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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역시 늑대였어! (13/144)

13화. 역시 늑대였어!2022.01.15.

16550635482425.jpg“이, 이게 무슨……?”

16550635482425.jpg“나비……?”

오색찬란한 수백 마리의 나비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나비들은 부드럽게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보석처럼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장관이었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넋을 잃은 채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16550635482425.jpg“저, 저길 봐…….”

16550635482425.jpg“나비들이…….”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신비로운 나비들의 중심에는 글로리아 공주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나비들을 불러낸 사람이 글로리아 공주라는 것이 명료한 상황. 그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있던 글로리아가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금빛의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한 홍채는 선명하고 짙은 파란색이었다.

16550635482448.jpg“부인, 이게 대체……?”

그레이안이 사뭇 놀란 기색으로 글로리아를 향해 물었다. 글로리아의 파란 눈이 그레이안을 힐끗 훔쳐보았다. 다소 소심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상대방을 내심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래서였을까, 그레이안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은.

16550635482454.jpg“얘들은, 그러니까, 제 친구들……이에요.”

글로리아가 조금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시선을 피하는 그녀는, 무언가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16550635482448.jpg“……친구들이라고요?”

16550635482454.jpg“네.”

그레이안이 되묻자, 글로리아는 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짧게 대꾸했다. 그레이안은 못내 의아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억지로 파고들려 했다간 더 멀리 도망쳐 버릴 테니까. 글로리아가 그런 성격이란 것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가까워져도 상관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녀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16550635482454.jpg“이 나비들이 마을을 다시 풍요롭게 바꿔 줄 거예요.”

글로리아의 말에, 그레이안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체 모를 나비들이 마을을 풍요롭게 바꿔 줄 거라니? 특히, 마을 사람들은 불안과 불신의 눈초리로 글로리아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진흙에 빠졌다는 얼토당토않는 이유로 마을에 가뭄이 들게 한 글로리아 공주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을을 다시 풍요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믿을 수 없었다. 마을 땅을 여기서 더 척박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못내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다만, 글로리아 공주가 불러낸 나비들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기보단 어딘지 신성해 보였다. 뭐라 해야 할까, 마치 신의 축복이 세상에 내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정말인가?’ 싶은 기대를 품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글로리아가 두 손을 꼬옥 모아 잡았다. 마치 기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나비들이 마을 전역에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듯이 보이는 나비들은 생명체라기보다는 흡사 영혼 같았다. 수많은 나비들이 살랑살랑 날아다니며 땅과 강에 반짝이는 빛의 가루를 뿌렸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 듯한 그 장관을, 사람들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메마르고 갈라져 있던 땅이 다시 반지르르한 윤기를 되찾은 것이다. 죽어 가던 꽃이 도로 활짝 피어났고, 나무에선 새 잎사귀가 순식간에 돋아났다. 시들었던 잔디가 푸릇한 빛을 머금었다. 뿐만 아니라, 바닥을 드러내 보였던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현상. 누군가는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고, 누군가는 환호성, 또는 비명을 질렀다.

16550635482425.jpg“봐!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어!”

16550635482425.jpg“이, 이 흙 좀 봐. 예전과 같아, 아니, 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16550635482425.jpg“엄마! 저쪽에 꽃이 활짝 피었어! 엄청 많아!”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비들을 거두어들인 글로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주민들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바로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그레이안은 어김없이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글로리아에 대한 소문, 과거의 그녀가 행한 악독한 짓들. ‘그’ 글로리아와 ‘이’ 글로리아는 너무도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16550635482448.jpg‘기억을 잃으면,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 있는 건가?’

16550635505109.jpg“끼앵!”

그때, 에이프릴이 울음소리를 내며 글로리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반사적으로 에이프릴을 안아든 글로리아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에이프릴이 글로리아의 옷자락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글로리아는 에이프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35482454.jpg“고마워, 에이프릴. 우리 착한 토끼.”

16550635505109.jpg“낑.”

그레이안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슴께를 간질이는 이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가 마음속으로 알아내 보려던 차였다.

16550635482454.jpg“……!”

글로리아의 몸이 별안간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레이안은 재빨리 그녀를 받아안았다. 글로리아의 옷자락에 착 달라붙은 에이프릴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글로리아는 기절한 모양이었다.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그레이안은 망연히 바라보았다. 잘은 몰라도, 마을을 다시 풍요롭게 해주는 데 너무 무리하게 힘을 쓴 게 아니었을까. ……그녀가 불러들인 나비들은 대체 뭐였을까? 땅을 비옥하게 하고, 강물을 흐르게 한 그 힘은…… 마치 오래된 옛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기적이었다.

16550635505109.jpg“끼잉…….”

16550635482448.jpg“……걱정하지 말렴. 기절한 것뿐이란다.”

에이프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준 그레이안이 글로리아를 좀 더 편하게 고쳐 안았다. 품 안의 몸은 너무 가볍고, 또 너무 가녀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쉽게 부서져 버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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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누군가의 목소리가 꿈결에 들려왔다.  

16550635521842.jpg‘……리아.’

  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16550635521842.jpg‘내…… 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참 이상하게도.  

16550635521842.jpg‘……미안하구나.’

  말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마치 별빛의 메아리처럼 울리며 나에게로 전해져 왔지만, 닿는 순간 흩어지고 말아 무척 공허하게 느껴졌다. 밤하늘의 별은 아름답게 반짝이지만, 그 빛은 이미 죽은 별의 흔적일 수도 있다고 하던가. 이 목소리도 그런 것만 같았다.  

16550635521842.jpg‘……내가 보여준 이야기가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 글로리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만 벙긋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꿈이 흐려지더니, 현실의 감각이 불현듯 선명해졌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천장. 여기는 솔즈베리 성의 공작 부인 침실이었다.

16550635482454.jpg‘그러고 보니, 나, 기절했었지…….’

나비들의 말로는 내가 처음이라 힘 조절에 실패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한 마을을 풍요롭게 하는 덴 2의 힘만 쓰면 되는데, 10의 힘을 써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몸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기절하게 된 거라나, 뭐라나…….

16550635482454.jpg‘아, 배고파……. 진짜 배고파. 미쳤다.’

미친 배고픔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목도 좀 타는 것 같고. 무, 물이 어디 있지? 목말라……!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그것도,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두 손으로 조신하게 들고 있는. 그가 나를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16550635482448.jpg“부인, 깨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16550635482454.jpg“아…….”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왜냐면…… 그레이안의 눈웃음에 순간적으로 홀려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홀려도 되는 거야? 저 눈웃음은 당장 압수해야 한다. 피해자가 속출하기 전에……!

16550635482448.jpg“시장하시지요?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고요?”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레이안이 사뭇 다정하게 물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로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 더듬더듬 대답했다.

16550635482454.jpg“모, 몸 상태는 괜찮아요. 배가 엄청 고픈 것 빼곤…….”

16550635482448.jpg“그러시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테이블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16550635482454.jpg“그,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는 후다닥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맨발이었다. 카펫이 깔려 있었지만 바닥이 차가운지라 슬리퍼를 신어야 할 것 같았다.

16550635482454.jpg‘슬리퍼가 어디에 있더라…… 헉?’

그때, 그레이안이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나를 침대맡에 앉게 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슬리퍼 한 쌍이 들려 있었다.

16550635482454.jpg“저……?”

16550635482448.jpg“신겨 드리겠습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씩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딘지 장난스러운 미소가 더해져서인지, 소년처럼도 보이고.

16550635482448.jpg“부인, 발이 정말 작으시군요.”

16550635482454.jpg“……!”

그가 귀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발을 아주 쉽게 감싸 쥐었다. 살짝 서늘해져 있던 살갗에 평균보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전해져 오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은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16550635482448.jpg“부인은 가만 보면, 귀여운 구석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16550635482454.jpg“……?”

작게 웃으며 말한 그레이안이 사뭇 섬세한 동작으로 내 발에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나는 ‘귀여운 구석이 많다’라는 말에 내심 당황한 채로 머뭇거렸다.

16550635482454.jpg‘그냥 해본 말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마 그는 평소에도 타인에게 그런 말을 자주 하고 살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자각 없이 상냥하게 구는 것도 유죄야!

16550635482448.jpg“……발목도 정말 가늘군요. 부인은 목도, 팔도 정말 가느다란데.”

그가 한 손으로 내 오른쪽 발목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입만 뻐끔거렸다. ……뭐지? 이 상황은 뭐지? 저런 말에는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 거야?

16550635482448.jpg“힘을 주면 너무 쉽게 부러질 것 같아서…….”

그레이안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오묘해졌다. 그가 느직이 말을 이었다.

16550635482448.jpg“앞으로 부인에게는 감히 손가락 하나도 못 댈 것 같군요.”

……저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곤 지금 잘만 만지작거리고 계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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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35482448.jpg“신기합니다. 부인은 살결도 무척 부드럽군요. 마치 실크를 만지는 감촉 같습니다.”

16550635482454.jpg“…….”

이번에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지? 정말로 감촉이 신기해서 만지작거리는 건가? 아니, 내가 무슨 결 좋은 털을 지닌 몰티즈냐! 나는 어이없어하며 발목을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작게 움찔한 그레이안이 나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여태 자신이 한 언행에, 자각조차 없었던 듯한 반응이었다.

16550635482448.jpg“……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16550635482454.jpg“……괜찮아요.”

그레이안이 드디어 내 발을 놓아주었다. 그의 시선을 쓱 피한 나는 멋쩍은 기색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레이안이 내 목을 두고도 가늘다고 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이 늑대……. 그럼 내 목을 보면서도 붙잡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럴 수가! 완전히 늑대로구만! 역시 늑대였어!

16550635482454.jpg‘요망하도다! 여태 얌전한 척을 하다니!’

나는 나의 철벽 수비(Lv. 999)를 다시 가동했다. 그레이안과는 단 1초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성큼성큼 걸어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 놓인 쟁반에는 온갖 음식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음료도 다섯 가지나 되었다. ……이 맛있는 것들을 그레이안이 직접 들고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겠지? 비록 내 앞에서 자꾸 끼를 부리긴 하지만, 착한 늑대인 건 사실이니까. 의자에 앉기 전, 나는 그레이안을 슬쩍 돌아보며 약간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16550635482454.jpg“……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러자 그레이안이 활짝 웃었다. 초여름의 라일락꽃 같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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