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애정 결핍 새끼 고양이2022.02.16.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늑대 수인들과 적호 수인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던가?’
그래서 원작에서 에이프릴이 로드리를 막 데려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그때 그 상황을 에이프릴이 어떻게 해결했더라……?’
나는 이마를 짚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해결했다기보단…… 에이프릴을 무척 아끼는 그레이안이 딸의 고집에 못 이겨 한발 물러나 줬었지.
‘젠장. 내가 그거랑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싸늘한 정적이 벌써 10초째 감돌고 있었다. 대대로 원수지간이라던 늑대와 호랑이는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심지어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말이다! 저기요, 안구 건조증 걱정 안 되세요?
‘일단, 무슨 말이든 꺼내야…….’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차였다. 별안간 고개를 푹 숙인 로드리가 자신 없는 기색으로 나를 향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등 뒤에 슬쩍 숨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데, 로드리를 응시하는 그레이안의 한쪽 눈썹이 쓱 치켜 올라갔다. 그런 그레이안을 힐끔거리며 로드리가 자못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
심지어 로드리는 이른바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 있었다……!
‘귀, 귀여워……!’
난데없이 심쿵해 버린 나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흐뭇한 미소를 참았다. 그리고 심호흡하고서 대답했다.
“아니야, 넌 잘못한 거 없어.”
“하지만…… 솔즈베리 공작 각하께서 계속 저를 노려보시는데요…….”
로드리가 울먹이며 그레이안을 힐끔거렸다. 나는 그레이안 쪽으로 슬쩍 옆눈질했다. 과연, 그레이안은 살벌한 미소를 띤 채로 로드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뭐랄까, 저렇게 누굴 경계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만큼 늑대와 호랑이 사이의 골이 깊다는 뜻이겠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까…….’
일단은, 그레이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좋겠다. 로드리가 노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라 해도 동정심이 들지 않으려나……? 나는 큼큼, 헛기침하고서 입을 열었다.
“저…… 공작님?”
“예, 부인.”
내가 말을 걸자, 그레이안은 언제 살벌한 표정이었냐는 듯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한겨울 날씨가 급격히 따뜻해진 듯한 변화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이 적호 수인 소년은 말이죠, 이름은 로드리라고 하는데요. 오늘 아인스턴 왕궁에서 열린 노예 경매에…… 나왔었어요.”
“……!”
그레이안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설핏 찌푸리고서 로드리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구속구는 여기에 오기 전에 제가 풀어 줬고요.”
나는 구속구 해제용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레이안에게 보여 주었다. 구속구는 시계탑에 버리고 왔다. 기사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이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것은 어서 벗어 버리라’며, 미친 사람처럼 굴면서 구속구를 벗겨 버렸으니 아마 의심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글로리아가 선의로 노예의 구속구를 벗겨 주는 그림은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말이지.’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경매에 정말 많은 수인 노예가 나왔었는데…… 그 사람들 전부를 구하긴 힘들어서, 이 소년만이라도 꼭 구해 오고 싶었어요.”
“…….”
“그래서…… 죄송해요. 돈을 심각하게 많이 써 버렸어요.”
나는 소심하게 그레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구체적인 금액을 입에 올렸다. 그레이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다. 화를 내면 어쩌지? 잠시 갈등하던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제, 제가 평생 어떻게든 갚을게요! 그리고 품위 유지비는, 더 안 주셔도 되고요. 삭감해도 괜찮아요. 정말 미안해요…….”
“…….”
그레이안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게 혹시 그건가? 폭풍 전의 고요함? 그레이안이 어떤 식으로 화를 낼지…… 솔직히 말해서 도무지 상상이 안 가지만, 너무 무섭다. 긴장돼서 미칠 거 같아.
“……부인.”
마침내 입을 연 그레이안이 왜인지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나를 보며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다 괜찮다’라는 의미의 미소인 것 같았다.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나를 달래 주었다. 놀란 나머지 멍하니 굳어 있던 나는, 이내 입을 달싹이며 조금 횡설수설했다.
“하, 하지만…… 돈을 너무 많이 썼는데…….”
“별로 큰 금액도 아닙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부인.”
심지어 그레이안은 이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픽 웃기까지 했다. 뭐, 뭐지, 내가 꿈을 꾸나? 환상인가?
“좋은 일을 하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어…….”
설마하니 그가 나를 지지해 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다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레이안.”
“……!”
그 순간, 그레이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나는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았다가, 방금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를 퍼뜩 깨달았다. 그레이안을 이름으로 불러 버렸잖아!
‘으아니! 갑자기 친근하게 굴면 어떡해!’
마음속으로 늘 ‘그레이안’이라고 이름으로 부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나 보다. 돌겠네. 뭐라고 변명하지? 속으로 끙끙대며 고민하는 사이에, 나보다 먼저 그레이안이 말을 꺼냈다.
“네, 글로리아.”
“……!”
“당연히 이해해 드려야지요. 얼마든지요.”
그것도…… 무척 기쁜 듯이 웃으며. 그의 반응이 몹시 뜻밖이었던지라 나는 굳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다정한 거겠지? 습관처럼 말이야.’
요새에는 의외로 잘 꾸며진 응접실이 있었다. 나는 지금 그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쿠키를 씹으며 그레이안을 샅샅이 뜯어보는 중이었다. 로드리의 사정을 알게 된 그는 태도가 대번 변했다.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얼핏 엿보이긴 했으나, 그걸 숨긴 채 의연하게 대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노예가 되기 전의 기억은 없다는 말이지?”
“예. 노예가 된 후로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계속 팔려 다녔습니다.”
나는 그레이안과 로드리의 대화를 들으며 차를 홀짝였다. 로드리의 이야기는 원작과 일치했다. 노예가 되기 전에 사고로 기억을 잃었고, 아는 것은 ‘로드리’라는 자신의 이름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주인이 바뀌었던 까닭은, 아무도 로드리를 길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는 백지 상태였음에도 로드리는 적호 수인의 사나운 본성을 잃지 않았고, 툭하면 주인을 해치려 하는 바람에 심하게 매질을 당한 후 다시 어디론가 팔려가기를 반복해 왔다.
‘그러다 아인스턴 왕궁에서 열린 노예 경매에 다다르게 된 걸 테고…….’
……원작대로라면, 에반젤린이 로드리의 주인이 되었겠지. 그리고 로드리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로드리를 길들이려 했을 것이다.
‘그래봤자 끝까지 길들이지 못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로드리는 남주 후보 2이니까! 말인즉, 로드리에게 특별해질 수 있는 상대는 에이프릴뿐이라는 뜻이다.
‘에반젤린이야 악역 1에 지나지 않는 존재감이지. ……글로리아처럼.’
나는 문득 찻잔을 내리고 붉은 찻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위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글로리아’의 모습.
“…….”
“차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공작 부인.”
“……!”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아르윈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 응접실에 갑자기 나타난 거 같은데? 문 여는 소리가 전혀 안 들렸다고!
“블랙맘바 수인은 기척을 죽이고 아주 은밀히 움직일 수 있죠. 뭐, 방금은 그냥 순간 이동으로 도착한 겁니다만.”
씩 웃은 아르윈이 테이블 위에 새 접시를 내려놓더니, 각종 타르트와 마카롱을 마법으로 소환해 냈다. 달콤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칵 넘어갔다.
“마음껏 드시죠, 공작 부인. 간식은 많습니다. 아, 그리고 그 차는 야생 베리와 히비스커스를 블렌딩한 건데, 마음에 드신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 인간, 나를 간식으로 길들이려는 건가?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와 차를 내어준다고 없던 호감이 갑자기 생길 줄 알고? 천만의 말씀! 나는 아직도 댁의 또라이 같은 면모를 잊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디저트들은 전부 맛있게 먹어 주지. 그리고 차도.
“고마워요, 이 차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에이프릴도 좋아할 것 같고. 우리 토끼……. 잘 있으려나?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와서인지 마음이 영 좋지 않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적호 수인은 꽤 오랜만에 보는군요. 요새는 보기 힘들어졌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아르윈이 로드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로드리도 지지 않고 아르윈과 시선을 마주쳤다. 눈싸움 시즌 2였다…….
‘이놈의 수인들은 왜 이렇게 눈싸움을 좋아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타르트를 열심히 먹어 치웠다. 그리고 로드리에게도 타르트를 건네주었는데, 로드리는 왜인지 화들짝 놀라더니 극구 사양했다. 뭐지? 단 걸 싫어하나?
“주인님을 위한 음식을 제가 먹을 수는 없습니다.”
“…….”
아니, 그 주인님 소리 좀 제발……. 타르트를 꾸역꾸역 씹어 꿀컥 삼킨 나는, 차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로드리, 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니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저를 구해 주셨는걸요.”
로드리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을 보는 고양이의 눈빛이었다.
‘……이 녀석, 설마…….’
에이프릴이 아니라 나를 제 구원자로 여기게 된 건가?
‘맙소사. 이건 좀 귀찮아지겠는데.’
로드리는 애착 대상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역시 이 녀석을 개과천선하게 하려면, 자립심을 길러 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미 오리라도 되는 양 졸졸 쫓아다니려 할 테니까!
‘하아, 문제 많은 사위 후보 놈들 같으니…….’
……이쯤 되니 걱정이 드는데. 남주 후보 3, 제일 문제가 많은 그놈은 어떡하지?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
요새를 떠나는 나와 그레이안을 아르윈이 배웅해 주었다. 로드리는 계속 자신을 관찰하는 아르윈이 부담스러운지, 일찍 마차에 올라 숨어 버렸고.
“다음에 놀러 오실 때는 에이프릴 공녀님도 데리고 오시지요. 공녀님께서 마법 공부를 좋아하시거든요.”
에이프릴이 마법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에이프릴은 전투(물리) 토끼인 줄 알았는데?
‘앗 설마 마검사 토끼를 하려는 건가!’
에이프릴에게 그런 큰 그림이……! 역시 대단한 토끼야. 보통 토끼가 아니지.
“그리고, 공작 부인.”
“……?”
“잠깐 손을 좀 줘 보시겠습니까?”
손은 왜……?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르윈을 쳐다보았다. ‘역시 아인스턴 왕가의 인간은 믿을 수 없다’며 나에게 이상한 마법을 걸려는 건 아니겠지. 24시간 감시 마법이라든가……. 그런 게 실제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건 아니고,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음……. 그래요.”
나는 못내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르윈은 더없이 정중하게 내 손을 감싸 쥐더니,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