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뜻밖의 삼자대면2022.02.23.
“에이프릴, 왜 그래? 괜찮아?”
나는 재빨리 에이프릴을 품에 안고 애써 달래 주었다. 우리 곁에 서 있던 그레이안도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에이프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에이프릴, 괜찮으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그레이안이 걱정을 담아 조심스럽게 묻자, 에이프릴은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에게 앞발을 뻗었다.
“……?”
그레이안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자신의 두 손으로 에이프릴을 감싸 주었다. 사실 내 손까지 다 감싸 버렸다는 표현이 옳겠지만. 아무튼, 에이프릴은 두 앞발로 그레이안의 옷소매를 꼬옥 잡더니, 강한 호소력이 느껴지는 눈으로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끼잉…….”
“에이프릴…….”
조금 머뭇거리던 에이프릴은 땅으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순식간에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그레이안과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불청객이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공작 각하! 공작 부인! 오셨군요!”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소년, 눈치 챙겨라. 젠장할 제이드 소년 때문에 에이프릴의 ‘숨겨 온 사실을 마침내 밝히려는 극적인 순간!’은 불발되었다. 대신 뜻밖의 삼자대면……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원작 여주, 남주 1, 남주 2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순간…….’
여기서 크나큰 문제점은, 여주가 토끼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에이프릴은 또 토끼로 변해 버렸다……. 제이드가 등장한 순간 에이프릴은 말할 용기를 급격히 잃었는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는데, 이어서 제이드가 로드리를 발견하자 (아마 로드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토끼로 변했다. 낯선 사람인 로드리를 보고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잘은 몰라도…… 로드리가 호랑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쫄보 토끼…….’
원작에서도 쫄보 토끼는 로드리를 조금 무서워했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지만.
“그래서 여기 이 녀석이…… 적호 수인이고, 노예였는데, 공작 부인께서 구해 오셨다……는 말씀인가요?”
제이드가 팔짱을 끼고 서서 로드리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야, ‘이 녀석’이라니……. 걔 너보다 나이 많아!
“저기, 제이드? 로드리는 열다섯이야. 너보다 두 살 더 많지.”
“아하, 그렇군요.”
……할 말은 그것뿐? 이 뻔뻔한 놈 같으니라고.
“공작 부인께서는 이 녀석을 기사 훈련에 참여하게 하고 싶다 하셨지만…… 글쎄요.”
한 손으로 턱을 괸 제이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드리를 노려보았다.
“검을 잡아본 적도, 무술을 익힌 적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녀석이 과연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할 수 있지. 적호이든, 백호이든, 호랑이 수인들은 다 무예가 뛰어난데, 특히 로드리는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가히 불세출의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 원작에서는…… 제이드와 거의 막상막하로 검술을 겨루었던 거로 기억한다. 둘이 싸울 때 로드리의 주된 대사는 “인간치곤 제법이군.”이었고, 제이드의 주된 대사는 “천재인 나와 비등한 실력이라니, 놀랍네.”였다. 둘은 참 많이 싸웠는데, 승패가 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부 무승부였지.’
그렇게 검술은 물론 사랑에 관해서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둘 중 누가 에이프릴과 이어질지 정말 궁금했는데…….
‘원작자의 연중이 안 좋은 시기를 스쳤다.’
하필 결말 직전에 연중을 할 건 뭐람? 아무튼, 개인적으로 에이프릴과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남주는 로드리라고 생각한다. 일단 독자들이 좋아하는 구원 서사(그리고 나락을 곁들인…….)이기도 하고, 인기투표에서도 로드리가 1위였으니까……. 남주 후보 3? 그놈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확실한 점은, 아무도 그놈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거다. 그놈에 비하면 제이드와 로드리는 귀여운 수준이지.
‘남주 후보 3과도 조만간 만나게 될까? 내 개입으로 전개가 바뀌고 있으니까.’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찾아내는 것은 어떨까. 에이프릴이 남주 후보 3의 흥미를 끌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그 이벤트를 가로챈다면……? 그럼 남주 후보 3은 에이프릴이 아닌 나에게 흥미를 느낄 테고―.
‘에이프릴이 아닌 내가 위험해지겠지.’
아, 물론 내가 그 녀석과 로맨스를 찍게 될 가능성은 없다! 난 에이프릴도, 그 녀석의 또래도 아니니까.
‘흐음…….’
생각할수록 괜찮은 계획 같은데……? 내가 좀 위험해지기야 하겠지만, 뭐.
‘에이프릴을 지켜줄 수 있다면야…….’
일단 생각을 정리하고, 목전에 당두한 문제부터 해결해 보도록 할까. 나는 제이드를 지그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로드리가 기사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해보기 전엔 모르지. 어쩌면 너와 막상막하의 검술 실력을 지니게 될 수도 있어. 알다시피, 적호 수인은 무예가 뛰어난 종족이잖아?”
“……!”
제이드의 눈썹이 크게 꿈틀하더니, 로드리를 쏘아보는 금빛 눈이 자못 매서워졌다. 방금 내가 한 말이 제이드의 경쟁심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러네요, 공작 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뭐든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죠.”
그래도 더 고집부리지 않고 빠르게 수긍하는 걸 보면, 대화가 안 통하는 녀석은 아니다. 속이 좀 새카매서 그렇지.
“그럼, 로드리라고 했죠? 제가 기사단 본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 가시죠.”
‘이런 녀석’이라 할 땐 언제고, 제이드는 퍽 정중한 투로 로드리에게 말했다. 자세를 조금 낮춘 걸 보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로드리는 조금 머뭇거리며 내 반응을 살폈다. ……그냥 제이드를 따라가면 되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내 확언을 구하는 것이다. 로드리의 의존성이 깨끗하게 사라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싶었다.
“괜찮으니 따라가 보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공작 부인.”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로드리가 이내 제이드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나를 힐끔거린다. ……보면 볼수록 새끼 고양이 같은 녀석이다. * * *
“에이프릴……. 진짜 안 알려줄 거야?”
그레이안과 나는 에이프릴을 설득하는 데 벌써 스무 번 넘게 실패했다. 에이프릴은 언제 비밀을 실토하려 했냐는 듯 줄곧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소파 위, 푹신한 방석에 앉아 뒷발로 귀를 긁으며 우리 목소리를 계속 못 들은 척했다. 보다 보니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더욱더 궁금해졌다. 에이프릴은 도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끼웅.”
“응?”
“끼우웅, 꾸웅.”
별안간 뒷발로 일어선 에이프릴이 두 앞발로 자신의 배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 제스처가 무슨 뜻인지 나는 쉬이 알아차렸지만, 일부러 모르는 체하며 말했다.
“배탈 났니? 그러게, 너무 고기만 먹는다니까. 야채도 같이 먹어 줘야지.”
“끼앙!”
그게 아니라는 듯 에이프릴이 성을 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엄청 아픈 모양이로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양배추가 들어간 수프만 먹어야겠다!”
“끼야아앙―!”
에이프릴이 답답해 죽겠다는 듯 방석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실실 웃으며 에이프릴의 동그란 몸통을 검지로 콕 찔렀다. 그런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왜……. 뭐……. 너무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에이프릴을 놀렸나 싶어 슬그머니 손을 떼려는데, 에이프릴이 토끼 앞니로 내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헉.”
깜짝 놀라긴 했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냥 살짝 깨문 정도였기 때문이다. 에이프릴은 그 상태로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음……. 그만 놀려야겠군.’
이러다 또 ‘에이프릴과 토끼의 행방불명’을 찍게 될지도 모른다. 이 녀석, 크게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면 어딘가에 숨어 버리니까.
“미안, 에이프릴. 이제 그만 놀릴게.”
“…….”
“진짜야. 약속해.”
그제야 에이프릴이 내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여전히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화는 조금 풀린 듯싶었다. 나는 과장되게 상냥한 목소리로 토끼의 머리와 귀를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배고프다는 뜻이지? 곧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같이 스테이크 먹자.”
“꺄앙.”
“……그런데 있지, 사람 모습으로 먹는 게 어때……?”
“…….”
에이프릴은 불만스럽게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토라진 기색으로 등을 홱 돌렸다.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 * * * 저녁 식후, 그레이안은 에이프릴에 의해 글로리아의 방에서 쫓겨났다.
“…….”
문 앞에서 허망하게 두 손을 떨어트린 그레이안이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 나는 같이 자면 안 되는 거지……. 딱히 외로움을 타본 적 없는데…… 급격히 외로워진 그레이안이었다.
‘그래도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좋았어.’
에이프릴, 글로리아와 함께한 만찬 시간을 떠올리는 그레이안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단란한 가정’이란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그레이안의 아버지, 전대 솔즈베리 공작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식사하려면 늘 완벽한 격식을 갖춘 만찬실에서 긴 테이블 끝에 앉아야 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아버지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정겹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글로리아, 에이프릴과 함께하는 시간은…….
“…….”
잠시 멈춰 선 그레이안이 명치에 손을 올렸다. 따스함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에 금은색 달이 높이 떠 있었다. 그 달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그레이안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영혼의 파동이…… 일치한다고?’
‘그래, 몸과 영혼의 파동이 일치하니 글로리아 공주 본인이 맞아.’
‘그럼…… 그녀는 정말로 기억을 잃은 상태인 건가?’
‘그런 모양이지. 연기라기엔 너무 자연스럽잖아?’
그레이안은 당혹스러웠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나?
‘사실 그런 사례는 은근히 많아. 사람의 인격 형성에 기억은 큰 역할을 하거든.’
‘…….’
‘글로리아 공주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몰라도…… 예전의 성격을 형성했던 기억이 상당수 날아간 게 아닐까.’
……아르윈의 추측은 제법 타당했다. 하지만 그레이안은 글로리아에게 다른 비밀이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늑대의 감이었다.
‘당신이 숨기는 게 뭘까, 글로리아.’
언제쯤이면 나에게 마음을 열고 전부 털어놓을 거지? 조급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자신 있다. 그렇지만…… 다소 감질나는 것도 사실이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수밖에 없겠네.’
그레이안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 * *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둘러보겠네. 여태 안내해 줘서 고맙군.”
근엄하게 말하자 집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무척 소심하기 그지없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자니 집사가 후다닥 도망치듯 멀어져 갔다. 그 겁쟁이 같은 모양새를 보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도대체 언제쯤 나를 덜 무서워하려는지.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뭐, 됐어. 내 이미지야 차차 나아지겠지. 설마 10년 후에도 ‘무시무시한 악녀 글로리아’일 리는…….’
……10년 후라니, 엄청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그때까지 이 세계에서 ‘글로리아’의 몸을 입고 살아갈 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기도 하고……. ‘평범한 직장인을 꿈꾸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로판 악역이 되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소설 하나 써야 할 것 같다. 만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말이지.
‘그럼…… 그 소설에서 남주는 그레이안인가?’
“…….”
갑자기……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그레이안과 내가 로판에서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로맨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