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쪽!2022.01.19.
“부인, 여쭤볼 게 있습니다.”
식사 중에 그레이안이 넌지시 물어 왔다. 최대한 고상한 척 스테이크를 썰던 나는 살짝 멈칫하며 그레이안을 바라보았다. 은회색 눈이 호기심을 띤 채 빛나고 있었다.
“어…… 뭐가 궁금하신가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계속 스테이크를 썰었다. 육질이 매우 부드러운 안심이라 저항 없이 쉽게 썰렸다. 먹기 좋은 크기의 조각을 어서 입으로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레이안의 질문을 기다리느라 잠시 참아야 했다.
“부인이 불러냈던 나비들 말입니다.”
“아…… 네.”
“제가 따로 조사를 좀 해봤는데, 세계수를 수호한다는 전설 속의 나비들과 매우 흡사하더군요.”
“그…… 그런가요?”
“예, 그 나비들은 원래 아인스턴 왕가의 혈통을 잇는 자와 대대로 계약을 맺어 왔는데, 근 백여 년 간은 나비들과 계약을 맺은 이가 없었던 것 같더군요.”
뭐라고? 그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나비들이 안 알려줬으니까. 그럼 나비들이 나와 계약한 이유도 내가 아인스턴 왕가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왜 나지? 다른 왕족이 아니라?
‘이왕 계약할 거라면,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다른 왕자나 공주와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래서 말인데, 부인.”
“어, 네.”
“부인은 알고 계셨습니까? 그 나비들이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것을요.”
“……그게,”
몰랐다고 발뺌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 그레이안은 이미 다 눈치챈 것 같으니 말이다.
‘하아, 내 팔자야. 이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런 힘이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겠지……? 그리고 이 사람,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결코 내 편이 아닐 게 분명했다. ‘글로리아’가 저지른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본 데다가, 나는 거기에 대고 ‘기억이 안 나요.’ 따위의 컨셉질을 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답이 없다. 하하하……. 지금쯤 그의 안에서 내 이미지는 완전히 개차반이 되어 있을 테지…….
‘나비들의 힘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그레이안이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해. 무조건, 내 능력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야.’
그래, 까짓것 뭐, 괜찮아. 나는 어른이니까……! 나 혼자 힘으로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하니까……! 흑흑.
“부인?”
계속 답이 없자니 그레이안이 나를 재촉했다. 천금 같은 한숨을 속으로 삼킨 나는 느직이 입을 열었다.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네, 맞아요. 제가 세계수를 수호하는 나비들과 계약했어요.”
“역시 그랬군요.”
그레이안은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아 기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허허……. 뭘 저렇게까지 기뻐한담. 남의 속도 모르고…….
‘그래도 잘생겨서 보기엔 좋구나.’
난 그의 미소를 훌륭한 미술품 보듯 감상하며, 드디어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고기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네.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은, 밥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려나? 스테이크를 먹고 있자니 에이프릴 생각이 나네.
‘이거 얼른 다 먹고 만나러 가야겠다.’
나는 고상한 체하는 것을 포기하고 음식들을 마구 입에 넣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그레이안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많이 시장하셨나 보군요.”
“음, 그렇다기보단, 얼른 에이프릴을 만나러 가고 싶어서요.”
“아아…….”
그레이안의 눈빛이 왜인지 묘해졌다. 나는 그를 곁눈질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흡입했다. 이쯤 되니 사람이 아니라 진공 청소기가 된 것 같군.
“에이프릴이 부인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랬나요?”
“예, 부인이 쓰러진 뒤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그럴 수가……. 또 울보 토끼를 찍었단 말인가!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른 에이프릴을 보고 싶었다. 눈물 많은 토끼는 어서 가서 꼬옥 안아 줘야 해!
“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에이프릴이 누군가를 그렇게나 잘 따를 줄은 몰랐거든요.”
그레이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어쩐지 부담스러워지는 시선이라,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었다. 음, 잘 구워졌네.
“하지만 이번 일로……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이건 또 뭔 소리래?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안이 살짝 눈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인은 세계수의 나비들이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일들은…… 아마 사정이 있었겠지요.”
하마터면 입 안의 음식들을 뱉을 뻔했다. 방금……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거야?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미, 믿을 수 없어.’
이거 혹시 깜짝 카메라 같은 건가? 아니, 이 세상엔 카메라가 없지. 아니!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여주의 아버님이! 나더러 ‘좋은 사람’이라고?
‘세상에 이런 일이.’
음식을 꿀꺽 삼킨 나는 얼른 물을 마셨다. 그레이안은 여전히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말에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밥만 먹었다. 모, 몰라, 갑자기 사람을 좋게 평가하고 그러지 말라고! 무서워지려 하니까! 다행히 그레이안이 더 말을 건네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식사하는 내내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좋은 사람이라느니, 착하다느니 따위의 말을 듣는 건…… 역시 조금 무섭다. 그리고 부담스럽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고 마니까.
* * *
“에이프릴이 어딜 갔다고요?”
“후원의 유리온실입니다, 마님.”
에이프릴이 방에 없길래 지나가던 하인을 잡고 물으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에이프릴, 온실에는 뭘 하러 간 걸까? 우리 토끼는 바쁘구나.
‘흠, 유리온실이라…… 나도 한번 가볼까? 구경도 할 겸.’
그러고 보니 전에 에이프릴을 찾아다니면서 유리로 된 건물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온실이었구나. 온실에서는 뭘 키우는 걸까? 과일 나무 같은 것도 기르나? 먹보 토끼가 다 먹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작은 토끼가 딸기를 서리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식탐 토끼. 나는 실실 웃으며 유리온실로 향했다. 워낙 서둘러서인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온실에 도착했다. 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시야로 들어왔다.
‘세상에…….’
그야말로 별천지. 혹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화초들과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꽃, 돌담을 따라 쪼르르 흐르는 맑은 시냇물, 천장에 매달려 따뜻한 빛을 내는 기묘한 보석들. 잘은 몰라도, 저 보석들이 이 온실을 포근하게 유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던 세계에 과학 기술이 있다면, 이 세계엔 마법이 있구나…….’
아니지, 저런 물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마도 공학이라고 하던가? 정확히는 그랬던 것 같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기하다!
‘어서 에이프릴을 찾아야지. 어디 있으려나?’
싱글벙글 웃으며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왔다는 사실을 에이프릴은 눈치채지 못한 건가? 토끼 수인은 청각이 좋고, 기척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도 있을 텐데…… 흐음. 사실 내가 온실에 들어서자마자 에이프릴이 뛰쳐나올 거로 예상했기 때문에, 여태 아무런 낌새도 없는 게 조금 이상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데, 마침 온실 한편에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앗, 찾았다!’
그런데…….
‘저건…… 딸기 넝쿨……?’
작은 토끼가 폴짝 뛰어올라 앞발로 딸기를 움켜쥐고 똑 따냈다. 그렇게 수확한(?) 딸기를 바구니에 홱 던져 넣고는, 다시 냉큼 뛰어올라 딸기를 잡아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정말로…….’
딸기를 서리하고 있잖아! 게다가 바구니에 든 게 이미 엄청 많았다! 식탐 토끼! 저걸 어떻게 다 먹을 생각이냐고!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허허허 웃고 말았다. 진짜로 딸기를 서리하고 있었을 줄이야. 세상에, 너무 웃겨. 심지어 토끼 모습을 고집하고 있어. 사람 모습이면 더 쉽게 딸 수 있을 텐데!
‘아, 미치겠다, 에이프릴이 너무 웃기다……. 세상에서 제일로 웃긴 생명체다. 연말 시상식 때 ‘최고로 귀엽고 웃긴 상’을 드려야 한다.’
나는 토끼 목에 메달을 걸어 주는 상상을 했다가 기어코 폭소하고 말았다. 크게 웃는 소리에 움찔한 에이프릴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토끼의 동글동글한 눈빛이 흔들리고,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 거냐고……. 에이프릴, 나름 진지했구나.’
나는 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에이프릴은 나를 빠안히 쳐다보더니, 이윽고 무언가 깨달은 듯, 구겨진 삼각형 눈을 했다. 토끼 앞발과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의 떨림이었다. 하핫……. 내가 속으로 살짝 비웃었다는 걸 알아채고 말았군.
“끄앵!”
“미, 미안.”
극대노 외침에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씩씩거리며 뒷발을 쿵쿵 구르던 토끼가 이내 등을 홱 돌렸다. 이런, 또 삐졌나 보다. 이렇게 된 이상 토끼님께 넙죽 사과를 드리는 수밖에.
“에이프릴? 네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 거야. 진짜야…….”
나는 에이프릴을 살살 달래며 천천히 다가갔다. 등을 돌린 채 귀를 쫑긋거리던 토끼가 슬쩍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키훙.” 비슷한 소리를 냈다. ……뭐지? 코웃음 친 건가?
‘토끼 모습으로 코웃음도 치다니…… 대단한 토끼!’
“에이프릴은 토끼 모습으로도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구나. 굉장해. 역시 비범한 토끼야.”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감탄하며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나를 응시하는 에이프릴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딸기는 왜 따고 있었던 거야? 먹고 싶었니? 이 바구니는…….”
토끼 옆의 커다란 바구니를 슬쩍 살펴보던 나는, 그 안에 든 게 딸기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온갖 약초와 허브, 식용 꽃, 나무 열매 등등이 바구니 안에 잔뜩 들어 있었다. 아무리 먹보 토끼라 해도 이걸 혼자서 다 먹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에이프릴은 이렇게나 많은 허브와 열매를 왜 채집한 걸까? 못내 의아해하며 에이프릴을 쳐다보자니, 토끼가 앞발로 바구니를 슬쩍 밀어 내 쪽으로 보냈다.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아, 설마……?’
영문 몰라 눈만 깜박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토끼와 바구니를 번갈아 보았다. 마치 츤데레처럼 ‘오다 주웠다. 너 다 먹어!’라고 말하는 듯한 토끼. 바구니 안에 가득 든 허브와 꽃, 열매들. 전부 몸에 좋아 보이는 것들이다.
‘나한테 주려고……?’
쓰러진 내가 걱정돼서, 좋은 것들을 먹여 주려고 직접 채집하고 있었던 건가?
‘……맙소사.’
이건, 진짜, 너무…… 너무……! 폭발적인 귀여움이었다!
“으아아아! 천사 토끼!!”
“―?!”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을 와락 끌어안았다. 꼭 껴안고 마구 쓰다듬으며 수염이 난 볼에 뽀뽀하자, 토끼가 쩌엉 얼어붙어 버렸다. 아앗, 얼음 토끼.
“미안해. 놀랐니? 너무 기뻐서 그만……. 정말 고마워, 에이프릴. 넌 정말 최고의 토끼야.”
에이프릴은 자못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내 뺨을 향해 앞발을 파닥파닥 휘둘렀다. 내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진 않는 걸로 보아, 다른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뭐가 불만일까? 아, 그러고 보니…….
‘토끼라고 부르는 걸 썩 좋아하진 않았지!’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미안! 에이프릴은 정말 최고야. 음, 우, 우리 딸…… 우리 딸은 정말 최고야.”
‘딸’이라고 부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별안간 쑥스러워지는 건 어째서일까? 에이프릴은 귀를 쫑긋하더니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앞발을 꼼지락거린다. 이번에는 부끄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 에이프릴을 꼭 껴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내 마음에도 그런 솜털 같은 게 돋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처음 눈 떴을 때도, 에이프릴이 곁에 있어 난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정말로, 진심으로, 에이프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주고 싶다고.
“우리 딸.”
“끼앵.”
폴짝 뛰어오른 에이프릴이 내 뺨에 주둥이를 부딪혔다.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방금 뽀뽀한 거야?”
“끼훙.”
너무 귀엽고 웃겨서, 나는 또 크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