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이 경매는 내 승리야 (20/144)

20화. 이 경매는 내 승리야2022.02.09.

16550636576242.jpg

  얼마 후, 에반젤린의 시종들이 파티장에 수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16550636576299.jpg“수인 노예들을 데려왔습니다!”

시종 하나가 씩씩하게 고하자, 에반젤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파티의 손님들은 이 순간을 고대해 왔던 것처럼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웃고 떠들었다. 내 눈에는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16550636576299.jpg“어디 보자……. 음? 왜 늑대 수인은 없지?”

16550636576299.jpg“아, 그게…… 그 녀석은 새벽에 급사했다고 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었다고…….”

에반젤린의 물음에 시종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에반젤린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비음을 흘리더니,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16550636576299.jpg“흠……. 그럼 어쩔 수 없지. 수인 노예야 많으니 별로 아깝진 않은데, 내 불쌍한 동생에게 즐길 기회를 주지 못해 안타깝네.”

에반젤린이 나를 스윽 돌아보았다. 점점 표정이 굳어 가던 나는 그 순간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에반젤린은 짐짓 미안해하는 투로 말했다.

16550636576299.jpg“미안하구나, 글로리아. 너를 괜히 기대하게 했네. 대신 다른 노예들이 있으니 마음껏 즐기다 가렴.”

1655063657632.jpg“전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이런 상황에서도 내 연기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천진한 내 대답에 에반젤린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님들을 둘러보며 소리 높여 고했다.

16550636576299.jpg“그럼, 여러분? 여기 이 수인 노예들은 얼마든지 망가져도 상관없으니 마음껏 즐기세요.”

그러자 파티의 손님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다들 미친 것 같았다. 이윽고 본격적으로 ‘놀이’가 시작되자, 손님들은 수인 노예들을 괴롭히거나 짐승처럼 부렸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1655063657632.jpg‘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수인이 괴물이라고?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야말로 괴물이야.’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에반젤린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16550636576299.jpg“왜 그러니, 글로리아? 너도 좋아하는 놀이잖니.”

1655063657632.jpg“…….”

이제는 에반젤린의 얼굴만 봐도 역겨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녀도, 이 파티의 손님들도, 아인스턴 왕국도, 전부 겉만 화려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잠시 심호흡한 나는 약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태가 좋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1655063657632.jpg“속이 안 좋고 머리가 어지러워요. 아무래도 저는 조금만 즐기다 돌아가 봐야겠어요.”

16550636576299.jpg“어머, 그러니? 그럼 하는 수 없지.”

1655063657632.jpg“네, 언니……. 아, 이런.”

나는 채찍을 풀어내는 동작을 하며 일부러 테이블을 넘어뜨렸다. 값비싼 도자기와 레이스가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그 꼴을 보고 에반젤린은 혀를 차더니 살짝 나무라는 투로 종용했다.

16550636576299.jpg“정말 어지러운가 보네. 넌 어서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

1655063657632.jpg“네, 아무래도 그래야…… 에취!”

이번에는 크게 재채기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팔을 움직인 척했으니 고의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뭐, 고의로 보였어도 상관없고. 채찍에 맞은 테이블 두어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나를 보는 에반젤린의 표정이 자못 험악해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1655063657632.jpg“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16550636576299.jpg“……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에반젤린의 눈빛이 심상치 않으니, 이쯤에서 관둬야 할 듯싶다. 마음 같아선 이 파티장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지만.

1655063657632.jpg‘천벌이나 받아라. 나쁜 놈들.’

나는 속으로 에반젤린과 다른 사람들을 욕하며 채찍을 바닥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짐짓 어지러운 체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한편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16550636576299.jpg“여러분!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웰링턴 백작 부인께서 수인 노예 경매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어서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1655063657632.jpg‘……수인 노예 경매?’

그 순간, 원작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에이프릴은 변장을 하고 아인스턴 왕국에서 열리는 노예 경매에 참석했다. 오늘 이 경매에 토끼 수인이 나올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토끼 수인…… 어쩌면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경매에 나온 수인 노예는 다름 아닌 남주 후보 2였고, 에이프릴은 최고가를 불러 그를 낙찰받아 간다.

1655063657632.jpg‘그렇게 해서 남주 후보 2와 에이프릴의 로맨스가 시작되지.’

남주 후보 2는 자신의 구원자인 에이프릴에게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감정이 변질되어…… 결국……!

1655063657632.jpg‘크흠……!’

이다음은 말하기 민망한 내용이라 생략한다. 아무튼, 그 남주 후보 2의 원래 주인이 바로 에반젤린이었다. 아무리 학대해도 길들일 수 없는 남주 후보 2 때문에 신경질이 난 에반젤린이 홧김에 그를 경매에 던져 놓은 거였는데…….

1655063657632.jpg‘그걸 에이프릴이 홀랑 낙찰받아 간 거지.’

그래서 에반젤린과의 갈등도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에반젤린이 남주 후보 2에게 유달리 심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1655063657632.jpg‘에반젤린 소유의 노예 중에 아직 남주 후보 2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에반젤린이 남주 후보 2를 처음으로 들이게 되는 날이 오늘인가?’

그렇다면, 저 벨링턴 백작 부인인가 뭔가가 여는 경매에 남주 후보 2가 등장할 확률이 높다는 말씀.

1655063657632.jpg‘흠…….’

잠시 고민하던 나는, 혹시 모르니 확인이라도 할 겸 경매에 참석하기로 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지, 뭐.

16550636576299.jpg“글로리아, 넌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가 보겠다고 하지 않았니?”

경매장에 착석해 있자니 에반젤린이 시비를 걸어왔다. 내가 채찍을 휘둘러 테이블을 몇 개 쓰러트린 일로 불만을 품은 게 틀림없었다. 쪼잔하긴.

1655063657632.jpg“제가 수인 노예 경매를 즐긴다는 거, 언니도 아시잖아요? 그냥 지나치긴 좀 아쉬워서요.”

16550636576299.jpg“하지만 네가 수인 노예를 낙찰받아 봐야…… 후, 아니다, 됐다.”

에반젤린은 나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뭐, 그러시든지. 나는 경매 참가자를 위해 나온 샴페인을 홀짝이며 어서 경매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샴페인 잔을 반쯤 비워 갈 때쯤, 마침내 경매가 시작되었다. 처음 소개된 노예는 놀랍게도 흰돌고래 수인이었다.

16550636576299.jpg“흔치 않은 상품이죠! 흰돌고래 수인은 개체 수가 적으니까요! 전설 속의 인어와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으니, 커다란 수조에 넣고 키우면 실내를 멋지게 장식할 수 있습니다!”

미친 소리였다. 하지만 이곳에선 일반적인지,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앞다퉈 흰돌고래 수인을 낙찰받으려 했다. 그야말로 광기의 현장이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온갖 희귀한 수인들이 경매에 나왔고, 참가자들은 열성적으로 입찰가를 불러댔다.

1655063657632.jpg‘하…….’

숫자판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모든 경매에 최고가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1655063657632.jpg‘……참자. 이 경매에 나온 모든 수인을 다 구하는 건 불가능해.’

모든 수인을 다 낙찰받으려 했다간, 내 돈줄인 솔즈베리 가문이 휘청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딱 한 명. 남주 후보 2가 등장한다면, 녀석을 낙찰받아 갈 생각이었다.

1655063657632.jpg‘마음 같아선 저 수인들을 다 구해주고 싶지만…….’

경매를 지켜보면 볼수록 점점 끔찍한 기분이 되어 갔다. 어떻게 사람을 사고팔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1655063657632.jpg‘토할 것 같아……. 조금만 더 버텨야…….’

견디다 못해 한계가 오려던 차였다. 갑자기 조명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사회자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36576299.jpg“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상품입니다.”

1655063657632.jpg“……!”

그 순간 느낌이 왔다. 정말로 이 경매에 남주 후보 2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예감이었다.

16550636576299.jpg“아주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녀석이죠. 아직 어린 개체입니다만, 길들이기 만만치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이야말로 정복감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죠! 자, 소개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상품! 적호(赤虎) 수인입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무대의 조명이 화악 밝아졌다. 눈부신 빛이 내리비치는 무대 한가운데,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너덜너덜한 몰골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년의 몸은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가득했다. 한동안 아무런 미동도 없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객석을 노려보자, 여기저기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게, 소년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적색이었기 때문이다. 그 붉은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이 예사롭지 않았다.

16550636638653.jpg

16550636576299.jpg“진짜 적호 수인인가 봐!”

16550636576299.jpg“장난 아닌데……?”

16550636576299.jpg“적호 수인은 이제 세상에 몇 마리 없다고 들었는데!”

16550636576299.jpg“희귀한 수인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지. 저 녀석은 내가 사겠어!”

16550636576299.jpg“아니야! 내 거야!”

어김없이 입찰을 다투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로 나올 줄이야.

1655063657632.jpg‘저 녀석…… 시기상으로 지금 몇 살이지? 14세? 아니, 15세인가?’

놀란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었다. 황혼을 닮은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적호 수인. 믿기지 않지만, 틀림없는 그 녀석이었다. 남주 후보 2, 로드리! 원작에서 로드리의 키워드는 맹목적인 숭배, 순애, 광기, 그리고 집착이었다. 그래서…… 인기가 제일 많은 캐릭터였지.

1655063657632.jpg‘독자들은 집착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심지어 순애와 광기의 조합? 이건 못 참는다. 안 보고는 버틸 수 없지.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 인기몰이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로드리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제이드를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감개무량했다.

16550636576299.jpg“100만 골드!”

누군가 숫자판을 번쩍 들고 미친 금액을 불렀다. 100만 골드라니. 여태 나온 수인 노예들의 평균 낙찰가가 10만~30만 골드인 것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입찰가였다.

1655063657632.jpg‘누구지? ……헉, 에반젤린이잖아!’

고개를 빼들고 확인해 보니, 100만 골드를 부른 미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었다. 이거 완전히…… 원작대로 가는구나. 이 경매에서 에반젤린이 로드리를 낙찰받게 되는 거였어!

1655063657632.jpg‘그리고 데려가서 무진장 괴롭히고 학대하겠지……. 으으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에반젤린의 학대는 로드리가 비뚤어진 성격이 되는 데 크게 일조한다. 그 악영향이 훗날 에이프릴에게도 미치게 되는 거고.

1655063657632.jpg‘이러고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나도 입찰한다. 가보자고.’

에반젤린과 척을 치는 한이 있어도 로드리는 내가 데려가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 에이프릴의 앞날에 꽃길을 깔아줄 수 있고, 또…….

1655063657632.jpg‘다른 수인들은 구하지 못했으니, 저 녀석이라도 구해야 해.’

조금 울컥하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젠가는 모든 수인 노예를 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장난 아니게 권세가 드높고 돈도 많아야겠지.

1655063657632.jpg‘사업이라도 해야 할까 봐.’

나는 여주인공들이 사업에 성공하는 로판 클리셰를 떠올리며 숫자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에반젤린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자못 날카로웠다. 쪼, 쫄지 말자. 나는 욕심만 많고 용감함이라곤 쥐뿔도 없는 글로리아가 아니라고!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1655063657632.jpg“200만 골드!”

에반젤린이 부른 100만 골드를 훨씬 웃도는 가격. 당연히, 경매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16550636576299.jpg“이, 이백만 골드?”

16550636576299.jpg“누구야?”

16550636576299.jpg“헉……? 글로리아 공주?”

16550636576299.jpg“수인이랑 결혼했다며? 그런데 수인 노예를 왜 데려가려 해?”

전부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래, 맘대로 떠들어대라지. 어차피, 내가 싸워서 승리해야 할 상대는 단 한 명뿐이다. 에반젤린. 그녀는 두 눈에 독기를 품고 나를 노려보더니, 재차 숫자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16550636576299.jpg“300만 골드!”

여기저기서 경악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수인 노예 한 명에 300만 골드, 전례 없던 일이었다.

16550636576299.jpg“사, 삼백만 골드라니…….”

16550636576299.jpg“에반젤린 공주님……. 진심이신가……?”

16550636576299.jpg“300만 골드면…… 세상에, 웨일스에 고급 저택이 3채인데.”

아인스턴 왕국의 수도, 웨일스의 고급 저택……. 한국의 수도권 집값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도 고민이 깊어졌다. 설마 에반젤린이 300만까지 부를 줄은 몰랐는데…….

1655063657632.jpg‘……돌겠네. 그레이안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솔즈베리 공작 부인으로서 내 1년 품위 유지비가 300만이었다. 만일 내가 400만을 부르게 되면, 100만 정도는 그레이안에게 빚을 지는 셈이다. 부부 사이에 무슨 빚인가 싶지만…… 기분이 그렇단 말이지.

1655063657632.jpg‘글로리아가 지참금으로 들고 온 돈이 250만 정도였던가? 일국의 왕녀에게 주어진 결혼 자금치고는 너무 적은 금액이지.’

그중에 100만을 그레이안에게 주고 나면, 150만이 남는군. 음, 나쁘지 않아. 뭐 어때.

1655063657632.jpg‘제발 400만 골드에 낙찰받길 기도하자. 에반젤린, 제발 꺼져. 그만 입찰해!’

나는 다시 숫자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1655063657632.jpg“400만 골드!”

경매장에 폭탄을 던졌다.

16550636576299.jpg“사…… 사백만 골드 나왔습니다! 카운트다운 하겠습니다! 10, 9, 8, 7…….”

입술을 물어뜯으며 이쪽을 노려보는 에반젤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승리를 예감한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16550636576299.jpg“……3, 2, 1! 400만 골드! 낙찰되었습니다!”

에반젤린과의 피 터지는 경쟁 끝에, 남주 후보 2, 로드리는 내가 데려가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