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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위험하게 다정한 사람 (28/144)

28화. 위험하게 다정한 사람2022.03.09.

16550638275467.jpg‘원작에서도, 제이드는 결국 에이프릴에게 조련당해 발닦개 1이 되었지.’

심지어 ‘그’ 에이프릴은 가정 교사 밀턴 부인의 엄한 가르침 탓에 위축되어 자란 소심한 에이프릴이었는데도 말이다.

16550638275467.jpg‘내가 만난 여기 이 에이프릴은…… 원작에서처럼 소심하지 않으니 남주 후보들을 훨씬 쉽게 조련할 수 있는 거려나…….’

그리고 원작과는 달리 이 녀석들이 어린 나이에 만난 것도 한몫했으리라. 어릴 때는…… 제아무리 악마 같은 남주 후보 놈들이라 해도 순한 맛일 테니.

16550638275476.jpg“……죄송해요, 글로리아 님.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이제부턴 사실대로 말할게요.”

순한 맛 제이드가 주인님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말했다. 그런 제이드를 향해 나는 제법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거짓부렁이었군.

16550638275467.jpg‘나를 속여먹다니, 하여튼 건방진 녀석이라니까.’

16550638275476.jpg“제가 토끼 모습을 한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여기 이 귀걸이 덕분이에요.”

제이드가 자신의 귓불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이드가 하고 있던 귀걸이. 쌍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오른쪽 귓불에만 달려 있었다.

16550638275476.jpg“이 귀걸이는 아마 오래된 유물 같은데, 집을 나오면서 제 아버지의 보물 창고에서 훔쳐 왔…… 아니, 빌려 왔어요.”

16550638275467.jpg“…….”

방금, 가출하면서 아버지의 창고를 털었다는 고백을 간접적으로 한 거 맞지? 과연 소문난 문제아라니까.

16550638275476.jpg“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덕분에 산에서 조난 당했을 때 곰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죠.”

산에서 조난……. 너 그런 일도 겪었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 얄밉지만.

16550638275467.jpg‘뭐…… 아무리 속이 새카매도, 얘도 애는 애니까.’

어른인 내가 너그럽게 봐 주어야겠지. 제이드가 본성이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16550638275467.jpg‘그나저나 이 녀석,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겠지?’

저 특징적인 머리색을 하고도 여태 안 들킨 게 용하지만…… 이곳이 엘로윈 왕국이라 제이드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 없는 거라고 봐야 할 테지.

16550638275467.jpg‘게다가 엘로윈은 수인들의 나라라 그런지 외모가 특이한 사람이 많아서, 제이드가 엄청 눈에 띄는 편은 아니지.’

따라서 대다수의 엘로윈 왕국 사람들은 제이드를 봐도 ‘저런 머리색도 있구나.’ 하고 넘길 터였다. 제이드도 그걸 다 알고 엘로윈 왕국을 도피처로 선택한 거겠지.

16550638275467.jpg‘하지만 정체를 들키는 건, 결국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이기는 하지. 일단은 내 쪽에서 칼윈 가의 동태 정도는 파악해 두는 게 좋을 듯싶다. 아인스턴 왕국의 귀족이 늑대 수인 가문인 솔즈베리의 기사로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파장이 클 테니까.

16550638275467.jpg‘하여튼 문제 많은 녀석.’

나는 홧김에 손을 뻗어 제이드의 머리칼을 거칠게 쓰다듬어 버렸다. 그러자 제이드가 자못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16550638275467.jpg‘뭐……. 글로리아가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지.’

나는 제이드의 반응을 뻔뻔하게 모르는 체하며, 품 안의 토끼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16550638275467.jpg“에이프릴은 이제 저녁 먹어야 해. 너도 어서 기사단 본부로 돌아가렴. 식사는 거르면 안 되지.”

기사단처럼 규칙이 각 잡힌 집단은 식사 시간도 딱 정해져 있고, 그때를 놓치면 굶어야 한다. 한창 잘 먹을 나이의 녀석이 굶으면 안 되니, 얼른 가서 먹으라고 해야겠지.

16550638275476.jpg“……네, 알겠어요. 에이프릴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제이드가 간절한 눈빛으로 에이프릴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이프릴이 어떤 토끼인가. 식사 시간, 잠자는 시간은 꼭 나하고 단둘만 있기를 원하는 애착 토끼였다! 마치 ‘엄마가 제일 좋아.’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16550638275467.jpg‘훗……. 제법 뿌듯해.’

말랑말랑 보송보송한 토끼를 신명 나게 쓰다듬는 날 보며 제이드가 몹시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서라, 소년. 이 토끼는 한창 엄마가 제일 좋을 나이라고! 연애 따위는 관심 없다고!

16550638275467.jpg“그럼, 이만 저녁 먹으러 가 볼까? 에이프릴?”

16550638289744.jpg“꺄앙!”

내가 묻자 에이프릴이 높은 소리로 울었다. 굳이 제이드의 통역이 없어도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라고 하는 거겠지.

16550638275467.jpg‘아, 너무 귀여워!’

에이프릴의 복슬복슬한 털에 뺨을 비비적거린 나는, 그 자리를 떠나며 제이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토끼도 나를 따라 하듯 앞발을 흔들었다. 죽이 척척 맞는 에이프릴과 나를 제이드는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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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에이프릴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쓰다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밀턴 부인을 상당히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워낙에 엄격한 사람이니 다소 천방지축 기질이 있는 에이프릴과는 잘 안 맞을 테지.

16550638289744.jpg“꺄웅잇…….”

밀턴 부인의 교습을 마치고 온 에이프릴이 귀를 축 늘어뜨린 채로 하소연하듯이 울었다. 오늘도 밀턴 부인에게 쓴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16550638275467.jpg“왜? 요새 너무 무술 훈련만 한다고 혼났니?”

16550638289744.jpg“웅꺗…….”

토끼가 좋아하는 딸기잼 쿠키를 건네주며 묻자니, 에이프릴이 낮게 울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운 없이 쿠키를 갉아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16550638275467.jpg“엄마가 밀턴 부인에게 잘 말해서 앞으로는 너무 혼내지 말라고 할까?”

그러자 토끼는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뭐랄까,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역시 에이프릴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고 의젓한 토끼였다. 나는 토끼 귀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16550638275467.jpg“그럼 이렇게 하자. 앞으로 교습을 듣고 난 다음에는 꼭 엄마 방으로 와. 에이프릴이 좋아하는 간식 잔뜩 준비해 놓고 있을게.”

교습을 아예 듣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피아노와 하프 연주, 예술 이론, 수학, 역사 등등……. 에이프릴이 솔즈베리 공녀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하는 교양과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밀턴 부인이 좀 엄격하긴 하지만,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이기도 하고.

16550638275467.jpg‘그리고 마음속으론 에이프릴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니까. 봉급 받을 생각만 하는 어중이떠중이 가정 교사들보다야 훨씬 낫지.’

그래도 토끼가 힘들어하니 그레이안에게 은근슬쩍 말을 흘려 둬야겠다. 내가 말하면 밀턴 부인에게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그레이안의 말이라면 다르니까.

16550638289744.jpg“끼웅…….”

쿠키 하나를 다 먹은 토끼가 내 품에 쏙 안겨 왔다.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토끼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에이프릴과 점점 더 친해지며 좋은 분위기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는데……. 며칠 후인 12월 7일. 우려했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 * * 12월 7일이 에이프릴을 낳아준 친모의 기일이라는 사실은, 달이 바뀐 1일에 그레이안이 넌지시 알려주어 미리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요사이 에이프릴을 대할 때 계속 조심하고 있었는데……. 12월 7일인 오늘 아침, 기어코 에이프릴이 사라지고 말았다.

16550638275467.jpg‘또 나무 위에 올라간 건 아니겠지?’

원래 에이프릴은 나무 위에 자주 올라가는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에이프릴을 구하려다 다칠 뻔한 사건 이후로 더는 나무 위에 올라가는 말썽은 피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원의 나무 위도 꼼꼼히 살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에이프릴을 찾아 솔즈베리 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16550638275467.jpg‘날씨도 추운데 어딜 간 걸까……. 실외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오래 바깥에 있다가 감기 걸리면 어떡해.’

달이 바뀌면서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 그야말로 엄동설한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털이 복슬복슬한 토끼라도 추울 게 분명한데…….

16550638275467.jpg“에이프릴…….”

정원 한복판에 서서, 나는 걱정스럽게 에이프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이프릴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볼 것을 그랬나. 토끼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기분만 맞춰 주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16550638275467.jpg‘정원은 거의 다 살펴봤는데, 토끼 털 한 가닥도 안 보이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그때였다. 등 뒤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틀어 그쪽을 살펴보니, 말의 안장에 막 올라타려는 그레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16550638275467.jpg“잠깐만요!”

나는 크게 소리치며 그리로 급히 달려갔다. 그레이안이 이쪽을 돌아보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의 앞에 다다른 나는 숨을 조금 헐떡이며 물었다.

16550638275467.jpg“어딜, 가시는 건가요?”

글로리아의 체력은 몹시도 형편없어서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찼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이안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써 침착함을 담아낸 듯한 목소리였다.

16550638318722.jpg“솔즈베리 성 인근에 숲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 에이프릴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데…… 혹시 몰라 가보려고 합니다.”

16550638275467.jpg“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에이프릴이 걱정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나섰다가, 곧 문제점을 깨닫고 말았다. 나…… 말 타는 법 모르지! 어쩌면 글로리아의 몸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말에 올라타는 도박을 벌이기에는…… 낙마 사고가 염려되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는데…….

16550638275467.jpg“……?”

별안간, 그레이안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16550638318722.jpg“부인은 기억이 온전치 못하니 혼자 말을 타는 게 어려우시겠지요.”

16550638275467.jpg“어……. 네, 아무래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대꾸했다. 그레이안은 자상한 미소를 짓더니, 내게 슬며시 팔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16550638318722.jpg“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와 함께 타고 가시면 됩니다.”

16550638275467.jpg“네? 그래도 괜찮은…… 헉!”

채 묻기도 전에, 나를 번쩍 안아든 그레이안이 내 몸을 순식간에 말안장 위에 올려 주었다. 무슨 상황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16550638275467.jpg‘으아악, 어, 어딜 잡아야 하는 거야?!’

갑자기 말의 등에 올라타게 된 나는 몹시도 당황했다. 그러나 허둥지둥하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을 따름이었다. 곧 내 뒤편에 올라탄 그레이안이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기 때문이다. 그의 품은…… 무척이나 넓고 안정감 있었다.

16550638318722.jpg“괜찮습니다.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바로 뒤에서― 그러니까, 숨결이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김없이 심장이 벌렁거렸다. 지금 나에게 가장 위험한 건 바로 당신인 듯한데……!

16550638318722.jpg“좀 더 편히 기대셔도 됩니다.”

그레이안이 한 팔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그와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괜찮은 거야? 나 이러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죽는 거 아니냐고? 이 심장 소리가 그에게 전해질까 봐 겁이 났다. 내 심장이 이토록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은…… 그레이안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데.

16550638318722.jpg“춥진 않으십니까?”

잠시 후 그가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기 시작했고, 우리는 솔즈베리 성의 정문을 빠르게 통과했다. 나는 귓가에 스며든 그의 숨결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16550638275467.jpg“……괜찮아요.”

16550638318722.jpg“부인은 몸이 약하니 이러다 감기에 걸리실까 봐 염려됩니다. ……그냥 저 혼자 나오는 편이 나았을까요.”

16550638275467.jpg“아니에요. 저도 에이프릴이 너무 걱정되고…… 어서 에이프릴을 찾고 싶어요.”

순간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나는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싼 망토 자락을 곧 알아차렸다. 그레이안이 자신의 망토 앞섶을 풀어서 내 몸까지 푹 덮어 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캥거루처럼…….

16550638275467.jpg‘……이 모습,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우습지 않으려나.’

하지만 그의 체온이 전해져 와서 무척이나 따뜻했다. 찬바람에 뺨이 에일 듯 아릿한 건 여전했지만.

16550638275467.jpg‘정말, 이 사람은…….’

너무 다정한 사람이다.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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