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스며들고 있어2022.02.02.
나는 살면서 타인과 포옹 이상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 물론, 어렸을 때 부모님께 뽀뽀하거나 뽀뽀를 받은 적은 있지! 하지만 가족이 아닌 남과 긴밀한 접촉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고 긴 속눈썹이 아주 자세히 보였다. 은빛 실타래가 이리저리 얽힌 듯한 아름다운 홍채도.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홀릴 것만 같다. 이래서…… 저 눈과 가까이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내가 그레이안을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리고 그레이안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는, 잠깐만, 이마를 부딪혔는데 그 자리에 대고 키스를 왜 해? 그런다고 나아?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황당함이 밀려들고, 입을 달싹이며 쳐다보자니 그레이안이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양 뺨을 살짝 붉힌 채로.
“미안합니다, 부인……. 부인의 울먹이는 얼굴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
“……아마, 달래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다정한 빛을 띤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일어난 커다란 동요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목덜미의 맥박이 크게 느껴질 정도로 요란한 울림이었다. 당혹감에 젖은 채 눈만 깜박이는데, 약간 거칠고 따뜻한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흠칫 놀란 나는 저절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레이안의 큼직한 손이, 그에 비하면 한참 작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이걸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레이안이 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의 모습이 새겨진, 금빛 주화였다.
“솔즈베리 가문의 문장을 새긴 기념주화입니다. 수호 마법을 비롯해 여러 마법을 걸어 두었지요. 여기 보시면,”
잠깐 말을 멈춘 그레이안이 옷 주머니에서 또 다른 주화를 꺼냈다. 나에게 준 것과 같은 모양의 주화였다.
“제가 지닌 이 주화와 연결되어 있어서, 부인에게 위험이 닥치면 제가 알 수 있습니다.”
그거 뭐랄까, 꼭 위치 추적기 같은데. 하지만 내 안전을 위해 건네준 것일 테니 감사히 받도록 하지. 나는 주화를 소중히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고마워요.”
“별거 아닙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부인.”
싱긋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내게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마주 잡고 있던 손을, 그는 아주 느리게 놓았다. 이대로 떨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처럼.
“자, 그럼~ 게이트를 활성화하겠습니다. 준비되셨나요, 공작 부인?”
그레이안이 원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자 아르윈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묘한 허전함을 느끼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준비됐어요.”
“그러시다면, 숫자 10에서 1까지 세고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10, 9, 8, 1…….”
“……?”
저기요, 갑자기 훅 건너뛰셨는데?
‘엇……!’
그 순간, 게이트가 환한 빛을 발하더니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총천연색의 풍경이 내 눈앞에서 훅훅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여긴…… 웨일스?’
아인스턴 왕국의 수도, 웨일스에 도착해 있었다.
“글로리아 공주님을 뵙습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딱딱한 인상의 기사들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웨일스의 게이트는 특이하게도 시계탑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착하자마자 웨일스의 전경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풍경. 잘 구비된 시가지는 아인스턴 왕국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단번에 설명해 주는 듯했다. 시계탑 바로 아래는 중앙 광장이었다. 분수대 근처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왕궁까지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시지요.”
“아, 그래.”
이들은 에반젤린이 보낸 왕실 기사들로, 오늘 하루 동안 나를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시계탑을 내려와 왕궁으로 향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웨일스의 게이트도 지키는 마법사들이 있고 솔즈베리의 요새와는 달리 무려 스무 명이나 되었다. ‘웨일스에는 대륙에서 가장 큰 마법 사관 학교가 있으니, 그만큼 마법사의 수도 많겠지.’ 이 정보는 원작에도 서술되어 있는 거라 큰 위화감 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 건 여전했지만…….
‘나는 여기에 처음 와 보는 건데…….’
그런데, 이 도시가 이토록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 * *
“처음 봤을 때와는 너무 다르네.”
“……뭐가?”
“글로리아 공주 말이야.”
단둘만 남게 되자, 아르윈은 예의 따위 집어던진 태도로 말을 놓았다. 그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그레이안은 그런 아르윈이 익숙했으므로 별말 없이 업무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너는 여기까지 와서 일을 하냐…….”
“할 일이 많아.”
아르윈의 나무람에 그레이안은 서류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고 빙긋 웃었다. 그런 그레이안을 보며 혀를 내두른 아르윈이 검고 긴 머리칼을 소파 뒤로 넘기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자세로 천장을 빤히 응시하면서 아르윈이 말을 이었다.
“글로리아 공주가 기억 상실증이라는 게 사실이야?”
“네가 보기엔 어떻지?”
“뭐가?”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나?”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로 던져진 질문이었다. 천장의 물결무늬를 의미 없이 세고 있던 아르윈은 그레이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아르윈은 그저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글쎄……. 거짓말을 한다기에는 감정이며 생각이 얼굴에 너무 쉽게 드러나던걸.”
그러자 그레이안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다는 뉘앙스의 웃음이라 아르윈은 섬찟 소름이 돋았다.
“네가 보기에도 그래?”
그레이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아르윈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그레이안이 아르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르윈은 정체 모를 답답함을 느끼면서 입을 달싹였다.
“너……. 아니다, 됐다. 그보단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며? 그것도 글로리아 공주와 관련된 거 아니었어?”
“아……. 그랬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이안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로켓 펜던트로, 그 안에 그림이나 반지 따위를 넣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르윈은 다시 소파에 앉아 그레이안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로켓 펜던트를 열고 그 안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을 꺼낸 그레이안이 그것을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그의 은색 눈이 점차 깊어져 갔다.
“……뭐 하냐?”
아르윈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늘따라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 같았다. 글로리아 공주 앞에서 끼 부리듯 눈웃음치던 모습이나, 글로리아 공주가 귀엽다는 듯이 웃던 모습이나, 저 금빛 실 같은 것을…… 햇빛에 비추어 보는 모습이나……. 자꾸만 ‘설마?’ 싶은 가정을 떠올리게 해서, 팔뚝에 닭살이 돋아나는 듯했다.
“이거, 그녀의 머리카락이야.”
“그건 안 물어봤어!”
아르윈은 호흡곤란이 온 물고기처럼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런 그를 흘끗 보고는, 그레이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골이 지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르윈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물었다.
“내 말은, 그걸 왜 햇빛에 비추어 보냐고. 그것도 그윽한 눈빛으로!”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외마디를 흘린 그레이안이 금빛 머리카락을 들고 아르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눈길로 손 안의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아름답지 않아?”
“…….”
할 말을 잃은 아르윈이 두 손을 무릎 위에 툭 떨어트린 채 그레이안을 노려보았다. 잠시 침묵한 후에야 아르윈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을 수 있었다.
“너…… 내가 아는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맞냐? 다른 놈이랑 영혼이 바뀐 거 아니야?”
“아, 그래, 영혼.”
“……?”
또 뜬금없는 대꾸를 한 그레이안의 안색이 별안간 진지해졌다. 아르윈은 그가 마침내 본론을 꺼내리란 것을 짐작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간 조용히 있던 그레이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레이안 솔즈베리의 생각이란 이러했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나? 차라리, 영혼이 바뀌었다는 설명이 훨씬 설득력 있지 않나?
“……그래서, 글로리아 공주의 몸 안에 있는 게…… 진짜 그녀 본인의 영혼인지 확인해 달라?”
“응. 그건 네 전문이잖아?”
아르윈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앞에는 금빛 머리카락 한 가닥이 놓여 있었다. 글로리아 공주의 머리카락을 왜 지니고 있나 했더니…….
‘이런 황당한 부탁을 하려고 그런 거였군.’
이런 문제라면, 확실히 그의 전공이기는 하다. 아르윈 리벤티움. 성별, 나이 모두 불명. 대외적으로는 뱀 수인인 척하고 있지만, 그의 정체는 흑룡 수인이다. 솔즈베리 공작가의 요새를 책임지고는 있으나, 그레이안에게 충성하진 않는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친구 사이였다. 아니, 정확히는 친척 어른과 조카 같은 사이라고 해야 할까……. 아르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어릴 때나 지금이나 평소에는 참 얌전한 성격인데.”
이어질 말을 예상한 듯, 그레이안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가끔 이렇게 엉뚱한 짓을 벌인단 말이지. 글로리아 공주가…… 다른 이에게 몸을 빼앗긴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빼앗긴 건지, 내어준 건지는 아직 모르지. 일단은, 몸과 영혼의 파동이 일치하는지 알아보자는 거야. 일치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녀’는, ‘글로리아 아인스턴’과는 다른 사람인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윈에게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원죄가 있었다.
“내가 너 어렸을 때…… 그 얘기를 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르윈의 중얼거림에 그레이안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적에 아르윈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그레이안은 문득 떠올렸다.
‘너 그러다 ‘포식자’에게 몸을 빼앗기는 수가 있어. 조심해라.’
‘포식자? 그게 뭔데?’
아마 아르윈은 사고뭉치 어린 소년을 겁주려던 의도였을 것이다. 그 말이 오히려 그레이안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말았지만.
‘……포식자란 건 내가 붙인 이름이야. 그리고 그냥…… 괴담 같은 거지. 실제로 그런 게 있는지는 사실 잘 몰라.’
‘그 포식자라는 게 사람의 몸을 빼앗아?’
‘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다고 봐야 하겠지.’
“너는 이백 년도 넘게 추격해 왔다고 했잖아, 그 포식자라는 존재를.”
그레이안의 말에 아르윈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 포식자라는 게, 세계의 10대 불가사의 같은 거라서 실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다고도 분명히 덧붙였건만. 그레이안은 그런 게 실제로 있다고 믿게 된 모양이었다. 이건 확실히, 자신이 잘못했다. 괜한 허세 부리며 꼬맹이를 겁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넌 지금 글로리아 공주의 몸을 그 포식자가 빼앗은 거다, 그런 추측을 하고 있는 거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런 비슷한 사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야.”
“……글로리아 공주의 몸에 들어 있는 게, 정말로 포식자라면? 그러면 어쩔 건데?”
포식자는 괴물이다. 아주 오래된 괴물. 언제부터 존재해 왔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삼키는 괴물이니, 배척해야 마땅할 터.
“…….”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그레이안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한참 후에야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포식자가 아닐 거야.”
“……어떻게 확신해?”
“그냥, 감이야.”
빙그레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의 시선은 한 가닥의 금빛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포식자 같은 괴물이라기엔…… 그녀는 너무 상냥하거든.”
그리 말하는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처럼 온화했다.
“…….”
이쯤 되니 아르윈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 자각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