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새끼 고양이를 위한 내기2022.03.05.
“……?”
급한 문제? 뜻밖의 이야기에 나도, 내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던 시녀 안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안나와 시선을 교환하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갈 채비를 해야겠네. 좀 도와줄래?”
“네, 마님.”
순순히 대답한 안나가 곧 외투를 가지고 돌아왔다. 11월 말이라 날씨가 무척 쌀쌀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려면 외투를 꼭 입어야 했다. 머리를 빗고 외투를 입은 뒤 신발을 부츠로 갈아 신은 다음, 안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한 5분쯤 걸렸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은 우리를 발견하자 사뭇 조급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마님.”
“그래, 기사 연무장에는 무슨 일로?”
“예, 그게 말입니다…….”
하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크게 놀라울 것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고, 어느 정도 예상해 왔기 때문이다.
‘텃세가 심한 건 어디든 마찬가지이니까.’
기사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내가 왔다는 사실을 바로 알리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연무장 안은 예상대로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기사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인가 떠드는 중이었고, 한편에서는 견습 기사로 보이는 소년들 몇 명이 붉은 머리의 소년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붉은 머리의 소년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바로 로드리였다.
‘얼굴에 피멍이 들었네. 입술도 터지고……. 다른 데도 다쳤으려나…….’
보기만 해도 아픈 모습을 한 로드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견습 기사들과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을 했다더니, 어째 로드리만 일방적으로 쥐어터진 모습이었다.
‘다른 놈들은 왜 이렇게 멀쩡해.’
로드리와 대치하고 선 3명의 견습 기사 중 1명의 뺨에만 작은 상처가 나 있을 뿐, 다들 멀쩡했다.
‘어휴, 속상해서야 원…….’
로드리는 얼굴이 예쁘장한 편이었다. 원작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도 역변 없이 저 얼굴 그대로 간다. 그야말로 한 떨기 꽃과 같은 미인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남주 후보였지. 그런 로드리의 얼굴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저 무뢰배 같은 놈들! 미인은 지켜줘야 하는 존재라고! 나는 터벅터벅 걸어 그리로 다가갔다. 문 근처에 서 있다가 연무장 한복판에 들어서자니, 드디어 나를 발견한 기사들 몇몇이 숨을 헉 삼켰다. 난 기사들을 따가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어린애들이 싸우는데 안 말리고 구경만 해? 어른이 되어서는! 잘 지도하지 못할망정!
“빨간 머리, 네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로드리를 향해 뭐라고 쏘아붙이던 견습 기사 한 명이 때마침 나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다른 두 명도 내 기척을 알아차렸다. 로드리도 마찬가지였다. 로드리는 나를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여기 와 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못 했던 것처럼.
“헉, 고, 공작 부인…….”
“여, 여긴 어쩐 일로…….”
“이건, 그러니까―.”
견습 기사 세 명은 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나는 녀석들을 노려보며 위협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다 전해 들었어. 너희, 로드리가 견습 기사 훈련을 받는 게 불만이라며?”
내가 묻자 소년 셋이 서로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주동자인지는 몰라도 혼자서 한 명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셋이 함께라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지.
“제이드와는 친하게 잘 지냈으면서 왜 로드리는 괴롭히고 무시하는 거야? 로드리가 노예 출신이라서? 적호 수인이라서?”
“……노예 출신이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소년 1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말했다. 뭐,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다. 기사단에는 로드리 외에도 그레이안이 구해 온 노예 출신 기사가 몇 명 있는 모양이니까. 고로 이 녀석들이 로드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늑대 수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적호 수인이라서, 그리고.
“로드리가 기본도 안 되어 있고, 자질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
정곡을 찔린 소년 1, 2, 3이 거의 동시에 움찔했다. 참 알기 쉬운 녀석들이라니까. 기사단은 철저히 실력주의로 돌아간다. 출신에 관계없이 가장 뛰어난 기사가 단장이 되고, 매년 치러지는 실력 평가에 따라 급이 나뉜다. ―라는 사실을 그레이안으로부터 전해 들어 잘 숙지하고 있었다. 로드리는 내가 데려온 아이이니 직접 관리하고 싶다고 하자, 그가 기사단 운영에 대해서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 정말로 로드리를 있는 그대로 평가한 게 확실해? 적호 수인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본 게 아니고?”
“그, 그건, 저희는…….”
바로 부정 못 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니 또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왜인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로드리를 한 번, 그리고 소년 셋을 한 번씩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얼마 후면 기사단 실력 평가가 있지?”
실력 평가 대회는 매달 15일에 치러진다. 지금은 월말이라 이미 시기가 지났으니, 다음 달인 12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 로드리의 실력이 크게 늘지, 아니면 그대로일지, 너희 셋이 나와 내기하는 거야.”
“예……?! 내, 내기요?!”
소년 2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소년 2는 물론이고 다른 녀석들도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귀부인이 일개 견습 기사들과 내기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만일 내기에서 내가 지면, 로드리는 기사가 아니라 내 하인으로 삼을 거야. 하지만 내가 이기고 너희가 지면…….”
“…….”
“너희는 로드리에게 기사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걸 깔끔히 인정해야 해.”
소년 셋은 물론이고 엿듣던 다른 이들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이 내기에 내가 이길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 로드리는 15일도 안 걸려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될 것이다. 그건 내가 보증한다. 어디 그때까지 두고 보자고.
“어때? 할 거지?”
“…….”
소년 셋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면 꼴 보기 싫은 로드리를 기사단에서 내쫓을 수 있고, 지면 자신들이 자존심을 숙이면 되니 크게 잃을 게 없는 내기라는 것을 빠르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씩 웃은 나는 손을 불쑥 뻗어 소년 1의 뺨을 콱 꼬집었다. 당황한 소년 1이 흠칫거리거나 말거나, 제법 아프게 꼬집어준 후 다른 녀석들도 똑같이 해주었다. 이놈들……. 어려서 그런지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탄력이 있군.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여럿이서 남을 괴롭히거나 때리지 마.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큰 벌을 내릴 줄 알아.”
여기저기서 ‘악녀 글로리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뉘앙스의 시선들이 날아들었지만, 전부 무시했다. 글로리아의 악명을 당장은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얼굴에 철판을 까는 수밖에……. 어차피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럼, 너희 이제부터 밖으로 나가서 야외 운동장 20바퀴씩 뛰고 와.”
“네……??”
“비겁하게 셋이서 한 명을 이렇게 묵사발을 만들어 놨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자, 실시!”
그렇게 해서 소년 셋은 솔즈베리 성의 드넓은 야외 운동장을 20바퀴 뛰고 죽을상이 되어 돌아왔다.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운동장 20바퀴 뛰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며 으름장을 놓은 뒤, 나는 로드리를 데리고 의무실로 향했다. 자신을 괴롭힌 견습 기사들을 노려볼 때는 독기 가득한 눈빛이었던 로드리는, 나와 단둘만 있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졌다.
‘귀여운 녀석. 새끼 고양이가 따로 없네.’
물론 호랑이지만 말이다. 뭐, 호랑이도 고양잇과 동물이니까…….
“많이 아프니?”
“괜찮아요…….”
멍이 들고 상처가 난 곳에 약을 살살 발라 주며 묻자니, 로드리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약이 잘 스며든 부위에 반창고를 붙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내기는 너무 부담 갖지 마. 혹시 지더라도 내가 너를 전속 시종으로 삼아 주면 그만이니까.”
“……네.”
“아니면 내 후원을 받으며 다른 일을 해도 돼. 네가 뭘 하고 싶은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고.”
너는 할 수 있다든가, 잘해 보라든가 하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니까. 그리고 로드리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얘는 나를 어미 고양이처럼 따르고 있어. 즉, 나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뜻이지.’
따라서 나는 로드리의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을 덜어내 주면 그만이다. 그리고 안정을 찾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원래 어릴 때일수록 크게 방황하는 법인데, 얘는 노예로 산 시간이 기니 더욱 그렇겠지.’
딱한 녀석. 나는 로드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로드리는 왜인지 작게 움찔하더니, 예의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불쌍한 눈빛이었다. 한숨처럼 웃음을 흘린 나는 로드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 네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까.”
“…….”
그러자 로드리는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감사합니다…….” 하고, 자그맣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 * *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에이프릴, 넌 어떻게 생각해?”
로드리가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제이드는 어딜 가서 뭘 하나 했더니, 다름이 아니라 토끼의 무술 훈련을 도와주고 있었다.
“키훙.”
에이프릴이 앞발로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토끼 울음소리로 뭐라고 종알대기 시작했다.
“끼웅앗, 꺄웅, 웅꺄웃.”
“…….”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에이프릴 옆에서 제이드가 내게 친절히 통역해 주었다.
“‘그 호랑이 녀석이 얼마나 무서운데. 걔를 괴롭힌 바보들은 보는 눈도 없다. 조만간 큰코다칠 거다.’라고 하시네요.”
……그게 그렇게 긴 말이었어? 그냥 몇 번 쫑알거린 게 다인데? 이쯤 되니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제이드는 도대체 어떻게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듣는 거지?
“제이드,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넌 어떻게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듣는 거야?”
그러자 제이드는 씩 웃더니 제법 의기양양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만의 특별한 능력이죠.”
“……세상에 그런 능력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럴 리가요? 신화에 나오는 내용이라 다들 아는 이야기잖아요? 세계수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전해 받은 사람들의 전설 말이에요.”
아니, 전혀 모르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음? 알 것 같기도 하고……?’
불현듯 머릿속에 불가사의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글로리아의 기억인 모양이었다.
‘세계수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전해 받은 인간들은 만물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요새 이런 식으로 글로리아의 기억이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단 말이지. 역시 글로리아와 점점 동화되고 있는 건가…….
“제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뻐기듯 말하는 제이드를 나는 못 미덥게 노려보았다. 아닌 거 같은데. 어딘지 수상한데. 다른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 그때였다. 토끼가 별안간 코웃음을 치더니 제이드의 손등을 앞발로 찰싹 때렸다.
“……?”
그러고는 또 뭐라고 종알대는 게 아닌가.
“끄애웅.”
‘거짓말.’이라고 한 거 같은데? 왠지 그런 느낌인데? 토끼는 이어서 계속 뭐라고 조잘거리더니, 제이드를 쓱 흘겨보곤 내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키웅.”
내 두 팔 안에 안정적으로 안긴 토끼가 흡사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쓱 돌려 제이드를 외면했다. 그러자 제이드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제이드는 입을 달싹거리며 쩔쩔매듯이 말했다.
“에이프릴…….”
“끼얏웅.”
“아, 알았어요, 에이프릴. 사실대로 말할게요……!”
에이프릴이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이드에게 꽤 치명타를 주었나 보다. 늘 빤질거리던 녀석이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니.
‘벌써부터 에이프릴에게 잡혀 사는군. 미래가 훤히 보이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