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대단한, 용감한, 토끼2022.02.26.
음, 아니야. 내 인생에 로맨스 따위는 없어!
‘그리고 세상에 로맨스 같은 게 어디 있어! 다 환상이지!’
현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기보다는 각박한 법이다.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하곤 했던 동기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더라고.
‘처음만 좋고, 사랑의 유통 기한이 끝나면 그 후론 그냥 정.’
그리고 부부가 되고 나면 못 볼 꼴 다 보고 미운 정 붙이고 산다던가…….
‘……그레이안의…… 못 볼 꼴이라, 그게 뭘까? 그 사람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
솔즈베리 성을 다 둘러본다는 당초의 목적도 잊고, 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그레이안의 늑대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지. 왜 안 보여주는 걸까? 혹시 콤플렉스인가……? 아니면 변신하기 귀찮나? 그렇다기엔, 에이프릴은 숨 쉬듯 변신하던데.’
혹은…… 늑대 모습을 하는 것에 트라우마 같은 게 있나?
‘흐음…….’
그레이안이…… 그런 게 있을 사람으론 안 보이는데. 게다가 원작에서도 그런 서술은 없었고…….
‘하지만 원작은 절대적인 예언서 같은 게 아니지.’
내 개입 탓인지는 몰라도 전개가 계속 바뀌고 있으니까.
“…….”
문득 궁금해졌다. 원작의 ‘전개’라고 하는 게 운명이라면, 나는 운명을 바꾸고 있는 건가?
‘내가 글로리아의 몸에 빙의한 건…… 우연이라기보다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계획이라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 터. 그럼 그 초월적인 존재는, 내가 운명을 바꾸길 바라는 걸까……?
‘……으으음, 머리 아프다. 이런 건 혼자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올 문제인데……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렸다. ……나 길 잃은 거야? 미아가 된 거냐고?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이 미아가 되다니!
‘젠장, 딴생각에 너무 심취해 있었어.’
솔즈베리 성은 무지막지하게 넓으니 주의해야 했는데…… 아니 근데 너무 심하게 넓은 거 아니야? 사람이 돌아다니다 미아가 될 정도라니!
‘일단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본 나는 멈칫 굳고 말았다. 복도가…… 두 갈래였다. 왼쪽, 오른쪽, 둘 중 어느 방향이 왔던 길이지? 빌어먹을, 기억이 안 난다. 내 기억력은 금붕어 수준인가?
‘생각에 잠긴 채 걷는 게 이렇게나 위험한 일이었다니!’
잠시 고민하던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닢 꺼내들었다. 그리고, 머리 위까지 높이 던졌다.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한국인이 길을 잃으면 흥얼거리는 노래 1위를 중얼거리며, 동전이 손바닥 위로 떨어지길 기다렸다.
‘내 운명을 고르자면…….’
툭, 동전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결과는 뒷면. 그러니까…….
‘왼쪽…….’
이렇게 막 길을 골라도 되려는진 잘 모르겠지만…… 가 보자, 일단.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낫지.
‘근데 여기 너무 어두운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고른 왼쪽 길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 어두워졌다.
‘……잘못 고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그때였다.
“……!”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서 있던 바닥이 갑자기 푹 꺼졌다.
“꺄아아악!”
그리고 나는 새카만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망했다. 여기 어디야.’
앞이 캄캄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손전등도, 스마트폰도 없고, 주변을 비춰볼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안 죽어서 다행이긴 한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새까만 어둠뿐이지만, 손으로 바닥을 꾹꾹 누르면 푹신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완충제가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이제 어떻게 할지.’
1. 사람들이 구하러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린다. 2.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길을 찾아 나선다. 3. 세계수의 나비들을 불러내 길을 찾게 한다!
‘아, 당근 3번이지!’
나는 빠르게 세계수의 나비들을 불러냈다. 나비들은 어째서인지 하품을 하며 등장했다. 잠도 잘 수 있는 거였나? …….
{후아암, 무슨 일이야?}
{글로리아가 길을 잃었나 봐.}
{글로리아는 길치였구나!}
‘아니야!’
이 녀석들은 왜 툭하면 나를 놀리는 거지? 재밌나? 마치 내가 에이프릴을 놀리는 것과 같은 이치…….
‘……이런 게 역지사지라는 건가.’
에이프릴과 비슷한 입장이 되어 보니, 내가 좀 얄미웠던 거 같다. 앞으로는 되도록 자제해야지.
{우리에게 길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으로 불러냈구나?}
나비 하나가 살랑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찾을 수 있어? 온통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당연히 찾을 수 있지. 우리를 봐. 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잖아.}
나비들이 뽐내듯 날개를 팔랑거렸다. ……과연,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긴 하는데…….
‘만약 여기에 위험한…… 괴물 같은 게 있으면 어떡해? 너희가 이길 수 있어?’
{으음……. 우리는 싸움은 잘 못해.}
{우리의 일은 보살피는 거였거든.}
{우린 웬만해선 잘 안 싸워. 하지만 네 목숨이 위협받거나 하면 싸울 수 있지.}
{다만 우리가 싸우는 방식은 네 생각과는 좀 다를 거야.}
‘흐음…….’
아무튼, 결론적으론 싸울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이야기했다.
‘그럼, 너희 중 반은 여기 남고, 반은 길을 찾으러 가 줄래?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응, 그럴게.}
{걱정 마! 우리가 길을 꼭 찾아줄 테니까!}
{우린 여기 남아서 널 지켜줄게.}
두 무리로 나뉜 나비들이 암흑 속에서 영롱한 빛을 뿌려댔다. 나비들 덕분에 주변이 조금이나마 밝아져서 나는 아까보다 훨씬 진정할 수 있었다. 곧이어 한 무리의 나비들이 길을 찾아 떠났고, 남은 한 무리가 내 곁에 남았다. 나비들은 내 근처를 날아다니며 계속 잡담을 조잘거렸는데,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좀 장난스럽긴 해도 착한 녀석들이야.’
{그런데, 글로리아.}
‘응?’
{그레이안이랑 아기 낳을 거야?}
나비 한 마리가 만들어준 물을 손바닥에 담아 마시던 나는, 그 순간 물을 뿜고야 말았다.
“풉―!”
{앗, 무지개 만들자!}
{글로리아 덕분에 무지개 만들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것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아기 만들 거냐’는 질문을 한 나비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랑 나는 첫날밤도 제대로 안 치렀어……! 그런 질문은 갑자기 왜 하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왜냐면 말이지, 그레이안은 사실―.}
그때, 불현듯 정체 모를 기척이 느껴졌다. 멈칫한 나는 몸을 뻣뻣이 굳혔다. 나비들도 말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하는 듯했다. 이윽고 바닥에 무언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박사박, 하는 소리.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짐승이 네 발로 걷는 소리와 흡사했다.
‘……설마.’
{글로리아, 조심해!}
나비들의 경고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여러 쌍의 안광이 시퍼렇게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짐승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 아오오!
‘늑대!’
이 짐승들의 정체는…… 그럴 것 같았지만, 역시나 늑대였다!
‘솔즈베리 성 지하에…… 왜 늑대가 있는 거지……?!’
나는 잔뜩 겁을 먹은 채로 늑대들을 주시했다. 이 늑대들…… 혹시 수인들인가? 늑대들은 나를 관찰하기라도 하듯,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른침을 꼴칵 삼킨 나는 애써 용기를 내어 늑대들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저, 안녕하세요……?”
그랬더니, 늑대들은 느닷없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수인이 아니라 진짜 늑대였나 봐!’
나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늑대들 앞을 세계수의 나비들이 가로막았다. 그러자 늑대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세계수의 나비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잘은 몰라도, ‘당장 비키지 않으면 죽인다’와 같은 의미인 것 같았다…….
‘이, 이 미친 늑대들. 설마 나를 먹잇감으로 인식한 건 아니겠지?’
……정말 그런 모양이다. 방금 늑대 한 마리가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니! 이 깡마른 몸 어디에 먹을 데가 있다고!’
세계수의 나비들과 배고픈 늑대들이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타이밍 좋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글로리아!”
“……!”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끼애앵―!”
……그리고, 그레이안의 어깨에 올라서 있는 토끼 한 마리.
‘네가 왜 같이 왔어?!’
진짜 미치고 환장하시겠다.
‘너무너무 용감한 토끼. 지나치게 용감한 토끼.’
용감한 토끼님께서 내 앞에 멋지게 착지하며 늑대들을 향해 격투 자세를 취했다. 나는 못내 황당한 표정으로 토끼님의 하얀 솜뭉치 같은 등을 바라보았다.
‘늠름하지만, 하나도 늠름하지 않은 토끼…….’
에이프릴, 네가 싸울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 우리 차라리 마법을 배우자. 그게 좋겠어. 원래 토끼 수인들은 대대로 마법사를 해 왔다며.
“끄애앵!”
“크르르…….”
토끼가 우렁차게 울자 늑대들이 주춤 물러나며 이를 드러냈다.
‘?’
‘주춤 물러나며’ 이를 드러냈다.
‘……뭐지? 내가 헛것을 보나?’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늑대들은 정말로 에이프릴을 겁내고 있었다. 아니, 저기…… 얘는 토끼인데? 토끼를 무서워하는 늑대들이라니! 그런 주제에 나를 잡아먹으려 했다니!
‘진짜로 에이프릴의 위협이 통할 줄이야. 여긴 정말로 에이프릴이 초강자가 되는 세계관인가…….’
나는 매우 어이없어하며 늑대들과 에이프릴을 번갈아 보았다. 토끼는 어디 덤벼보라는 듯 몸을 흔들며 앞발을 샥샥 휘둘러댔다. ……저기에 맞아 봤자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은데.
“부인, 괜찮으십니까?”
“……아.”
그때, 옆에서 그레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다친 곳은 없으시군요, 다행입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일단은 어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합시다.”
그러더니,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실례합니다.” 하고 덧붙이고는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와악,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그레이안의 목을 꼭 끌어안는데, 하얀 솜뭉치가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끼앙!”
마치 ‘어서 가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레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쏜살같은 속도로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칼이 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이러다 에이프릴 떨어지는 거 아니야?!’
―라는 것은 내 기우였다. 미래의 초강자 토끼는 내 어깨 부근에 앉아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었다. ……대단하다.
‘에이프릴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할지도.’
앞으로 에이프릴 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미천한 인간이 감히 에이프릴 님을 놀렸다니…… 죄송합니다.
“컹컹!”
“크르르릉!”
“컹컹컹!”
그리고 그레이안의 등 너머로 개 짖는 소리…… 아니, 늑대 짖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늑대들이 우리를 바짝 쫓아오는 중이었다.
‘저놈들…… 그렇게나 나를 먹고 싶은 건가.’
나는 알고 보니 마성의 식량이었던 건가?
{꺅! 늑대들 쫓아온다!}
{버르장머리 없는 늑대들!}
{그레이안이 때마침 와서 다행이다, 글로리아.}
{난 너희의 아기 만들기 응원할게!}
정신 나간 나비들이 우리 옆에서 빠르게 날며 조잘거렸다. 길을 찾으러 갔던 나비들도 어느샌가 내 곁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세 번 되새긴 후에 이야기했다.
‘난 그레이안이랑 애 안 만들어. 이 남자는 나한테 관심이 1도 없다고!’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글로리아는 눈치가 1도 없구나?}
‘??’
K―인터넷 은어를 빠르게 습득한 나비 한 마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입만 달싹거렸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때 들려온 그레이안의 말에 나는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사실 참을 것도 없었다. 승차감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레이안은…… 좋은 탈것이구나.’
이윽고, 그레이안의 손짓에 따라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