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괴물은 누구?2022.02.05.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르윈은 그레이안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늘 그래왔듯이.
“일단 이 머리카락에 담긴 정보를 분석해야겠네. 이거 가져간다?”
“아, 그래…….”
아르윈이 글로리아의 금빛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집어 들자, 그레이안은 조금 아까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꼴을 보고 아르윈은 또 어김없이 기가 막혔다. 아깝다니, 이 머리카락 한 가닥이?
‘저 자식, 이미 중증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아르윈이 글로리아의 머리카락을 플라스크 안에 넣었다. 분석에 걸리는 시간은 사십 분 정도.
‘그다음으로는, 영혼의 파동을 읽어낼 마법을 준비해야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청나게 까다롭고 복잡한 마법이다. 벌써 귀찮아진 아르윈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내가 저 꼬마 늑대의 호기심을 채워 주자고 이런 성가신 일을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지. 저 녀석 아버지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으니…….’
한숨을 푹 내쉰 아르윈이 그리모어를 펼쳐 들었다. 천 년의 지식이 담긴 마법서가 허공을 부유하며 오묘한 빛을 내뿜었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페이지에는 오직 아르윈만 읽을 수 있는 암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도 조금 궁금하니까.’
글로리아 공주가 정말로 기억 상실증인지…… 아니면, 그레이안의 추측대로 영혼이 바뀐 것인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금 글로리아 공주의 몸 안에 든 게 정말로 포식자라면…….’
여태 그 실체가 확인된 바 없는 전설 속의 존재. 그 괴물이 정말로 실재한다면…….
‘글로리아 공주의 몸 안에서 뽑아내야 할 테지.’
그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타날 수 없도록,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재앙을 불러오는 괴물이니까.
* * *
“이쪽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왕궁에 도착하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나를 안내해 주었다. 나는 시종을 따라 걸으며 왕궁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철 푸른 상록수가 곱게 다듬어진 모양새로 정원을 꾸미고 있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분수대와 수로가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도 물이 얼어붙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아마 마법으로 가능한 일이겠지.
‘아인스턴 왕국은 마법이 크게 발전했다더니, 정말이로구나.’
왕궁의 건물들은 당연히 매우 호화롭고 아름다웠다. 외관만 해도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해 놓았으니, 아인스턴 왕국이 얼마나 부유한지 알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한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는 생소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생소함은 ‘나’의 것이고, 익숙함은 ‘글로리아’의 것이었다. 역시…… 원래 몸 주인인 글로리아의 기억이나 감정 같은 것이 내게도 흘러들어오는 게 틀림없었다.
‘점점 글로리아와 동화되어 가는 건가? 그건…… 싫은데.’
성격도 글로리아와 닮아 가는 건 아니겠지? 글로리아 같은 개차반이 되고 싶진 않은데! 앞으로 내 자아를 잘 유지해야 할 듯싶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나는 오늘의 가든 파티가 열리는 정원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이 정원은 봄 날씨처럼 따뜻했고, 장미꽃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어라? 저기 저분은…….”
“엘로윈 왕국의 솔즈베리 공작과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그 늑대 수인 말인가요? 야만스럽고 포악하다던.”
‘……?’
순간 멈칫한 나는 이내 그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레이안이 야만스럽고 포악하다고? 뭔 헛소리야? 나와 눈이 마주친 귀부인은 조금 움찔하더니, 부채를 좌르륵 펼쳐들고 딴청을 피웠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어…….’
아인스턴 왕국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수인을 싫어한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나는 그들을 한번 노려봐 준 후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파티 주최자를 찾아가 인사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드디어 왔구나? 꽤 오랜만에 얼굴 보네, 글로리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이 파티의 주인인 에반젤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에반젤린은 왕궁에서 제법 높은 위치였다.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워낙 막강하긴 하지만, 에반젤린도 그에 못지않은 세력을 지닌 왕족이었다. 그리고 이 가든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 모두가 에반젤린의 세력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게 호의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들과 얘기라도 나누지, 왜 쭈뼛거리고 서 있기만 하니? 자, 이리로 오렴.”
에반젤린이 나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나는 예의상 웃어 보였지만, 내심 에반젤린을 욕할 따름이었다. 이 파티장에 내가 대화를 틀 만한 상대가 있긴 해? 다 네 추종자들이잖아!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초췌해졌니? 드레스도…… 그건 네 취향이 아닌 것 같은데.”
‘네 꼴 후지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 완곡하게 하다니. 과연 사교계의 퀸 하이에나다웠다. 그리고 내 드레스가 뭐 어때서?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옷차림이 너무 요란한 거라고.
“그러는 언니는 평소보다 덜 화려하시네요. 장식을 좀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 당연히 노리고 한 말이었다. 저기서 더 화려해지려면 머리에 공작 깃털을 다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아주 우스꽝스러워지겠지. 광대가 따로 없으리라.
“……흠, 그런가?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
그런데 에반젤린은 내 의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니, 왜……? 나는 에반젤린이 안내해 준 자리에 멍하니 착석했다. 에반젤린은 시녀를 불러 무엇인가 지시하더니, 원래보다 더 알이 큰 다이아몬드 귀걸이로 바꿔 걸고 나타났다. ……괜찮은 건가? 귓불 찢어질 거 같은데.
“네가 다른 건 몰라도 안목 하나는 좋은 편이지. 자, 어때? 이제 좀 더 화려해졌지?”
“…….”
아무래도 에반젤린은 상대적으로 수수한 차림새를 한 나에게 자신의 화려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닌 ‘글로리아’였더라면 저런 에반젤린을 몹시 질투했을 것이다. 글로리아도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취향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지. 지금 여러분 모습은…… 무대 위의 광대 같다고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정말 화려하네요, 언니.”
“후후. 너도 좀 꾸미고 오지, 그게 뭐니?”
에반젤린은 내 어색한 미소가 자신을 부러워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뭐,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나는 약간 해탈한 기분으로 내 앞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에 독이 들어 있지는 않겠지?
“아, 그렇지, 세이렌?”
그때, 에반젤린이 멀리 서 있던 누군가를 불렀다. 이윽고 테이블 근처에 다다른 그 사람은…… 특이하게도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 파티의 손님으로도, 에반젤린의 시녀로도 보이지 않았다.
‘저게 누구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에게서는 매우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에반젤린이 귀엣말로 무어라 속삭이자, 그 ‘세이렌’이라는 사람이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에반젤린에게 건넸다. 그건 검은색의 작은 상자였다. 예의 ‘세이렌’이 물러간 후, 에반젤린이 그 상자를 나에게 건넸다. 선심 쓰듯 웃으며.
“내 선물이야. 별건 아니고,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애뮬릿이지.”
“아……. 감사해요, 언니.”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것을 일단 받아들었다. 거절하기에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감사하긴. 나야말로 너에게 고맙지. 네가 세이렌을 왕궁에 두고 간 덕분에 내 주술사로 잘 쓰고 있잖니.”
‘……주술사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가뭄이 들었던 마을의 주민들이 글로리아의 주술사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그 주술사가…… 저 세이렌이라는 사람인가?
“세이렌은 참 쓸모가 많아. 네가 늘 데리고 다니며 아낀 이유를 알 것 같다니까? 후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네가 세이렌의 힘으로 가뭄에 들게 한 마을에 갔었다지?”
차를 한 모금 마신 에반젤린이 기어코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 얘기를 왜 안 하나 했지. 세이렌에 대한 묘한 감상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며 대답했다.
“네, 그런 일이 있었죠. 생각해 보니 제가 조금 심했던 것 같아서요.”
“네가 그런 생각도 다 하고 별일이구나. 아무튼, 그 마을에서 네가 나비의 형상을 한 정령들을 불러냈다는 게 사실이니?”
그 질문을 하는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척 봐도 좋은 의미로 캐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시치미를 뗐다.
“나비의 형상을 한 정령……? 그게 뭔가요?”
“…….”
일부러 멍청한 표정까지 지어 주자, 에반젤린이 눈썹을 설핏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에반젤린은 글로리아의 멍청함을 극도로 경멸하곤 했으니.
“네가 그 마을에서 정령을 소환했다는 소문이 파다해.”
“네? 제가요?”
나는 정말로 황당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에반젤린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는 듯, 눈가를 쓱 닦은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언니, 제가 정령과 계약했을 리 없잖아요! 물론 저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래? 그럼 마을에 나타났다는 그 정령들에 대해선? 무언가 아는 바가 있니?”
에반젤린이 나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리라. 나는 글로리아의 원래 말투를 떠올리면서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다만 그 당시에 솔즈베리 공작도 동행했었거든요. 아마 그가 거느린 사람 중에 정령사가 있나 보죠.”
나는 ‘알 게 뭐람.’ 하는 뉘앙스로 코웃음을 치며 쿠키를 하나 집어먹었다. 원작의 글로리아와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연기였다! 대단해, 나 자신!
“솔즈베리 공작은 네 남편이잖니? 그런데 무슨 남처럼 이야기하는구나. 그가 거느린 사람 중에 정령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에반젤린이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이쯤에서 울컥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나는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과 저는 진짜 부부가 아니에요. 얼마 후면 이혼할 사이이니 남이나 다름없죠.”
“……그래?”
“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수인을 지극히 혐오하는 거.”
소름 끼친다는 듯이 어깨도 떨어 주었지만, 이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니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나는 수인을 싫어하지도 않고, 그레이안은…… 무척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수인을 싫어하는 거야 알지. 우리 다 그렇잖니? 수인은 노예 계급에나 어울려. 동물과 섞인 괴물 주제에 인간처럼 살려 하다니, 우습지.”
‘아니, 수인은 동물과 섞인 게 아니라 인간이 동물의 모습을 하게 된 건데…….’
그것이 정설이지만, 아인스턴 왕국의 사람들 대다수가 ‘수인은 동물과 섞인 괴물’이라는 억설을 믿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 이 에반젤린이야말로…… 수인 노예를 끔찍하게 학대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인사였다.
“마을에 나타난 정령들은 확실히 너와는 연관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말렴.”
싱긋 웃은 에반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쳤다. 그러자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시종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에반젤린은 나긋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수인 노예들을 데려와. 오늘 이 파티의 유흥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들여온 늑대 수인도 있지? 내 동생이 늑대 무리에서 지내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기분을 풀게 해 줘야지.”
에반젤린이 나를 돌아보며 선심을 베풀듯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지만, 지옥에서 영혼을 고문하는 악마처럼 잔인한 미소였다.
“오늘은 마음껏 즐기다 가렴, 글로리아.”
에반젤린이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채찍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가시가 박힌 채찍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