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에이프릴이 두려워하는 것2022.02.19.
“흠.”
잠시 후에 아르윈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어 웃으며 이야기했다.
“공작 부인, 혹시…… 주술적 물건을 몸에 지니고 계십니까?”
“주술적……? 아.”
자연히 에반젤린의 선물에 생각이 닿았다. 애뮬릿이었던가?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내 아르윈에게 보여 주었다.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반젤린 언니가 준 선물인데,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애뮬릿이라더군요.”
나는 그게 사실인지 약간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아르윈은 얼마간 무표정하게 애뮬릿을 응시하더니, 긴 침묵이 불편해질 즈음에야 말을 꺼냈다.
“공작 부인, 이 애뮬릿은 저에게 맡기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어째서요?”
설마 했더니 역시나! 에반젤린이 나를 엿 먹이려고 위험한 물건을 준 건가? 사실은 저주가 걸려 있다든지?
“이 애뮬릿에는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주술 따위 걸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제가 가져가서 검사해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악한 기운…….”
“네, 좋은 의도로 선물한 것 같진 않군요.”
싱긋 미소를 지은 아르윈이 내 손에서 애뮬릿을 슬쩍 가져갔다. 애뮬릿은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곧바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 그리고, 애뮬릿을 만든 주술사가 누구인지 혹시 아십니까?”
“주술사요? 으음…….”
아르윈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답을 내놓았다. 누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그 세이렌이라는 주술사가 애뮬릿을 건네줬었지.
“에반젤린 곁에 세이렌이라는 주술사가 있는데, 아마 그 사람이 만든 걸 거예요. 정확한 건 아니고요…….”
“아하, 그렇군요. 그 주술사에 관해서는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왜냐면 기억이 안 나니까!’라는 의사를 최대한 피력하며 대답했다.
“그 주술사가…… 원래는 내 주술사였던 거 같더라고요. 에반젤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하…….”
“근데 아시다시피, 난 기억에 없어서…….”
“네, 이해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사뭇 정중한 태도로 대꾸한 아르윈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물러나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닥이며 덧붙인다.
“그럼 이만 마차에 오르시지요. 바깥 공기가 많이 찹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그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윈과 보는 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예감은 들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 달칵.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안을 살펴보니,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로드리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니, 이 녀석…….’
왜 이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거야? 추운 겨울날 갈 곳 없이 떠도는 길고양이 같잖아! 나는 로드리의 곁으로 후다닥 다가가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로드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빠르게 깜빡거리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이러고 앉아 있니? 의자에 잘 앉아야지. 쭈그리고 있으면 불편하잖아.”
“…….”
자리에 바르게 앉혀 주는 나를 응시하는 로드리의 눈빛이 묘했다. 제이드만큼이나 속을 알기 어려운 녀석이다. 그래도 제이드보다는 이 녀석이 다루기 더 쉬울 줄 알았는데……. 애정 결핍에 의존증이라는 함정이 있을 줄이야.
“주인님은…… 원래 이렇게 상냥하신가요?”
“으응? 어,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사람들을 대할 때 상냥한 태도가 디폴트여야 악녀 이미지를 청산할 수 있을 테니까……! 크흡, 도대체 언제쯤이면 나쁜 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에게 상냥히 대해 주시는 분은 처음이라서…… 조금 낯설어요…….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작게 미소를 지은 로드리가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김없이 들고야 만 동정심에 가슴이 뭉클해진 나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로드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여태 네가 겪어온 사람들이 이상했던 거야. 솔즈베리 공작성에는 다 좋은 사람들뿐이니까, 앞으로는 너를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거야.”
“…….”
멍하니 나를 응시하던 로드리가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랄까, 자신의 행운에 확신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런 일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아.’ 같은.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야지.”
“네, 공작 부인.”
드디어 호칭을 고치는구나. 나는 한숨을 삼키며 로드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소 착잡한 심경으로.
‘이 녀석, 몸에만 상처가 가득한 게 아닌가 보네. 마음에도 상처가 많아 보여.’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자신을 짐승이나 도구 취급하는 이들에게 학대를 당해 왔으니…….
‘그런데도 끝내 굴복하지 않은 게…… 대견하다고 봐야 할지…….’
못내 안쓰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내 겉옷을 벗어 로드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로드리는 당황한 듯이 입을 달싹이면서 말했다.
“공작 부인, 이건…….”
“로드리, 내 딸이 있지.”
“……예?”
웬 동문서답인가 싶은 기색이 로드리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덤덤하게 계속 말했다.
“아직 12세인데, 음, 곧 13세이긴 하지만. 아무튼, 토끼 수인이거든…….”
“…….”
로드리의 눈동자에 이해의 빛이 스쳤다. 이 소년 역시 토끼 수인들의 비극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적호 수인인 자신과 동병상련의 처지일 테지.
“나는 네가 그 애를 지켜줬으면 해. 노예가 아니라, 기사로서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넌 더는 노예가 아니야, 로드리. 그러니 누굴 주인으로 섬길 필요도, 누굴 구원자로 여길 필요도 없어. 네 삶의 구원자는 너야. 앞으로는 너 스스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렇게 한 명의 어엿한 어른으로 거듭나면, 너는 너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지켜줄 수 있어.”
“…….”
“……크, 크흠! 그, 그러니 기사는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천직일 거야……. 확신해!”
답지 않게 진지한 소리를 하려니 조금 쑥스러웠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것도 같고…….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는지, 로드리 녀석이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으로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이해했습니다.”
“으응.”
“공작 부인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리 진지하게 말하는 로드리의 눈동자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를 향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였다. ……음, 존경심 정도는 괜찮겠지? 숭배와 의존은 아니니까.
‘……좋아, 이걸로 한시름 놨다.’
어쩐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 * *
“방해가 있긴 했지만, 알아냈어.”
“방해?”
아르윈의 말에 그레이안이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두 사람은 글로리아와 로드리가 올라탄 마차 근처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거 말이야. 에반젤린 공주가 준 선물이라던데.”
아르윈이 허공에 애뮬릿을 불러내며 말했다.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 있는 그 물건을 그레이안은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혼의 파동을 볼 수 없게 하는 주술이 걸려 있었어.”
“……!”
그 말에 그레이안이 퍼뜩 고개를 옮겨 아르윈을 쳐다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을 한 아르윈이 자못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누가, 어떤 의도로 그녀의 영혼이 지닌 파동을 숨기려 한 걸까? 에반젤린 공주의 짓인가? 아니면, 그 세이렌이라는 주술사에게 무언가 있나…….”
“……그래서, 영혼의 파동은? 일치해?”
그레이안의 물음에 잠시 멈칫한 아르윈이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안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르윈이 단언했다.
“몸과 영혼의 파동이 정확히 일치해. 지금 그 몸에 있는 영혼은, 글로리아 공주 본인이 맞아.”
* * * 마차를 타고 솔즈베리 성까지 이동하는 내내, 그레이안은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관찰당하는 기니피그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감시인가? 갑자기 그레이안이 나를 왜 감시하려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어서 에이프릴 보고 싶어……!’
보송보송, 말랑말랑한 토끼를 꼬옥 안고 마구 쓰다듬고 싶다! 오직 토끼 테라피만을 생각하며 그레이안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기를 한참. 드디어 솔즈베리 성에 도착했다.
‘아! 불편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내 어깨에 둘러져 있던 그레이안의 겉옷을 벗어 그에게 냉큼 돌려준 다음,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어디선가 토도돗,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끼앙!”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틀기 무섭게, 폴짝 뛰어오른 하얀 솜뭉치가 내 품에 쏙 안겨들었다. 역시나, 토도돗 하는 귀여운 발소리의 주인은 토끼 에이프릴이었다!
‘보송보송해……! 따뜻해!’
나는 토끼를 꼭 끌어안고서 뺨을 비비적거렸다. 원래는 내가 너무 치대면 좋아하지 않는 토끼인데, 오늘은 웬일로 얌전하게 폭 안겨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토끼의 머리와 귀를 쓱쓱 쓰다듬었다. 내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토끼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설마 또 울려는 건가? 눈물이 날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나? ……어쩐지 미안해졌다. 다음부턴 에반젤린이 나를 초대하든 말든 ‘그냥 내가 가기 싫다’며 다 거절해 버려야지. 핑계를 대면 그 핑계를 두고 뭐라 하겠지만, 내가 가기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에반젤린이 내게 적의를 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내가 로드리를 빼앗은 일로 에반젤린은 이미 적의를 품었을 거다. 그러니 더는 눈치 볼 필요 없지. 나는 토끼의 긴 속눈썹과 눈가를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두고 가서 미안해, 에이프릴……. 또 우는 거 아니지? 우리 딸이 울면 엄마가 정말 속상할 거야. 그러니까 울지…….”
“끼양!”
별안간 소리를 빽 내지른 에이프릴이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어, 엄청나게 서러워 보였다. 내가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에이프릴은 서럽게 울었다.
“에, 에이프릴, 내가 다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끄앵!”
“에이프릴이 설마 그렇게나 날 걱정할 줄은 몰랐어…….”
“깽!”
에이프릴이 토끼 앞발을 파닥파닥 휘두르며 울면서 성질을 부렸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입만 달싹이는데,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레이안이었다.
“……에이프릴.”
“……!”
그가 조심스럽게 에이프릴을 부르자, 토끼 귀가 쫑긋하더니 에이프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에게도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아니, 나를 볼 때보다 훨씬 더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거 참, 부녀지간의 골이 깊네…….’
두 사람을 어떻게 하면 화해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데, 그레이안이 다소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아버지로서 많이 부족했지? 미안하다.”
“…….”
“네 마음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지 않으면 잘 모른단다.”
“…….”
“……그렇다고 꼭 말해달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언젠가 네가 털어놓을 결심이 서면, 그때 말해 주렴. ……기다리고 있으마, 에이프릴.”
말을 마친 그레이안이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프릴은 한동안 조용히 그를 응시하기만 하더니, 이내 작은 소리로 울었다.
“끼우웅…….”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용서해 준다’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레이안의 진심이 통했나 본데?’
그때였다.
“앗……!”
내 어깨 위로 냉큼 올라간 에이프릴이 언제 울었냐는 듯 세수를 시작했다. 두 앞발로 쓱싹쓱싹 얼굴을 닦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심장에 해로웠다…….
‘이제 좀 기분이 풀린 건가……?’
뒷발로 귀를 긁는 에이프릴을 소심하게 힐끔거렸다. 한 일주일 삐져 있어도 다 내 탓이려니 하려 했는데. 의외로 에이프릴은 쉽게 화를 풀어주었다.
‘역시 천사 토끼……. 대인배 토끼.’
나는 한 손을 들어 토끼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에이프릴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같이 먹자고 해야겠다. 그러고 잠도 같이 자야지.
“에이프릴, 마음 풀어줘서 고마워.”
“꺗잉.”
“앞으로는 에반젤린이 초대해도 응하지 않을 거야. 나, 에반젤린한테 밉보이고 왔거든…….”
“끼웅……?”
“다음에 가면 에반젤린이 내 차에 독을 타려 할지도―.”
농담조로 말하던 나는 순간 싸한 기분을 느끼고 말을 끊었다. 어깨를 내려다보자, 얼음처럼 굳어 있는 토끼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에, 에이프릴……?”
자못 당황해 입을 달싹이며 에이프릴을 부르자, 토끼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겁먹은 듯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