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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혼자가 아니야 (29/144)

29화. 혼자가 아니야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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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 도착한 그레이안과 나는 입구에 말을 세워두고 빠르게 안으로 진입했다. 침엽수가 빼곡 들어찬 숲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자못 아름다우면서도 매우 위험해 보였다. 멧돼지나 곰 같은 야생 동물이 살 것만 같은 이런 장소에 혼자 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겁도 없는 토끼였다.

16550638413067.jpg“일단 이 근처에는 위험한 동물이 서식하지 않습니다. 숲의 중심부로 들어가면 멧돼지나 곰이 나오긴 하지만요.”

16550638413072.jpg“에이프릴이 좋아한다는 그 장소는 이 근처에 있나요?”

16550638413067.jpg“예, 숲의 중심부는 아니니 안전할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라는 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정말 걱정돼서 미치겠다, 에이프릴. 친모의 기일에 크게 상심한 토끼를 혼낼 수도 없을 노릇이고…….

16550638413067.jpg“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는…… 에이프릴의 친모가 어쩌다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시겠군요.”

16550638413072.jpg“아, 네. 자세히는 들은 적 없어요.”

사실 원작을 읽어서 이미 알고 있지만…… 원작의 내용과 실제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 기회에 자세히 들어두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나는 그레이안이 어서 말해 주길 기다리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6550638413067.jpg“조금 장황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일의 원인부터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이프릴이 네 살이었던 무렵 벌어졌던 토끼 수인들의 반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16550638413072.jpg“아…… 네, 저도 아는 사건이에요.”

토끼 수인들의 반란. 원작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 내용이었고, 글로리아의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오래전, 아인스턴 왕국에는 많은 토끼 수인이 살고 있었다. 물론 엘로윈 왕국에도 토끼 수인이 많이 살았지만, 아인스턴 왕국에 살던 토끼 수인들은 특별했다. 대다수가 뛰어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혐오하는 수인족이지만, 토끼들은 그 능력만큼은 인정받아 아인스턴 왕국에서 그럭저럭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끼들이 아인스턴 왕국의 일반 백성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을 누군가는 매우 못마땅해했고, 결국 큰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아직 어린 토끼 수인 아이가, 인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으니 토끼 수인들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집단 구타에 가담한 범인 5인을 강력하게 처벌해 줄 것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국왕에게 여러 번 올렸지만, 재상이 국왕에게 전하지 않고 전부 폐기해 버렸다. 그러다 마침내 17번째 상소문에 이르러 국왕의 귀에도 토끼 수인들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16550638413072.jpg‘……국왕은, 철저하게 무시해 버렸지.’

결국, 집단 구타를 벌인 5인은 폭행죄와 살인죄로 처벌받기는커녕 ‘어쩌다 보니 벌어진 사고’라며 훈방 조치 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결과로 인한 토끼 수인들의 분노는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가장 먼저 아인스턴 왕국에 살던 토끼 수인 마법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서 엘로윈 왕국에 살던 토끼 수인들도 ‘아인스턴 왕국을 무너뜨리자.’라며 가담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토끼 수인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세력이, 바로 솔즈베리 가문이었다.

16550638413072.jpg‘아인스턴 국왕이 솔즈베리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유가 다 있지…….’

이제 와서 ‘화평’ 운운하며 글로리아와 그레이안을 정략혼 시켰지만, 글로리아가 사고 치길 바라며 추진한 결혼이라는 것은 불 보듯 훤한 일.

16550638413072.jpg‘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음험한 사람…… 이지, 아인스턴 국왕은.’

원작의 내용과 글로리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섞여들며 이해를 만들어냈다. 토끼 수인들의 반란에 대한 것도, 아까보다 훨씬 자세히 떠올릴 수 있었다.

16550638413072.jpg‘솔즈베리 가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만, 토끼 수인들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

그리고 전례 없던 대학살이 벌어졌다. 수많은 토끼 수인이 아인스턴 왕국의 실력자들에 의해 파리 떼처럼 목숨을 잃었다. 그로 인해 토끼 수인들은 극소수만 살아남아,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토끼 수인들은 어디론가 숨어 버렸거나, 바다 건너 먼 외딴 섬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16550638413072.jpg‘그리고 에이프릴의 부모는…….’

대학살이 벌어졌던 당시에 아인스턴 왕국에서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얼마 안 가 추격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에이프릴의 어머니는 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은 채 솔즈베리 성까지 달려와 에이프릴을 그레이안에게 맡기고 이후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당시 에이프릴의 나이가 불과 네 살이었으니…… 어린아이에게 무척이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을 터였다.

16550638413072.jpg‘정말, 에이프릴은 트라우마 치료가 시급한 게 확실하잖아.’

에이프릴에게 상처가 많다는 것을 왜 잊고 있었을까. 평소에 에이프릴은 귀엽다가도 용감하고, 정의롭고, 조금 사납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면서도 상냥하고 쾌활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나 보다. 에이프릴이 언제나 우리에게 보여주던 유쾌한 모습 뒤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16550638413067.jpg“……그렇게 되어, 에이프릴은 제 양녀로 자라게 된 겁니다.”

반쯤 상념에 빠진 채 듣고 있던 그레이안의 이야기도 마침 끝이 났다. 그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늘 그렇듯 눈빛은 고요했지만,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16550638413067.jpg“에이프릴은 클로에의…… 친어머니의 죽음에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머니를 죽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믿고 있지요.”

16550638413072.jpg“…….”

16550638413067.jpg“네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안전하게 자라기를 바라서 이곳에 맡긴 거라고 수십 번도 넘게 말해 줬지만…… 에이프릴의 마음에는 닿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레이안의 목소리가 쓸쓸한 바람처럼 깊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레이안이 진심으로 에이프릴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레이안에게 에이프릴은 ‘양녀’ 또는 ‘친우의 딸’ 같은 게 아니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에이프릴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레이안의 소중한 외동딸이었다.

16550638413072.jpg“…….”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숲속을 살피는 척했다. 이런 기분이 들 거라고는…… 막 빙의했을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는데. 활자가 아닌, 실재하는 사람들.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그레이안, 귀엽고 유쾌하지만 상처가 많은 에이프릴. 그 존재감을 선명하게 느끼고 나니, 내가 이 삶을 얼마나 안일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16550638413072.jpg‘여긴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인 거야. 원작 내용으로 실재를 판단하려 하는 것은, 나의 오만이고.’

그리고 이곳에 생생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일이기도 했다. 원작의 내용은 활자로 이루어진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정보가 실재와 100% 일치한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결국 원작의 정보에 기인해 인격체인 한 사람을 판단하려 드는 것은 대상의 물화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16550638413072.jpg‘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내가 기억하는 ‘정보 값’은 전부 옆으로 치워 버리고, 실재하는 에이프릴을 생생히 만날 것이다. 그리고 에이프릴의 마음을 치유해 주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할 것이다. 에이프릴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부정할 수 없이 그 아이의 ‘새엄마’가 되었으니까.

16550638413067.jpg“……도착했습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15분쯤 걸어 마침내 도달한 장소는…… 마치 요정이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멋진 그루터기가 있는 공터 한가운데 자리한 맑은 샘물, 그리고 주변에 소담히 피어나 있는 각양각색의 예쁜 꽃들. 믿기지 않게도, 이 장소는 한겨울에도 꽃이 피어날 정도로 따뜻했다.

16550638413067.jpg“저 샘은 ‘요정의 샘’이라고 불립니다. 저 샘이 자리한 이 공터는 기이하게도 날씨가 온화하지요. 숲에 사는 정령의 축복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저 샘이 특별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경과 동화 같은 이야기에 입을 딱 벌린 채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풀숲 사이로 불쑥 솟아 있는 한 쌍의 하얀 귀를 발견하곤 즉시 멈칫했다.

16550638413072.jpg‘차…… 찾았다! 토끼!’

이런 숲에 사는 야생 토끼는 저렇게 하얗고 조그맣지 않으니, 저 토끼는 에이프릴이 분명했다. 그레이안과 시선을 교환한 나는, 에이프릴이 있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놀라게 하면 도망칠지도 모르니 천천히 접근하는 게 중요했다. 혼자서 이런 곳에 오면 어떡하냐고 혼내지도 말고, 그저 많이 걱정했다고 말해 줘야지. 내가, 그리고 그레이안이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한다는 것을 에이프릴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혼자 앓지 않아도 되니, 힘들 땐 망설이지 말고 기대어 줬으면.

16550638441056.jpg“……!”

드디어 내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토끼가 크게 움찔했다. 곧이어 하얗고 동그란 몸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까만 콩알 같은 토끼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16550638441056.jpg“…….”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 토끼가 완전히 몸을 틀어 정면에서 나를 마주 보았다. 토끼의 눈빛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16550638413072.jpg“에이프릴……. 정말 많이 걱정했어. 춥진 않니? 이리 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응?”

하지만 토끼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내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애타는 마음에 입을 달싹거리던 나는 이번에는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해보았다.

16550638413072.jpg“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까? 계속 그러고 있으면 춥잖아, 에이프릴.”

16550638441056.jpg“…….”

이번에도 어김없이 토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 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망연자실하게 두 손을 떨어트린 나는 못내 착잡한 심정으로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다시 등을 돌린 에이프릴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벌을 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클로에 모르토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은, 결코 에이프릴의 잘못이 아닌데.

16550638413067.jpg“에이프릴…….”

이번에는 그레이안이 불러보았지만, 에이프릴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레이안과 나는 서로를 힐끔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에이프릴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말로 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 마음을 온전히 담을 만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에이프릴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16550638413072.jpg“에이프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16550638441056.jpg“…….”

16550638413072.jpg“그때, 난 사실 네가 나를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너는 의외로 내게 살갑게 다가와 줬지.”

16550638441056.jpg“…….”

16550638413072.jpg“그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 말에 토끼의 귀가 살짝 떨렸다. 나는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해 내 마음을 전하려 애썼다. 어느덧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16550638413072.jpg“나도 사실 낯선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혼란스러웠거든. 그런데 네가 곁에 있어 줘서, 그래서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었어.”

16550638441056.jpg“…….”

16550638413072.jpg“네가 나에게 그렇게 해줬잖아, 에이프릴. 그러니까 나도 너에게 똑같이 해주고 싶어. 네 곁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면 안 될까?”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에이프릴이 나를 돌아보았다. 토끼의 까만 두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16550638413072.jpg“앞으로 힘든 일이 있어도 혼자 삭이지 말고, 우리 같이 얘기해 보자. 응? 에이프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하며 에이프릴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나를 보는 토끼의 속눈썹과 수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토끼가 나를 향해 폴짝 뛰어들었다.

16550638413072.jpg“……!”

극적으로 내 품에 안긴 토끼가 결국 눈물을 펑펑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토끼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래 주려 애썼지만, 나도 훌쩍이느라 그냥 같이 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16550638413072.jpg“에이프릴, 울지 마, 울면 더 추워…….”

16550638441056.jpg“끼우웅……!”

서로 얼싸안고 우는 우리의 곁으로 그레이안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는 망토를 벗더니 내 어깨에 둘러주고는, 에이프릴과 나를 너른 품 안에 꼬옥 끌어안았다. 눈물로 축축한 얼굴은 차가웠지만, 서로 맞닿은 부분만큼은 아주 포근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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