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딸기에 사랑을 담아2022.01.22.
딸기 먹는 에이프릴 너무 귀엽다! 그 생각만 벌써 39번째. 이쯤 되면 슬슬 질릴 법도 하건만. 질리긴커녕 100번도 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토끼가 최고야, 제일 귀여워, 늘 짜릿해!
“에이프릴, 딸기 맛있니?”
묻는 소리에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의 주둥이에 난 하얀 털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꼭 딸기 틴트를 바른 것만 같았다. 너무 귀여워!
“근데 우리 둘이서 먹기엔 너무 많으니까, 이따 공작님에게도 가져다 주자. 어때?”
그러자 에이프릴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입이 계속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었다.
“주방장한테 물어봤는데, 네가 딴 꽃은 케이크에 올려 먹거나, 말려서 차로 우려 마실 수 있대.”
“낑.”
“그리고 또 뭐였지…… 아, 설탕 조림으로도 만들 수 있댔어! 주방장이 세 개 다 해준댔으니까, 기다려 보자.”
“웅꺗!”
에이프릴이 신이 난 듯 폴짝 뛰었다. 역시 먹는 걸 가장 좋아하는 먹보 토끼다웠다. 웃으며 토끼 머리를 쓰다듬어준 나는, 에이프릴과 함께 딸기를 조금씩 나눠 먹었다. 그렇게 딸기를 배불리 먹은 뒤, 에이프릴을 무릎에 앉히고 함께 책을 읽었다. 책은 대륙 남쪽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기행문으로, 저자는 무려 독수리 수인이었다. 참고로 독수리 수인은 개체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쉽게 만나볼 수 없다나. 궁금하다, 독수리 수인……. 언젠간 만나볼 수 있을까?
“끼얏웅.”
“응?”
에이프릴이 앞발로 삽화 하나를 척 짚었다. 바닷가 마을을 그린 삽화였는데, 파란 하늘과 하얀 건물들, 맑고 깨끗한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여긴 바닷가 마을인가 봐. 가보고 싶니?”
“꺄웅!”
에이프릴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토끼 귀가 마구 쫑긋거리고 코가 벌름거린다. 진심으로 가보고 싶어 하는 거로구나……!
“그래, 다음에 꼭 같이 여기로 놀러가자. 언제가 좋을까? 흠, 5월쯤이 괜찮으려나……?”
지금이 11월이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테지만, 이왕이면 날씨가 따뜻할 때 가는 게 좋겠지?
“좋아, 내가 공작님에게 얘기해 볼게.”
“끼양.”
나는 에이프릴의 앞발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기’ 대신이었다. 꼬리를 씰룩이며 폴짝 뛰는 에이프릴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 * * 아인스턴 왕가의 덕목은 크게 세 가지다. 악랄함, 무자비함, 몰인정함. 그 세 가지 없이는 지옥 같은 왕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실제로 왕의 자식들 중 몇 명은 이미 오래전 목숨을 잃었다. 그중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이카르트가 끝내 암살당해 목숨을 잃은 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카르트는 왕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글로리아를 예뻐했던 손위 형제였다. 그런 이카르트가 죽은 후, 글로리아의 처지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언제나 글로리아를 비호해 주곤 했던 형제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글로리아는 원치 않은 정략결혼에 팔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 전에 엘로윈 왕국의 솔즈베리 공작과 결혼한 글로리아에게 형제들은 관심을 뚝 끊었다. 글로리아는 욕심도, 질투심도 많지만 매우 멍청했다. 그런 글로리아가 어떻게 지내는지 따위, 아인스턴 왕가의 형제들에겐 크게 알 바가 아니었다. 멍청한 형제는 위협조차 되지 않으므로. 그런데, 그 글로리아에 대해 최근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글로리아가 뭘 했다고?”
왕위 계승 서열 2위, 에반젤린은 방금 막 도달한 소식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글로리아가, 그 반푼이 사생아가, 세계수의 나비들을 불러냈다고?
“확실해? 그냥 비슷한 정령이었던 거 아니야?”
그러나 글로리아가 정령과 계약했다고 쳐도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이백여 년 전부터 정령들은 인간과의 소통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수인들뿐이었다. 정령들이 왜 인간과의 소통을 거부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아인스턴 왕국의 정령학자들이 정령들의 마음을 돌리려 오래전부터 애를 써 왔지만,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글로리아가 정령과 계약했다면? 당연히 부왕의 눈에 띌 것이다. 어쩌면 부왕의 총애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글로리아를 지지하는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하지만 걘 너무 멍청해. 머리가 나쁘니 정령과 계약해 봤자야. 부왕에게 이용만 당하겠지.’
“목격한 사람들의 말로는, 나비들이 오팔처럼 다채로운 빛을 내뿜었다고 합니다.”
시녀의 말에 에반젤린이 멈칫했다. 시녀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오팔 빛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
오팔처럼 영롱한 빛을 뿜는 것은 세계수의 나비들이 지닌 고유한 특징이었다. 그런 다채로운 빛을 지닌 정령은 세계수의 나비들이 유일했다. 아니, 엄연히 말해서 그 나비들은 ‘성령’이라고 봐야 할 테지만.
“……역시 믿을 수 없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도대체 무슨 수로 글로리아 따위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해온 위대한 성령들과 말이다.
‘세계수의 나비들은 대대로 아인스턴 왕가의 혈통을 잇는 자와 계약해 왔지. 만일 우리 중 누군가가 나비들과 계약했다면, 당연히 나여야 하는 거 아니야?’
에반젤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 왕족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확신했으므로.
“종이와 펜을 가져오렴. 초대장을 써야겠어.”
“네, 에반젤린 공주님.”
에반젤린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명령하자, 잠시 후 시녀가 종이와 펜을 가져다 주었다. 에반젤린은 즉시 초대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엘로윈의 솔즈베리 성에 있는 글로리아였다. * * *
“딸기를 세 개나 남겨 주시다니, 무척 기쁘군요. 너무 감사한 나머지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에이프릴, 정말 고맙구나.”
왠지 뼈가 느껴지는 그레이안의 말에 난 어색하게 웃었고, 에이프릴은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딸기가 그렇게나 많았는데, 에이프릴과 너 한 입, 나 한 입 먹다 보니 금세 다 먹어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딸기가 너무 맛있더라고……. 새콤달콤한 게, 아주 그냥 마약 딸기였다……!
“미안해요……. 제가 온실로 가서 나비들에게 부탁해 볼게요! 딸기를 다시 잔뜩 열리게 해 달라고요!”
나비들의 효과적인 쓰임새(?)를 퍼뜩 깨달은 내가 냉큼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안은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단지…… 부인, 에이프릴과 함께 먹고 싶었는데, 그게 좀 아쉽군요.”
허억……! 양심의 가책이 더욱 강하게 느껴져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딸기 파티에 그레이안도 초대하는 건데! 미안합니다, 정말……!
“그, 그래도, 나비들에게 한번 부탁해 볼게요. 그렇지 않아도 나비들의 힘을 쓰는 법을 좀 연습해야 하거든요…….”
“그런가요?”
“네, 제가 힘 조절에 너무 서투르다고 하더라고요. 저번에 그 마을에서도 그래서 기절한 거예요.”
“저런, 그럼 연습이 필요하긴 하겠군요. 하지만 저번처럼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그때였다. 얌전히 있던 에이프릴이, 별안간 딸기 하나를 냉큼 집어 들었다.
‘설마 또 먹으려고?!’
놀라서 멈칫한 사이,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에게 딸기를 홱 던졌다. 마치 배구에서 리시브 하는 듯한 자세로 말이다. 잽싸게 딸기를 받아든 그레이안이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에이프릴을 응시했다. 에이프릴은 다시 딸기를 집어 들더니, 이번에는 내 쪽으로 홱 던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내 손바닥 안에 떨어진 딸기에서 반지르르 윤이 났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아, 설마?’
에이프릴이 남은 딸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두 앞발로 척 잡고는, 앞니로 깨물어 야금야금 먹기 시작한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는 그레이안과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딸기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셋이 같이 먹자는 뜻이구나!’
확실했다. 에이프릴은 혼자서 얼른 다 먹어 치우기보단, 조금씩 갉아먹으며 나와 그레이안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더러 어서 먹으라고 눈치를 주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레이안의 ‘함께 먹고 싶었다’라는 말을 듣고 신경이 쓰여서 이러는 걸 거다.
‘과연 천사 토끼……. 배려심 넘치는 토끼.’
흐뭇하게 웃은 나는 내 몫의 딸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화악 퍼진다. 역시 맛있다.
“고맙구나, 에이프릴.”
마찬가지로 그레이안도 에이프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후에 딸기를 먹었다. 이내 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음, 정말 맛있구나. 이런 맛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더 먹고 싶어 할 각이다. 최대한 빨리 온실로 가서 딸기를 더 열리게 해야겠다.
* * *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 솔즈베리 공작령에선 딸기가 무척 귀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륙 북부이다 보니 농작물의 냉해 피해가 심각한데, 딸기는 뭐 말할 것도 없다나. 그래서 솔즈베리 공작성에도 딸기는 아주 가끔 들여오는 귀한 과일이었는데, 그레이안은 여태 딸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 양보해 왔다고 한다. 아니, 너무 착한 거 아니야……? 착한 토끼에 착한 늑대까지. 하아, 혹시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나. 아무튼 후원의 유리온실에 딸기 넝쿨을 들인 것도 최근이라고 한다. 온실 관리인이 실험적으로 재배해 보는 중이었는데, 그걸 에이프릴이 냉큼 다 따버린 것이다! 주렁주렁 열려 있던 딸기가 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온실 관리인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미안합니다, 우리 토끼가 사고뭉치라……. 조만간 제가 다시 잔뜩 열리게 해 줄게요! 조금만 기다리라구!
‘오늘은 일단 자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나이트캡도 썼다. 토끼님께선 이미 내 침대를 차지하고 계셨다. 오늘도 어김없이 보들보들한 토끼 털을 한껏 만끽하며 잠들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보들보들, 말랑말랑……. 흐흑, 토끼 너무 귀여워.
‘에이프릴 토끼가 내 인생 최고의 복지다…….’
헤헤 웃으며 침대로 다가가려는데, 웬일로 문이 열리더니 내 전속 시녀인 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쭈뼛거리며 말했다.
“주무시기 전에 죄송합니다, 마님. 다름이 아니라 마님 앞으로 편지가 와서요. 급한 연락이라고 하더군요.”
편지……? 급한 연락? 안나가 사뿐히 다가와 편지를 내밀었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건네받았다. 나에게 급한 연락을 하는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지?
‘어라? 이 서명은…….’
봉투에 적힌 필체가 어째서인지 낯이 익었다. ‘나’는 처음 보는 것인데도 말이다. 더욱 아리송한 기분으로 그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에반젤린 아인스턴. 아인스턴 왕국의 공주로, 글로리아의 손위 자매이며 왕위 계승 서열 2위의 적통 왕녀였다. 정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인 글로리아와는 근본부터 다른, 왕후의 직계 자식.
‘원작에서는, 으음……. 글로리아 못지않은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었지.’
남주 후보 2를 노예로 두고 학대했던 게 바로 이 에반젤린 공주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남주 후보 2는 에이프릴에게 구해지게 되고, 이후로 에이프릴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자신의 유일한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다 그 숭배의 감정이 그만, 삐끗하는 바람에! 흑화하게 되고, 새까만 집착으로 변질되고 만다……!
‘존잼 구간이었지.’
이런 생각해서 미안해, 에이프릴. 그때 당시에 내가 달았던 댓글도 기억난다. [사람을 구원 삼지 말자……]였지.
‘하, 하지만, 그런 내용은 내가 싹 바꿀 거니까……!’
에반젤린이 대체 뭔 일로 편지를 보내왔는지나 어서 확인해 보자!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응? 이건…… 초대장이잖아?’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종이를 확인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일반적인 편지지보다 좀 더 빳빳한 이 종이는, 틀림없는 초대장이었다.
‘웬 초대?’
의아함에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초대장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별게 없었다. 그냥 적절한 안부 인사, 그리고 며칠 후 금요일에 열리는 가든 파티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게 전부. 꼭 와줬으면 한다는 말이 덧붙여 있는 건 어쩐지 좀 수상쩍었지만…….
‘아인스턴 왕궁에서 글로리아의 위치를 생각하면……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아닌가?’
흐음.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가 뻔한데.’
내가 세계수의 나비들을 불러냈다는 소문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