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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미친 블랙맘바(?) (17/144)

17화. 미친 블랙맘바(?)202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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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을 달린 마차가 마침내 멈춰 섰다. 도착지는, 뜻밖에도 요새였다. 그것도 매우 철옹성 같은 요새. 나는 그레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성지 히페리온을 목격한 이후로 나는 내내 멍한 상태였는데, 그게 티가 났는지 나를 보는 그레이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16550636100192.jpg“부인, 피곤하십니까?”

16550636100197.jpg“예?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멀미를 했는지…….”

멀미는 무슨. 사실은 완전 멀쩡하다. 문제는 정신적인 데 있었다.

16550636100197.jpg‘왜 자꾸만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 거지? 내 기억이 아닌 듯한 정보들도 계속 떠오르고…….’

예를 들면 주술사와 악령에 관한 것이나, 에반젤린의 필체 같은 것.

16550636100197.jpg‘그리고 이번엔 성지 히페리온에 관해서 나도 몰랐던 사실들이 저절로 떠올랐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1. 원작에서 읽은 내용인데 내가 기억 못할 뿐이다. 2. 원래 몸 주인, 글로리아의 기억이 내게도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2번 같기는 했다. 확신할 순 없지만…….

16550636100192.jpg“피곤하시면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요새에 적당한 내실이 있습니다.”

16550636100197.jpg“아, 괜찮아요! 늦으면 곤란하니 제때 가야죠! 그…… 이동 마법진은 어디에 있나요?”

그렇다. 이동 마법진. 그게 나와 일행이 솔즈베리 공작령 외곽까지 온 이유였다. 그 마법진을 통해 아인스턴 왕국의 수도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동 마법진은 다른 말로 ‘게이트’라고도 불리는 모양이었는데, 까마득히 오래전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16550636100192.jpg“게이트는 좀 더 안쪽에 있습니다.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고요. 부인이 게이트를 넘기 직전에 활성화할 예정입니다.”

16550636100197.jpg“아하, 그렇군요…….”

게이트를 이용하려면,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넣어야 했다. 이 과정을 ‘활성화’라고 한다.

16550636100192.jpg“이 요새에는 다섯 명의 마법사가 있습니다. 모두 솔즈베리 가문에 속한 자들이지요. 한 명은 요새 관리의 총책임자이고, 다른 네 명은 게이트를 감시하고 통제합니다. 보통 두 명씩 밤낮으로 교대를 하지요.”

그레이안의 설명을 들으며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솔즈베리가 대단한 가문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16550636100192.jpg“총책임자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었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석조로 지어진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 사람의 얼굴이 시야로 또렷이 들어온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겉으로 티 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16550636100197.jpg‘동공이 세로형이야!’

마치 뱀의 눈처럼, 그 사람의 동공은 세로로 쭉 찢어져 있었다. 홍채는 매우 밝고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게다가 피부 곳곳에 비늘처럼 돋아난 부분이 보였다.

16550636100197.jpg‘세로형 동공과 비늘이라면…… 혹시…… 용 수인?’

문득 떠오른 가정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기대감이 부풀었다. 용 수인이라니,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16550636100197.jpg‘심지어 노란 눈에 검은 비늘인 걸 보니, 흑룡인 것 같은데……!’

대박. 진짜 멋있어! 판타지 하면 역시 용이 나와 줘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용 하면 또 마법이고 말이지! 설레는 마음에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리자, 그 사람이 마침내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16550636114378.jpg“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로 뵙는군요, 글로리아 공주님. 아니, 이제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엥?

16550636100197.jpg‘두 번째라고……?’

이런 미친……. 또 내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 나와 버린 거였냐!

16550636100197.jpg‘첫 번째는 대체 언제 본 건데? ……아, 글로리아가 그레이안과 결혼하던 날?’

국경을 넘어야 했을 테니, 분명 게이트를 이용했을 터였다. 아마 그때 본 모양이지. 내 기억엔 없지만……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레이안을 힐끔거렸다. 어서 눈치채라, 남편아! 나 기억 상실증인 거!

16550636100192.jpg“아.”

한 15초쯤 지나서 그레이안이 외마디를 흘렸다. 드디어 눈치챈 모양이다. 남편님, 얼른 변호 좀.

16550636100192.jpg“사실…… 내 부인에게 지병이 있어서.”

16550636114378.jpg“지병이라니요?”

16550636100192.jpg“그게…….”

그레이안이 나의 기억 상실증에 대해 설명해 주자, 용 수인 마법사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 동공이 세로라 그런가. 좀 무섭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16550636100192.jpg“아르윈. 내 부인을 위협하지 마.”

나도 모르게 움찔하는데, 그레이안이 나를 숨기듯 감싸 안으며 마법사를 나무랐다. 저 마법사의 이름이 ‘아르윈’이로구나. 그런데…… 딱히 위협한 거 같진 않은데……?

16550636114378.jpg“예? 위협이라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자못 황당하다는 투로 대꾸한 아르윈이 날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렇게 웃으니 날카로운 인상이 한결 누그러진다. ……내 속을 꿰뚫어볼 듯한 시선은 변함없지만.

16550636100197.jpg“미안해요. 내가 기억이 온전치 못해서…… 다시 소개를 부탁해도 될까요?”

16550636114378.jpg“물론이죠, 공작 부인. 이해합니다.”

내 요청에 아르윈은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고는 제법 신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해 왔다.

16550636114378.jpg“아르윈 리벤티움. 이 요새의 총책임자이고, 뱀 수인입니다. 보시다시피.”

16550636100197.jpg“예? 뱀…… 수인이시라고요?”

16550636114378.jpg“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아니, 용 수인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딘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러서, 당연히 용 수인인 줄 알았는데……?!

16550636100197.jpg‘멋진 흑룡 수인이 아니었다니……!’

못내 실망한 나는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했다. 아르윈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다는 듯이 웃더니, 은밀한 속삭임처럼 덧붙였다.

16550636114378.jpg“참고로 저는 블랙맘바 수인입니다. 아주 강력한 독을 지닌 뱀이지요.”

16550636100197.jpg‘브, 블랙맘바……?’

모든 걸 삼켜버릴 블랙맘바……? 그냥 독사라고 했으면 좀 무서웠을 것 같은데, 블랙맘바라고 하니까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르윈이 내민 손을 잡으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맘바, 그렇군요.

16550636114378.jpg“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왜인지 웃음을 참는 기색으로 아르윈이 말했다. 잘은 몰라도 그의 눈에는 내가 웃겨 보이나 보다. 그래, 사악해 보이는 것보단 낫지.

16550636100197.jpg“네, 그럼…….”

아르윈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여태 그레이안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곤 놀라 까무러쳤다.

16550636100197.jpg‘와악! 내가 미쳐!’

후다닥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자니 그레이안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뭔데? 뭐가 아쉬운 건데……! 나는 슬금슬금 그레이안과 떨어져 서며 그를 힐끗거렸다. 그레이안은 자신의 빈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여전히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했다.

16550636100192.jpg“부인에게선 좋은 향기가 나서…… 조금, 아니, 많이 아쉽군요. 계속 그렇게 저를 피하시면…… 저도 조금 상처받습니다.”

아니…… 그런 오해하기 쉬운 말 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이 숨 쉬듯이 사람을 홀리는 남자야! 나는 그레이안을 소심하게 흘겨보며 아르윈의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그런 내 뒤를 그레이안이 바짝 쫓아왔고, 나는 그를 슬금슬금 피하며 경고했다.

16550636100197.jpg“저기, 너무 가까이 붙지 마세요.”

16550636100192.jpg“아까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만…….”

16550636100197.jpg“그건, 그때는……!”

그런 식으로 그레이안과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어느덧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게이트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16550636114378.jpg“각하! 오랜만입니다!”

16550636114378.jpg“각하, 오셨습니까.”

게이트를 지키는 마법사 두 명이 그레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명은 쾌활하게, 다른 한 명은 매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만 봐도 성격이 판이해 보이는 두 마법사는 나를 발견하곤 안색이 대번 나빠졌다. 두 사람 다,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16550636114378.jpg“……안녕하십니까, 글로리아 공주님.”

16550636114378.jpg“글로리아 공주님을 뵙습니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도 글로리아와 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 원 참,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여러 번 발생할 듯싶은데.

16550636100197.jpg‘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16550636114378.jpg“그럼 게이트를 활성화하도록 하지요. 공작 부인? 준비되셨습니까?”

16550636100197.jpg“아, 네!”

아르윈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두 마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나와 아르윈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포인트에서 놀란 것인가 했더니,

16550636114378.jpg“공작 부인……?”

16550636114378.jpg“그렇게 불러도 되는 건가……?”

호칭이 문제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나를 ‘글로리아 공주님’이라고 불렀지. ……잘은 몰라도, 글로리아가 자신을 계속 그렇게 부르라고 요구했던 모양이다.

16550636100197.jpg‘글로리아라면…… 그럴 만도 하지.’

글로리아는 자신이 아인스턴 왕가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수인과 결혼해 수인 가문의 이름으로 불리게 생겼으니, 그 드높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16550636100197.jpg‘저 두 사람이 저러는 걸 보면, 글로리아가 아르윈에게도 같은 요구를 했을 게 분명한데…….’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아르윈은…….  

16550636114378.jpg‘이제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라고 물었었지. 그것도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로.

16550636100197.jpg‘생각해 보니 그거…… 글로리아가 싫어할 걸 알면서 그런 거잖아?’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심술을 부린 거였다니! 나는 아르윈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블랙맘바 수인이라더니, 과연…….

16550636114378.jpg“왜 그러시지요, 공작 부인?”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인지 아르윈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둘러댄 나는 짐짓 급한 척하며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게이트는 완벽한 정원(正圓) 안에 여러 도형이 겹쳐 있는 기하학적 형태였는데, 큰 마차 두 대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 앞에 서서 머뭇거리자니 마법사 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반면에 아르윈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 곁에 다가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16550636114378.jpg“원의 안쪽에 가서 서 계시면 됩니다. 원을 이탈하지만 않으시면 되니 걱정 마시고요.”

16550636100197.jpg“……이탈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넌지시 묻자니, 아르윈은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했다.

16550636114378.jpg“음, 그럼 원에서 이탈한 부분만 툭 잘려나가게 되겠죠.”

16550636100197.jpg“자, 잘려나가…….”

16550636114378.jpg“예를 들어, 팔만 원 밖으로 꺼내놓고 있으면, 팔이 잘려나갑니다.”

미, 미친! 그런 말을 왜 화사하게 웃으며 하는 건데? 나는 또라이 같은 아르윈을 피해 후다닥 원 안으로 들어갔다. 흘끗 훔쳐보니, 아르윈은 날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미친놈……. 미친놈이다.

16550636100192.jpg“아, 부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때, 그레이안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근처에 다다른 그는 몸의 반 정도만 원 안에 들여 놓고서는 재차 입을 열었다.

16550636100192.jpg“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만요, 어디에 뒀더라…….”

16550636100197.jpg“……저기…….”

나는 몸의 반만 원 안에 들어와 있는 그레이안이 너무 신경 쓰였다! 이러다 게이트가 갑자기 활성화되는 바람에, 그레이안의 절반이…….

16550636100197.jpg‘악! 끔찍해!’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아 원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놀란 그레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내가 그를 너무 힘껏 잡아당겼던 것인지― 쿵! 이마와 코가 부딪혔다. ‘콩!’도 아니고, ‘쿵!’ 하는 소리가 났다.

16550636100192.jpg“헉, 부인…….”

16550636100197.jpg‘아, 아파……. 겁나 아파!’

아니, 보통 이런 상황엔 입술이 부딪히는 게 클리셰 아닌가?! 왜 이마가 부딪히는 거냐고……! 그것도 엄청 세게!

16550636100192.jpg“부인, 괜찮으십니까?”

그레이안이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냐고……? 하나도 안 괜찮다. 이마가 몹시 따끔따끔하고 얼얼했다. 혹 날 것 같은데…… 젠장……. 이마에 혹이 난 채로 가든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가로젓자, 그레이안이 딱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16550636100197.jpg“……?”

별안간 내 이마에 입술을 내려앉혔다. 살결 위로 느껴지는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에, 나는 그대로 뻣뻣이 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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