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드디어 대화가 통한다2022.03.16.
한참을 울다 지쳤는지 에이프릴은 내 품에서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토끼의 작은 몸이 평소보다 따끈따끈한 것으로 보아 약간의 미열이 있는 듯했다. 이러다 몸살로 발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독감에 걸린 거면 더 큰일이고.
‘서둘러 돌아가야겠어.’
나는 그레이안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얼른 성으로 돌아가요. 에이프릴이 열이 있는 것 같아요.”
“예? 심합니까?”
“많이 높진 않은데…….”
그레이안도 놀라 에이프릴의 몸에 손을 대 보고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체온이 높은 늑대 수인인 그가 느끼기에도 에이프릴의 몸이 뜨거운 것이리라.
“……확실히 열이 있군요. 서둘러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어서 가요.”
그레이안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나는, 토끼가 더는 찬바람을 맞지 않도록 망토 자락으로 꼼꼼히 감싸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후, 숲의 초입에 도착해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레이안의 품에 안기다시피해 솔즈베리 성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다. 워낙 서둘러서인지 솔즈베리 성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후다닥 말에서 내려 그레이안과 조금 떨어져 섰다. 토끼는 내 품 안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공작님, 공작 부인!”
그때, 밀턴 부인과 시녀 두엇, 그리고 집사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그레이안이 재빨리 그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 역시 내 품 안의 토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에이프릴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밀턴 부인 외 3인이 달려오던 것을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
“숲속 샘터에 혼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겨우 설득해서 데려왔어. 내 부인의 활약이 컸지.”
그들을 향해 점잖게 이야기한 그레이안이 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신뢰 가득한 시선 때문인지 기분이 묘해진 나는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한편에선 밀턴 부인과 집사, 그리고 시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녀님께서, 공작 부인을 정말 잘 따르시네요…….”
“이 시기의 공녀님은 공작 각하께서도 설득하기 어려워하시는데…….”
……이쯤 되니 나를 향한 의심이 아닌 ‘의문’이 그들의 마음에 싹트는 것이 눈빛이나 표정으로 엿보였다. 잘은 몰라도 부정적인 종류의 의문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대상의 새로운 점을 발견하곤 놀라워하는 듯한…… 그런 느낌의 의문이었다.
“공작님, 공작 부인……!”
마침 저 멀리서 제이드도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은 그레이안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내 품 안에 안겨 잠든 에이프릴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역시 검사라서 그런가, 오감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에이프릴 공녀님은…… 찾으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크게 한숨을 쉰 제이드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숨을 헐떡거렸다. 저 녀석도 여태 에이프릴을 찾아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꽤 고생한 듯이 보이는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저 녀석……. 정말로 에이프릴을 좋아하나 본데.’
나는 제이드를 의심하며 늘 경계했는데…….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른다. 저 녀석에 관해서도 편견을 지닌 채 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노력해야겠지. 나는 제이드를 향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을 찾아다니느라 고생 많았어, 제이드.”
“……?”
내 입에서 답지 않은 소리가 나와서인지 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뭐 잘못 먹었나……?’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건방진 녀석이긴 한데.’
고생했으니 상냥하게 대해 주도록 하자. 나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프릴은 내가 잘 보살필 테니 염려하지 말고, 너도 가서 쉬렴. 에이프릴이 깨어나면 네가 걱정 많이 했다고 전해줄게.”
“아……. 감사합니다……?”
얼떨떨하게 대답한 제이드가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주머니에서 귀걸이 한 짝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제이드가 늘 착용하고 다니는 ‘동물 번역기(?)’와 똑같은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원래 한 쌍인데, 제가 한 짝만 하고 다녔던 거예요. 다른 한 짝은…… 공작 부인께 드릴게요.”
“……나한테?”
“네. 필요하실 것 같아서.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이드를 쳐다보는데, 녀석이 왜인지 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겪어 보니, 글로리아 님도 나쁜 사람만은 아니신 거 같더라고요.”
“…….”
“사실 처음 만났을 때는, 글로리아 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거든요.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뭣이라? 절로 황당해진 나는 작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제이드는 그런 나를 힐끔거리며 머쓱한 기색으로 뒷덜미를 쓸어내리더니,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에이프릴이 사람 모습보다 토끼 모습으로 지내는 걸 더 좋아하는 거 같으니까요, 글로리아 님에게 그 귀걸이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 고마워.”
설마하니 제이드가 나를 이런 식으로 신경 써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귀걸이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제이드를 일별한 나는, 그레이안과 함께 서둘러 에이프릴의 방으로 향했다. 열이 나는 에이프릴을 어서 주치의에게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착한 에이프릴의 방. 나는 일단 토끼를 침대에 눕히고 에이프릴이 곤히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쳤다. 그러는 사이에 그레이안이 주치의를 불렀고,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주치의가 에이프릴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빛이 차단된 방 안은 다소 어두컴컴했다. 주치의는 에이프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윽고 두 손을 모으며 슬며시 물러나 섰다.
“그래, 에이프릴은 좀 어떻지?”
그레이안이 묻자, 다소 심각한 얼굴을 한 주치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열이 높습니다. 감기는 아니고 몸살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주의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절대 무리하시게 하면 안 되고 푹 쉬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렇군……. 알겠네. 이만 나가 봐.”
“예, 공작님.”
꾸벅 묵례한 주치의가 곧 방을 나갔다. 다시 고요해진 방 안에서 그레이안과 나는 잠든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고 새하얀 토끼는 세상모르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에이프릴…….”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린 그레이안이 손을 뻗어 토끼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저는 에이프릴이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인데…… 부인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피곤하시면 방으로 돌아가 쉬셔도 됩니다.”
한동안 에이프릴을 응시하던 그레이안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귀여운 방 안을 쓱 둘러본 나는, 이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저도 에이프릴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에이프릴의 방도 좀 구경하면서…….”
그렇게 해서 그레이안과 나는 에이프릴의 침대 근처에 의자를 두고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와 딱히 할 말이 없어질 때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프릴의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에이프릴의 방을 이렇게 느긋하게 구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에이프릴은 언제나 폭풍 같은 토끼였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이 몸살로 앓아누운 탓에 조용하니까 기분이 영 이상하네…….’
늘 나를 놀라게 하거나 웃게 했던 토끼가 내 인생에 얼마나 깊게 들어와 있는지를, 이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정말 소중한 아이야, 에이프릴은.’
아주 당연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누구든 타인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이 세상에 정말로 혼자인 사람은 없다. 좋든 싫든, 우리는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나에게, 에이프릴은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와 주었다. 내가 이 세계에 생각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에이프릴과의 교감 덕분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더욱더 에이프릴에게 잘해 줘야지. 에이프릴이 좋아하는 딸기도 잔뜩 열리게 해주고, 스테이크도 많이 먹게 해주고, 또…….’
에이프릴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끝도 없이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레이안은 여전히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두 시간도 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을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역시 코어 근육이 남다른 것일까……. 조금 부러워지려 한다.
“끼웅…….”
“……!”
그때, 토끼가 불편한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재빨리 침대 곁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토끼의 분홍색 코와 기다란 수염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끼웅우…….”
눈꺼풀을 파르르 떨던 토끼가 이내 반짝 눈을 떴다. 검정콩알 같은 두 눈이 마구 깜박거리며 그레이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토끼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이내 입을 달싹이며 물었다.
“에, 에이프릴, 잘 잤니? 몸은 좀 어때? 아직 미열이 있긴 한데…….”
“꺄잉잇.”
“……?”
토끼는 몸을 굴려 배를 보이더니, 홀쭉 들어간 배를 앞발로 쓱쓱 문질렀다.
“…….”
어느 모로 봐도 배고프다는 뜻이었다.
‘역시 먹보 토끼…….’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왜 깨어나자마자 배고프다고 하는지 알 것 같긴 했다. 그레이안과 내가 저를 걱정할까 봐, 여느 때처럼 식성 좋은 척하는 것이겠지. 정말 너무 착하고 사려 깊은 토끼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아플 때는, 얼마든지 아프다고 해도 되는데. 나는 애틋한 표정으로 에이프릴을 응시하며 토끼의 배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에이프릴, 그래, 배고프구나.”
“꺄웅.”
내 말에 에이프릴이 긍정하듯 울었다. 나는 손을 좀 더 위로 옮겨 토끼의 목덜미와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그러자 토끼가 기분 좋은 듯이 뒹굴었다.
“스테이크가 먹고 싶겠지만, 몸살기가 있어서 과식하면 안 좋아. 대신 에이프릴이 먹고 싶은 음식으로 최대한 맞춰 줄게. 뭐 먹고 싶어?”
“끼얏웅.”
“…….”
뭐라는지 모르겠으니 제이드가 준 귀걸이를 착용해 보도록 하자. 나는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꺼내 들었다. 귀걸이는 전체 순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특징 없이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드디어 나도 토끼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다니…….’
왠지 모르게 감격하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근데 이거, 생각해 보니까 제이드랑 커플 귀걸이잖아.
‘어째 기분이 좀……. 사위와 장모님의 커플템…… 뭐 그런 거 같다고…… 효도 아이템…….’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어차피 제이드도 별 상관없어하는 것 같고. 귓불에 달린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에이프릴에게 재차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에이프릴?”
“끼얏웅!” (고기!)
“……!”
토끼 울음소리가 사람 말로 자동 번역되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매, 매우 놀랍고 신기해……!
‘그나저나 또 고기라니!’
과식하면 안 된다니까? 나는 에이프릴에게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고기는 안 돼. 체할 수도 있으니까.”
“……! ……??”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토끼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마구 갸웃거렸다. 미친 귀여움이었다……!
‘아 너무 귀여워! 사랑스러워!’
토끼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자제하며 말을 이었다.
“이거 보이지? 제이드가 준 귀걸이야. 덕분에 나도 이제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됐어.”
귓불에 달린 귀걸이를 검지 끝으로 톡톡 치며 보여주자니, 토끼가 이제 알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무척 신이 난 것처럼 술술 조잘대는 게 아닌가.
“꺄웅, 웅꺄웃, 끼양.” (야채는 싫어. 고기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