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늑대와 호랑이의 만남2022.02.12.
“400만 골드라니! 전례 없던 금액입니다. 씀씀이가 무척 좋으시군요! 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신이 난 경매 관리인이 간신배처럼 굽실거리며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를 따라간 곳은 경매장 근처에 임시로 지어진 간이 천막이었다. 입구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또렷이 빛났다.
“이 녀석이 좀 사나워서 말입니다. 데려가실 때나, 부리실 때나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하하, 네, 공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지요…… 어이쿠!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되는…….”
기겁해 말리는 경매 관리인을 무시하며, 나는 로드리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로드리도 내가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조금 움찔했다.
“상처가 많네.”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로드리의 몸에 난 상처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크게 흉이 진 곳은 없어, 솔즈베리 성에 데려가 치료해 주면 금방 깨끗이 나을 듯싶었다. 뭐, 내가 나비들의 힘으로 치료해 줘도 되고.
“많이 아프지? 조금만 참으렴. 아, 이 구속구도 이따가 풀어줄게.”
내 뒤에서 쩔쩔매는 경매 관리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로드리의 푸석한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로드리는 이상한 것을 보듯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사납고 위험할 것이 분명한 이 녀석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두려움보다는 동정심이 컸다. 에이프릴과 고작 두세 살 차이였던가? 얘도 아직 한참 어린애인데. 어른의 보호가 필요할 나이에 노예로 부려지며 학대까지 당했다니…….
‘가엾어라. 로드리도 그렇고, 경매에 나왔던 다른 수인들도. 실제로는 더 많은 수인이 고통받고 있겠지? 아인스턴 왕국은 정말 윗물부터 썩은 나라로구나.’
자고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부터가 비인도적인 행위를 일삼으니 나라 꼴이 막장인 거겠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런 막장 나라들은 조만간 망하게 된다.
‘그런 걸 두고 업보라고 하지.’
로드리와 눈높이를 맞추느라 잠시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자, 경매 관리인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소년을 데려갈 테니 준비해 주게.”
“아…… 네네! 이, 일꾼들을 부르겠습니다!”
잠시 후 우르르 몰려온 일꾼들이 로드리를 거칠게 제압해 철로 만든 우리 안에 넣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기막힌 나머지 두통까지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야말로 짐승 취급이 따로 없구나.
“다들 그만.”
우리 근처로 다가간 내가 일꾼들에게 명령하자, 모두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로드리를 바라보았다. 로드리는 여전히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소년을 우리에서 꺼내 주게. 내가 직접 데리고 갈 터이니.”
“예? 하지만…… 이 녀석은…….”
“어디서 말대꾸야? 내 말이 우스워?”
“아, 아닙니다!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악녀 글로리아의 이미지는 이럴 때 효과 만점이었다. 일꾼들은 내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눈치로 서둘러 로드리를 우리에서 꺼내 주었다. 일꾼들에게 등 떠밀린 로드리가 슬그머니 내 앞에 섰다. 주위의 사람들 모두가 이 소년을 마치 시한폭탄인 양 불안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로드리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부터 엘로윈 왕국의 솔즈베리 성으로 갈 거야. 어딘지는 너도 알지?”
수인들의 왕국, 엘로윈의 공작 가문인 솔즈베리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리라. 나를 흘끗 본 로드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로드리의 구속구와 연결된 목줄……을 잡았다.
‘이게 뭐람…….’
시각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은 손을 잡고 싶었지만, 글로리아답지 않은 행동이기에 이목을 끌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글로리아답지 않은 행동의 연속이지만…… 아직까지는 ‘저 수인 노예가 그만큼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정도로 여겨질 터였다.
‘하지만 글로리아가 수인 노예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 이건 말도 안 되지.’
따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로드리의 목줄을 쥐고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 걸어갔다. 얼마 후 도착해 보니, 나를 호위하기로 한 기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런데 다른 불청객도 함께였다.
“늦었구나, 글로리아.”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었다.
“아까부터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 저 노예, 정말로 네가 데려갈 생각이니?”
에반젤린이 턱짓으로 로드리를 가리켰다. 이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과연 예상대로였다. 갖고 싶은 걸 쉽게 포기하면 에반젤린 아인스턴이 아니지.
“당연히 제가 데려가야죠, 언니. 제가 낙찰받았잖아요?”
나는 에반젤린의 질문 자체가 이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반젤린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적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나무랐다.
“글로리아, 네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잊었니? 네 남편에게 저 노예를 뭐라고 설명할 생각인데?”
엘로윈 왕국은 노예 제도가 불법이고, 더군다나 수인들의 나라이니 인간이 수인을 학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니 옳은 지적일 테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반젤린이 그 점을 지적하니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해요. 언니가 참견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뭐? 너……!”
에반젤린이 나에게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차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무시하기 힘든 위엄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멈칫한 에반젤린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나 역시 자세를 반듯이 하고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왕 폐하.”
아인스턴의 국왕, 라니에로 아인스턴이 뜻밖에 이 자리에 나타났다. ……아마 지나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국왕이 내놓은 자식인 글로리아를 보겠답시고 몸소 행차했을 리 만무하니.
“글로리아, 네가 아인스턴 왕궁에는 무슨 일로 왔지?”
이것 봐라. 출가한 딸이 간만에 친정에 왔는데도 일말의 관심조차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신다. 아인스턴 왕가는 막장이고, 가부장인 라니에로 아인스턴부터가 최고로 막장이다. 그는 황금을 조각해 만든 신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였지만, 몹시 잔인하고 매정한 성품을 지녔다. 그가 후궁과 애첩을 여럿 들여 수많은 왕자와 왕녀를 태어나게 한 것도, 자식들이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투길 원해서였다. 그러다 죽거나 불구가 되는 자식이 나와도 그는 눈곱만큼도 개의치 않았다. 강자 생존, 약육강식, 그것이야말로 그가 최고로 사는 가치였으며, 세상의 진리였으므로. 싸움에서 밀려나 쓸모 없어진 자식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러니까, 바로 글로리아처럼.
“에반젤린 언니가 저를 가든 파티에 초대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막 떠나려던 참이에요. 오랜만에 존안을 뵙게 되어 한없이 영광입니다, 부왕 폐하.”
국왕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내 옆의 에반젤린을 흘끗 일별하곤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넌 가끔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구나, 에반젤린.”
“……! 죄, 죄송합니다, 부왕 폐하.”
에반젤린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고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왕자와 왕녀들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국왕 앞에선 조무래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건 부왕의 뒤편에 멀찍이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저 둘도 마찬가지였다. 레위스와 벨제. 둘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로 각각 왕위 계승 서열 1위, 3위였다. 레위스는 글로리아를 무시하고, 벨제는 글로리아를 싫어한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저 둘에게 사근사근 대하며 비위를 맞춰 주려 노력했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 나는 안 할 거지만.
“그럼 어서 가 보거라, 글로리아.”
“네, 부왕 폐하.”
무신경하게 말하는 국왕을 향해 묵례하며 대꾸한 나는, 로드리를 데리고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국왕은 로드리에게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냥 수인 노예겠거니, 하는 듯싶었다.
‘잘 됐지. 로드리가 국왕의 관심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어.’
얘가 적호 수인이라는 것을 국왕에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에반젤린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에반젤린……. 로드리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은데……. 나중에 또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는걸.’
얼마 안 있어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양옆에서 마차를 호위했고,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국왕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러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지만. 아인스턴 왕국의 수도, 웨일스를 달리는 마차 안. 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로드리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쟤는…… 왜 저렇게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지…….’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듯싶은데. 고민하던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저기, 로드리?”
“네, 주인님.”
주인님이라니, 나는 기겁해 입을 딱 벌렸다. 로드리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돌겠네. 얘는 얼마나 노예로 지내왔던 거지? 상식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건 아니겠지?
“로드리,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그냥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를 소유하셨으니, 당신은 제 주인님이십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미래의 사위일지도 모를 소년에게 주인님이라 불리는 심정을 서술하시오(10점).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로드리, 넌 이제 노예가 아니야.”
“……?”
로드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꼭, 뭐랄까……. 궁금한 게 많은 새끼 고양이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는 고양잇과 동물이지. 이 녀석도 넓은 의미로 고양이다.
“내가 널 사긴 했지만, 그건 그 사람들에게서 널 구해주기 위해서였어.”
“구해주기…… 위해서라고요?”
나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족에 불과한 친절이라거나, 위선이라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수인을 학대하는 악녀 글로리아였으니까.
“앞으로, 너를 내 딸의 호위로 임명할까 해. 아! 곧바로는 아니야. 일단 네가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 시험을 치러야 해. 기사단에 들어가고 나면, 훈련도 받아야 할 테고.”
……이렇게 되면 예상보다 일찍 제이드와 로드리의 첫 만남이 성사되는군.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상상이 안 가는데. 어찌 됐든, 에이프릴의 호위를 맡긴다면 제이드보다는 로드리가 더 믿음직했다. ……물론 내가 이 녀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바꿔놓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원작에서처럼 새카만 집착의 싹이 보인다면, 에이프릴의 호위로는 탈락이었다.
“……왜, 저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그리 묻는 로드리는 자못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볼을 살짝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음……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차마 ‘네가 내 딸의 신랑 후보 중 하나라서.’라고는 말 못 하지. 그리고, 뭐…… 그 경매장에서 로드리를 구해 주고 싶었던 건 사실이니까.
‘마음 같아선…… 오늘 목격한 수인 노예들 모두를 구해주고 싶었는데.’
나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게, 아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앞으로의 목표는…… 모든 수인 노예를 구할 순 없어도, 최대한 많은 수인 노예를 구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언젠가, 이 세상에 노예 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 *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게이트를 이용했다. 다만 이번에는 로드리가 함께였다. 둘이 나란히 서서 기다리자, 예의 총천연색 풍경이 펼쳐지더니 머지않아 장소가 바뀌었다. 솔즈베리 공작령의 국경 요새, 게이트 감시실. 바로 정면에 그레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인, 오셨군요.”
담백하게 인사를 건네온 그레이안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그 손을 잡자, 그레이안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의 등 뒤로 마구 흔들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안의 늑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레이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왜인지 뺨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머리 위에서 그레이안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든 파티는 즐거우셨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 지루했습니다. 부인이 옆에 안 계시니…….”
이, 이 남자가 또. 내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을 마구마구 하고! 아주 모든 언행이 유죄라니까! 물론 저 잘생긴 얼굴로 웃는 거야말로 가장 유죄이지만……!
“가든 파티는 별로 재미없었어요.”
“그러셨군요. 혹시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아, 안 보고 싶었는데요.”
“부인, 눈은 왜 피하십니까.”
“내가 언제요? 일단 이 손 좀 놔 봐요. 할 얘기가…….”
돈을 엄청나게 많이 쓰고 말았다고 이실직고해야 하는데! 그레이안이 이렇게 다정하게 구니까 죄책감이 배가 된다……! 그나저나, 로드리는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의식중에 로드리를 돌아본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를 반쯤 끌어안고 있던 그레이안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로드리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게이트의 원 안에서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그레이안을 힐끔거렸다. 로드리를 쏘아보는 그의 눈빛은…… 전에 본 적 없이 서늘했다. 그레이안의 경계심 어린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부인, 이 녀석은…… 적호 수인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