼는 고민하듯 앞발로 턱을 짚더니, 이내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통한 모양이었다! ……는, 잠깐만, 저 녀석 일부러 반항하는 거 아니야? 양치할 때마다 소원권 하나씩 얻으려고!
‘저 토끼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소원권을 얻자마자 얌전해진 토끼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양치를 끝마쳤다. 나는 약간의 허무함마저 느끼면서 토끼를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마른 수건으로 몸의 털을 보송보송하게 다 말린 토끼가 뒷발로 귀를 박박 긁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쓱 피하는 게,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에이프릴 이 녀석……. 그레이안에게 무슨 소원을 들어달라고 할지 어디 두고 보겠어.’
토끼는 내 눈길을 모르는 체하며 계속 딴청을 피우더니, 화장대 의자를 벗어나 소파로 폴짝폴짝 향했다. 소파 위, 보드라운 양털로 만든 쿠션에 착 자리를 잡고 앉은 토끼가 빵 굽는 자세를 하고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자는 척까지 하려는 모양이었다. 수상한 흑막 토끼……. 그런 토끼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간 그레이안이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옆자리의 토끼를 살살 쓰다듬었다. 토끼는 그 손길이 기분 좋은 듯, 눈을 편하게 감은 채로 얌전히 있었다. 그레이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열이 떨어졌구나. 다행이야.”
“끼웅.”
“그래도 다 낫기까진 조심하렴. 오늘은 더 이상 바깥에 나가지 말고 취침 시간까지 방 안에서 푹 쉬도록 하자.”
“끄앵.”
그 대화가 끝난 후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레이안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클로에의 묘지에는 아침에 다녀왔지? 비석 앞에 꽃이 놓여 있더구나.”
“…….”
살짝 눈을 뜬 토끼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토끼의 눈빛에는 분명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끄애웅.”
“클로에는 너를 자랑스러워할 거란다, 에이프릴.”
“…….”
“난 너처럼 용감하고 선한 마음을 지닌 아이는 본 적이 없어. 너는 이미 있는 그대로 훌륭한 사람이란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
울보 토끼의 눈에 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목욕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나는 토끼의 곁으로 잽싸게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말렴, 에이프릴.”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에이프릴의 눈물은 그치지 않아서, 손수건이 점점 축축하게 젖어갔다.
“에이프릴…….”
계속 우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부르자, 에이프릴은 나를 돌아보더니 이내 눈을 꾹 감고 눈물을 털어냈다.
“끼애웅.”
“으응, 이제 안 울 거지? 울다가 또 열나면 어떡해……. 울지 마.”
“꺄잉잇.”
“그래, 그래. 울지 말고 간식 먹자. 지난번에 딸기를 다시 잔뜩 열리게 했거든. 그래서 주방장이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 준댔어. 맛있겠지? 곧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끼앙.”
토끼의 표정을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에이프릴이 살짝 미소를 지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프릴이 울음을 그쳐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토끼의 보송보송한 털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까만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토끼는 아까보단 비교적 편안해 보였다. 여전히, 조금은 슬픈 눈빛이었지만. * * * 솔즈베리 공작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 솔즈베리 가문의 묘지. 이곳에는 클로에 모르토의 무덤이 있었다. 원래는 솔즈베리 가문의 일원만 묻힐 수 있는 묘지이지만, 클로에가 에이프릴의 생모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무덤을 만들어준 듯했다. 아마 에이프릴의 마음을 위해서…… 그레이안이 신경 써준 것이겠지. 듣자하니 클로에의 시신을 되찾아온 것도 그레이안이라고 했다. 워낙에 화제에 올리기 힘든 이야기라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그레이안이 되찾아오지 않았더라면, 클로에의 시신은 아인스턴 왕국인들의 손에 불태워졌을 거라고…….
‘정말 그렇게 되었더라면, 에이프릴은 더 큰 상처를 입었겠지.’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비석 앞에 꽃을 놓았다. 비석에는 ‘클로에 모르토’라는 이름과 그녀가 살다 간 세월이 적혀 있었다.
‘……부디 편히 쉬고 있기를 바랄게요.’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나는 클로에 모르토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걸 듯이 이야기했다.
‘내가 진짜 글로리아가 아니라는 거……. 당신은 알고 있겠죠? 영혼이 되면 뭐든 다 알 수 있을 테니까.’
사실은 혼잣말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혹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어쩌다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는 몰라도, 에이프릴이 나를 진심으로 믿고 따라주니까…… 나도 에이프릴을 잘 보살펴줄 거예요.’
내가 이 세계에 있을 이유. 그 절반은 에이프릴이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 역시 에이프릴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윽고 나는 느직이 눈을 떴다. 온실에서 가져온 하얀 꽃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놓여 있는 꽃은 노란 수선화였다. 아침에 에이프릴이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그 꽃은 저녁이 된 지금까지도 싱그러웠다.
‘다음엔 에이프릴과 함께 올게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 * * 클로에 모르토의 기일이 지나고 이틀 후. 그레이안과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부른 토끼가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끼애웅.” (할 말이 있어.)
“할 말이 있대요.”
귀걸이를 착용한 내가 옆에서 통역해 주자, 그레이안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끼웅꺗…….” (일단은…….)
토끼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심호흡하는 것 같더니, 이내 앞발을 하나로 모으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토끼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에이프릴의 사람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