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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늑대에게는 비밀이 있다 (26/144)

26화. 늑대에게는 비밀이 있다2022.03.02.

16550637963572.jpg“읏……!”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장소로 나오니 눈이 따갑도록 부셨다.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지하로 보이는 구조물이었지만, 벽마다 마법으로 만든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사방이 대낮처럼 환했다. 컹컹컹! 왉! 왉왉! 크르릉……! 뒤에선 아직도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레이안이 나를 안은 채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도 자연히 정면을 향했다. 우리가 막 빠져나온 커다란 철문은 아직 활짝 열려 있었지만, 늑대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서성일 뿐이었다.

16550637963572.jpg‘왜 더는 못 쫓아오는 거지?’

의아함에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철문의 근처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마법에 쓰이는 기호와 문자가 문지방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16550637963572.jpg‘혹시 이것 때문인가……?’

추측일 따름이었지만 거의 확실해 보였다. 이 공간 안에 특이한 점이라곤 바닥에 마스킹 테이프처럼 길게 늘어진 저 기호와 문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레이안이 내 추측을 확인해 주듯 설명을 시작했다.

1655063796359.jpg“이 석실의 문지방에는 늑대들이 통과할 수 없게 막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턴 안심하셔도 됩니다.”

싱긋 미소를 지은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매혹적인 시선에 어김없이 심장이 철렁하고야 만 나는 황급히 고개를 떨어트리며 조금 허둥지둥하듯이 말했다.

16550637963572.jpg“그, 그럼, 일단 저 좀 내려주실래요? 이제부터는 제 발로 걸어서 갈게요.”

1655063796359.jpg“…….”

그레이안은 왜인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를 힐끔거리던 나는 도저히 그와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바닥을 보는 척할 따름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뜀박질하고 있었다. 이 감각이 착각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강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참 후에야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1655063796359.jpg“저는 이대로도 좋습니다만, 혹시 불편하십니까?”

어느새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늑대들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출구로 보이는 복도 쪽으로 방향을 튼 그레이안이 여전히 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6550637963572.jpg“불편하다기보다는…….”

나는 내 상태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자꾸만 당신 눈빛과 목소리에 홀리는데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그래서 혼란스럽다고?

16550637963572.jpg‘……그거 꼭 짝사랑에 빠진 사람 얘기 같잖아.’

미, 미친. 말도 안 돼……! 나 진짜로 그레이안에게 홀린 거냐고? 원작의 글로리아처럼?

16550637963572.jpg‘안 돼!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그레이안을 좋아하게 되어 전전긍긍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팔자에도 없는 짝사랑이라니, 절대 사절이야! 마음을 다잡은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16550637963572.jpg“나를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가 부부 사이이긴 하지만, 정략으로 맺어진 관계고…….”

1655063796359.jpg“시작은 정략이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이지 않습니까?”

16550637963572.jpg“그, 그렇지만, 진짜 부부라고 하기에는 우린 첫…….”

그 순간, 나는 에이프릴을 의식하고 재빨리 입을 닫았다. 첫날밤에 관한 것은 어린 토끼가 듣는 데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16550637963572.jpg“크흠! 아무튼 난 당신이 나에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매번 그러기 번거롭잖아요.”

그는 지나치게 친절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글로리아 아인스턴의 악명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말이지.

1655063796359.jpg“……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박자 늦게 대꾸한 그레이안이 설핏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정면을 향해 있지 않은데도 그는 안정감 있게 걷고 있었다.

1655063796359.jpg“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니까요.”

16550637963572.jpg“…….”

뭐, 뭔데, 그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잖아. 저기요, 원작 여주의 아버님? 제발 숨 쉬듯 다정하게 구는 건 그만둬 주세요. 자꾸만 착각하게 되잖아!

1655063796359.jpg“계속 관심이 갑니다. 당신에게.”

16550637963572.jpg“……!”

1655063796359.jpg“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숨기는 비밀이 무엇인지…… 전부 알고 싶습니다.”

16550637963572.jpg“…….”

1655063796359.jpg“그러면 안 됩니까?”

마치 심장을 쿡 찌르는 듯한 단언이었다. 그는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성으로서…….

16550637963572.jpg‘거……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글로리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익히 알면서. 과거의 글로리아가 저지른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보기까지 했으면서……. 나에게…… 관심이 생긴다고? ‘기억을 잃었더니 사람이 180도 달라졌다’라는 내 허무맹랑한 주장을 믿어 준다고?

16550637963572.jpg‘……이 사람, 혹시 뭐에 쓰였나? 알고 보니 빙의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나는 혼란 속에서 입만 달싹일 뿐,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그레이안은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고 침묵했다. 이따금 눈길을 내려 나를 지그시 응시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부자연스럽게 피하곤 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16550637992653.jpg“…….”

내 품에 안겨 있는 에이프릴은 묘한 눈으로 그레이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뭐랄까, 해석하기 어려운 시선이었다. 에이프릴은 늘 그렇긴 하지만. 한참 후에야 우리는 지상층에 도착했다. 익숙한 복도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하에서부터 그레이안이 나를 안고 계단을 올라왔다는 것을!

16550637963572.jpg‘내가 미쳐!’

계단이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몇 층이나 올라와야 했던 거지? 돌겠다.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솔즈베리 공작님 무릎 괜찮으신 거냐고! 나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레이안의 품에서 벗어나려 살짝 버둥거렸다. 그런데 그가 나를 좀 더 편하게 고쳐 안고는 두 팔에 힘을 꽉 주는 것이 아닌가.

16550637963572.jpg“……??”

나는 영문 모른 채 눈만 깜박거렸다. 저기, 이젠 그만 내려주시는 게……?

1655063796359.jpg“괜찮습니다, 부인. 이대로 방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아니, 제가 안 괜찮은데요! 그러나 그레이안은 나의 항의 어린 눈빛 따위 가뿐히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버버 입을 달싹이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조금 짓궂게 보이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16550637963572.jpg“…….”

착각…… 이겠지? 이 사람, 지금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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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방까지는 금세 도착했다. 방에 들어오자 그레이안이 드디어 나를 내려주었고, 나는 토끼를 끌어안은 채 그에게서 후다닥 떨어져 섰다. 그런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자못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려 애썼다.

16550637963572.jpg‘어, 어쨌든 감사 인사는 제대로 해야겠지. 내 목숨을 구해준 거나 다름없으니…….’

조금 진정이 된 후에, 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6550637963572.jpg“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공작님. 덕분에 살았어요. 그리고 에이프릴도…… 정말 고마워, 에이프릴.”

토끼를 폭풍 쓰다듬으며 내려다보자 에이프릴이 작게 “끼양.” 하고 울었다. ‘별말씀을.’이라는 뜻인 거 같았다. 귀여운 에이프릴을 보며 설핏 미소를 지은 나는, 이내 그레이안을 힐끔거리며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16550637963572.jpg“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지 않을래요?”

차를 마시자고 한 건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일단은 그레이안을 그냥 돌려보내기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다른 이유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1655063796359.jpg“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부인.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내 맞은편 자리에서 그레이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차는 장미 꽃잎과 페퍼민트, 라벤더가 블렌딩된 녹차였다. 은은한 꽃향기가 무척이나 좋고,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효능이 있었다.

1655063796359.jpg“부인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은 에이프릴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구하러 갈 수 있었지요.”

16550637963572.jpg“……에이프릴 덕분에요?”

뜻밖의 사실에 조금 놀라 반문하자, 그레이안이 대답 대신 에이프릴을 흘끗 보았다. 토끼는 우리의 대화를 못 들은 체하며 두 앞발로 쓱쓱 세수를 하고 있었다.

16550637963572.jpg‘저 녀석…….’

역시 수상하단 말이야. 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는 걸까?

1655063796359.jpg“집무실에서 일하는 중이었는데, 에이프릴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부인이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그레이안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적당히 무게감 있으면서도 여유롭고 차분했다.

1655063796359.jpg“에이프릴 말로는…… 복도에서 비명이 들려오길래 달려가 봤는데,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어서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그 복도가 출입 금지 구역이라는 걸 기억해 냈고, 비명의 주인이 아무래도 부인인 것 같아 제게 달려와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에이프릴이 마침 그 복도 근처에 있었다는 기막힌 우연이 다소 의심스럽긴 해도. 토끼는 이제 디저트 접시 앞으로 바짝 다가가 마들렌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 모습도 슬슬 익숙해지려 한다. 레어 스테이크를 먹느라 입가에 피가 잔뜩 묻은 토끼를 볼 때면 아직도 흠칫하지만.

1655063796359.jpg“솔즈베리 성에 출입 금지 구역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드려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16550637963572.jpg“아니에요, 어딘지도 모르고 함부로 돌아다닌 제 탓도 있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그레이안의 잘못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집사가 나에게 전부 꼼꼼히 안내해준 줄로 알았을 테니까. 그러니 그의 사과는 받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궁금한 게 많았다. 나는 그레이안의 표정을 살피며 슬며시 질문을 꺼내 들었다.

16550637963572.jpg“그런데…… 그 늑대들은 대체 뭔가요? 솔즈베리 성의 지하에 그런 늑대들이 있다니, 좀 의아해서요.”

게다가 그 늑대들은 지하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일 아닌가. 심지어 이런 설정은 원작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레이안에게 비밀이 있는 듯했다.’와 같은, 의미심장한 서술이 몇 번 나오긴 했지만…….

16550637963572.jpg‘작가가 소설 속에 풀어내지 못한 설정 같은 건가?’

1655063796359.jpg“…….”

내 질문을 듣고도 그레이안은 아무런 대답 없이 오래 침묵했다. 어느새 마들렌 하나를 다 먹은 토끼가 우리 둘을 유심히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한참 정적이 흐른 후, 마침내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1655063796359.jpg“죄송합니다. 그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16550637963572.jpg“아…….”

결국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하게 된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가문의 기밀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대에게 알려주지는 않을 테니.

16550637963572.jpg“말하기 어렵다면 어쩔 수 없죠, 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차 맛이 썼다. * * *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출입 금지 구역에서 길을 잃은 일로 집사가 크게 문책을 당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혼내는 그레이안이라니, 어쩐지 상상이 안 갔다. 그는 무슨 일이든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갈 인상이었으니까.

16550637963572.jpg‘솔즈베리 가문의 수수께끼……. 도대체 뭘까.’

혹시 내가 기억 못 하는 원작 내용이 있나 싶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봐도 기억이 안 났다. 하기야 자투리 시간에 심심풀이로 읽었던 소설을 세세히 기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한데…….

16550637963572.jpg‘게다가 에이프릴에게도 비밀이 있지. ……나도 모두에게 빙의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고. 나 참, 여기저기 비밀투성이네.’

그 지하실과 그곳에 갇힌 늑대들은 대체 뭐였을까? 몰래 조사해 보면…… 안 되겠지?

16550637963572.jpg‘하지만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어떻게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턱을 괴고 애써 머리를 굴리던 차였다. 별안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0638035334.jpg“마님, 급한 문제입니다. 당장 기사 연무장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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