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기억 상실이라는 컨셉 (12/144)

12화. 기억 상실이라는 컨셉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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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35270051.jpg‘악! 사람 살려!’

하마터면 창문에 머리를 세게 박을 뻔했다. 그런 나를 그레이안이 품으로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그에게서 깊은 숲속을 거니는 듯한 향기가 났다. 사람을 홀리고 취하게 하는 향이었다. ……이거 진짜 페로몬 아니야?!

16550635270051.jpg‘내 청각, 시각, 후각이 다 위태롭다!’

마차의 흔들림이 잦아진 후, 나는 재빠르게 그레이안의 품에서 벗어나 에이프릴 쪽을 확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이프릴은 매우 반듯한 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다.

16550635270059.jpg“꺗잉!”

에이프릴이 늠름하게 소리쳤다. ‘난 괜찮아!’라는 뜻인 거 같았다. 머, 멋져. 멋진 토끼. 나와는 달리 균형 감각이 좋구나!

16550635270063.jpg“수인은 대체로 순발력, 민첩성, 균형 감각이 뛰어납니다. 토끼 수인도 마찬가지이지요. 완력은 약하지만…….”

오호, 그렇구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을 자처한 그레이안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에이프릴이 폴짝 뛰어올라 그레이안에게 앞발을 휘둘렀다. 피하거나 막을 줄 알았는데, 그레이안은 의외로 얌전히 뺨을 맞아주고는 씨익 웃었다. 그의 허벅지에 착지한 토끼가 불만스럽게 코를 벌름거렸다.

16550635270051.jpg‘……갑자기 왜 때린 거지?’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레이안이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6550635270063.jpg“그래, 완력이 조금 강해졌구나, 에이프릴.”

16550635270059.jpg“끼앵!”

자신 있게 소리친 에이프릴이 마치 복싱을 하는 것 같은 자세로 앞발을 파닥파닥 휘둘렀다. 그러자 그레이안이 손뼉을 쳤다.

16550635270063.jpg“훌륭하구나.”

16550635270059.jpg“꺙!”

이번에는 폴짝 뛰어올라 허공에서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킨 에이프릴이 뒷발을 내질렀다. 역시나 그레이안이 손뼉을 쳤다.

16550635270063.jpg“멋진 기술이로구나.”

16550635270059.jpg“꺄항.”

……별안간 웬 재롱잔치이지?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슬쩍 보니 제이드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16550635270051.jpg‘설마 그레이안도 토끼 에이프릴과 말이 통하는 건가?’

16550635270059.jpg“웅꺄웃.”

16550635270063.jpg“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하구나, 에이프릴.”

음……. 그건 아닌 것 같고. 에이프릴이 갑자기 왜 그레이안을 때렸는지는 알 것 같다.

16550635270051.jpg‘힘세고 강한 토끼라는 걸 증명하려고 그런 거였구나!’

잘은 몰라도, 아까 그레이안이 토끼 수인에 대해 설명할 때 ‘완력은 약하지만…….’이라고 덧붙인 게 에이프릴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16550635270051.jpg‘에이프릴은 전투 토끼이니까, 약하다는 말을 들으면 화날 만하지.’

약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전투 토끼이니까! 공격력이 하나도 없지만!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에이프릴이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16550635270051.jpg‘……뭐지? 칭찬해 달라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 눈치라,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에 빙의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16550635270051.jpg“정말 굉장하다, 에이프릴! 에이프릴은 천재 토끼로구나?”

16550635270059.jpg“끼양.”

뒷발로 서서 몸을 이리저리 꼬던 에이프릴이 깡충 뛰었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해프닝(?)이 벌어진 후에, 우리는 밖으로 나와 마차가 왜 급정지했는지를 확인했다.

16550635300012.jpg“죄송합니다, 각하. 길가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마부가 무척 송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힐끗거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과연, 길모퉁이에 웬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16550635270051.jpg‘이 마을 사람인가?’

목적지인 마을은 바로 코앞이었다. 이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듯싶었다.

16550635300012.jpg“각하, 저희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기사, 빌과 리처드가 그레이안을 향해 공손히 고했다. 그레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빌과 리처드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레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50635270063.jpg“시체 냄새는 아닌데…….”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마 시체라는 말이 주는 불길한 어감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안이 내 쪽을 흘끗 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상냥하기 짝이 없는 미소인데, 이럴 땐 어쩐지 좀 느낌이 묘하단 말이지.

16550635270051.jpg‘그레이안이 나에게 늘 친절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도 나를 수인을 학대한 악녀로 알고 있을 테지……?’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다소 답답해졌다.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레이안의 다정함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니까.

16550635270051.jpg‘아마 속으론 나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고 있을…….’

16550635300012.jpg“으아악!”

그때, 난데없는 비명이 들려와 멈칫했다. 빌과 리처드 쪽이었다. 두 사람의 비명은 아니고, 둘이 부축해 일으킨 행인이 소리친 거였다. 다름 아닌 나를 가리키며.

16550635300012.jpg“그, 글로리아 공주다! 으아아악!!”

그러니까, 길가에 쓰러져 있던 행인의 사연이란 이러했다.

16550635300012.jpg“집에 먹을 게 없어서 나무뿌리라도 캐올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가 그만 마수를 만났지 뭡니까……. 그 길로 도망쳐 여기까지 오다가 그만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마수란, 자연에 흐르는 마나의 영향을 받아 변이한 생물을 일컫는다. 크게 동물형, 곤충형, 식물형으로 나뉘며, 대체로 공격적이고 위험하다. 마수를 능숙히 상대할 수 있는 건 인간과 수인 중에서도 단련된 자들뿐이었다. 그런 마수를 맞닥뜨렸으니 몹시 겁에 질렸을 테지. 그런데…….

16550635270051.jpg‘왜 마수보다 나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지……?’

기분 탓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나를 훔쳐보던 행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

16550635300012.jpg“그, 그런데, 귀공께서는 솔즈베리 공작 각하가 아니십니까.”

16550635270063.jpg“그렇지.”

행인의 물음에 그레이안이 담담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나를 흘끗 보곤, 마른침을 꼴칵 삼킨 행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16550635300012.jpg“저기 저분은…… 아, 아인스턴 왕국의 글로리아 공주님이 분명한데, 두 분이 어쩌다 함께……?”

글로리아와 그레이안의 결혼 소식은 이 마을까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슬쩍 본 그레이안이 옅게 웃고는 조금 부드러워진 어조로 대답했다.

16550635270063.jpg“그녀는 나와 결혼한 사람이야.”

16550635300012.jpg“예……? 결혼……?”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되물은 행인이 나와 그레이안을 망연히 번갈아 보았다. 이어서 행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를 의식하는 것조차 잊은 것 같았다. 기사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쯤 되니 누군가 글로리아를 무서워하거나 미워하는 상황에 적응되려 한다…….

16550635270063.jpg“너를 마을까지 데려다주도록 하겠다. 마침 우리도 이 마을에 볼일이 있으니까.”

16550635300012.jpg“예? 볼일이 있으시다고요? 저희 마을에요? 무, 무슨 볼일이신지……?”

그레이안의 말에 눈을 크게 뜬 행인이 입을 끔뻑거렸다. 리처드와 빌이 행인을 양옆에서 일으켜 세웠고, 그레이안은 다시 고저 없는 톤으로 돌아와 말했다.

16550635270063.jpg“도우러 온 거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되어, 얼마 후 우리는 행인을 데리고 마을에 도착했다.

16550635300012.jpg“아, 아빠!”

16550635300012.jpg“헉! 글로리아 공주다!”

16550635300012.jpg“뭐라고? 진짜?”

16550635300012.jpg“또 우리 마을을 괴롭히러 온 거야……?!”

16550635300012.jpg“쉿! 다 들리겠어!”

이미 다 들었습니다. 글로리아가 정말 지은 죄가 많군요. 나는 쓸쓸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아, 술이 당긴다.

16550635300012.jpg“아빠아!”

16550635300012.jpg“우리 딸……!”

예의 행인은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재회하고 있었다. 아이는 다섯 살 정도로 보였는데,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근처에 없었다. 아이가 배고프다며 칭얼대자 행인은 속상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그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울컥할 것만 같았다. 어쩐지 가슴께가 쓰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슬그머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을 마을 풍경이 시야로 속속들이 들어왔다. 가뭄이 들어 오래 방치해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텃밭, 바짝 마른 강물과 시들어 가는 나무들, 해진 옷을 입은 깡마른 체구의 사람들…….

16550635270051.jpg‘이건…… 너무 심각하잖아.’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한 광경을 보게 되자,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심장이 떨렸다. 이게 다 글로리아의 만행 때문이라니.

16550635270063.jpg“이 마을은 어쩌다 이렇게 심한 가뭄에 들게 됐나?”

16550635300012.jpg“그건, 바로 저 글로리아 공주가―.”

16550635270063.jpg“그건 이미 알아. 자세히 어떤 과정이 있었느냐는 질문이었어. 정상적으로는 이런 가뭄이 들 수 없으니.”

한편에서 그레이안이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쪽을 힐끔거리던 나는 어쩐지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런 날 올려다보며, 내 품속의 에이프릴이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16550635270059.jpg“끼웅…….”

마치 괜찮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만인이 나를 비난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나를 위로해 주다니, 정말로 착한 토끼였다. 나는 토끼 머리와 귀를 쓱쓱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16550635270051.jpg“고마워. 에이프릴은 정말 착하구나.”

16550635270059.jpg“낑……!”

에이프릴이 두 앞발로 내 옷자락을 꼬옥 움켜잡았다. 나도 에이프릴을 좀 더 바짝 당겨 안으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레이안에게 한탄하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16550635300012.jpg“마을에 가뭄이 들게 한 건, 글로리아 공주가 데려온 주술사의 소행입니다.”

16550635270063.jpg“주술사?”

주술사란 마법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였는데, 마법사가 마법식과 마석 등을 이용하며 학문적인 연구자의 성격이 강하다면, 주술사는 본능적으로 이적을 행하거나 저주를 거는 샤먼(shaman)의 성격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주술사는 오래된 나뭇가지 등 자연물을 매개체로 영혼과 소통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주술사가 땅에 가뭄을 들게 했다면,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16550635270051.jpg‘악령을 이용해서 땅에 저주를 거는 방법.’

이 방법은 원작에……. ……나왔던가?

16550635270051.jpg“……?”

뭐지? 원작에 나온 내용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아마 나온 내용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에피소드에서 나온 거였는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16550635270051.jpg‘좀 이상하네.’

16550635300012.jpg“저희들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그 주술사가 요상한 수를 쓰더니 그날부터 마을의 밭이며 강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 지경까지 온 것이지요…….”

16550635270063.jpg“주술사가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지?”

16550635300012.jpg“그게…… 제 기억으론…… 아! 무슨 새까만 나뭇가지 같은 걸 휘두르며 춤 비슷한 걸 췄었습니다요. 참으로 해괴망측했지요.”

얘기를 들어보니 악령의 저주에 의한 가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풀 방법도 하나뿐이다. 제령 의식을 하는 것.

16550635384403.jpg{그럴 리가? 글로리아, 그새 우리를 잊은 거야?}

16550635270051.jpg“……?”

불현듯 머릿속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놀라 움찔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게!

16550635384403.jpg{글로리아는 정말 기억력이 나쁘구나…….}

16550635384403.jpg{글로리아, 너무해.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어?}

16550635384403.jpg{악령의 저주에 관한 건 기억하면서!}

16550635384403.jpg{맞아~!}

나비들이 또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은근히 즐기는 거 같은데…… 날 놀리는 게 재미있더냐.

16550635384403.jpg{어서 우리를 소환해서 이 마을을 다시 풍요롭게 해 봐.}

16550635384403.jpg{맞아, 그게 우리의 능력이니까!}

나비들이 나를 살살 꼬드겼다. 머릿속에 여러 목소리가 울리는 탓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허공을 노려보고 있자니, 에이프릴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귀, 귀여워……!

16550635270063.jpg“부인.”

16550635270051.jpg“……!”

그때였다. 주민들과 대화를 마친 그레이안이 나를 부르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어김없이,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좁혀 오는 맹수 같은 걸음걸이였다. 지은 죄가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나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레이안이 무슨 표정으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보지 않으려 애썼다. 만일 그의 차가운 눈초리를 마주하게 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 상처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6550635270063.jpg“부인,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곁에 멈춰 선 그레이안이 여전히 부드럽고 정중한 투로 물었다. 쌀쌀맞거나, 혹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 예상했던지라 난 못내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다니, 그레이안도 어지간히 좋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로 대답했다.

16550635270051.jpg“네, 물어보세요.”

16550635270063.jpg“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주술사에 관한 질문인데…….”

그레이안의 목소리가 이 와중에도 너무 매혹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16550635270063.jpg“부인은 그 주술사를 어디서 데려오셨던 겁니까? 그 외에도 그 주술사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16550635270051.jpg“그, 그게…….”

큰일이다. 글로리아가 데리고 다니던 주술사 따위, 기억이 날 턱이 있나! 나는 내 유일한 치트키인 ‘원작 내용’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16550635270051.jpg‘미치겠네! 뭐라고 대답하지?’

한참을 갈등하던 나는,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진실을 전부 말한 건 아니었다.

16550635270051.jpg“그게…… 기억이 안 나요.”

끝내, 기억 상실에 걸린 컨셉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래, 이게 편하긴 하지. 누가 뭔가를 물어보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되니까……. ‘악녀 글로리아’가 그러면 파렴치하게 비칠 거라는 점이 문제이지만!

16550635270051.jpg‘흑흑, 이게 최선인 거냐고. 진짜냐고. 아~ 환장하시겠다!’

16550635270063.jpg“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16550635270051.jpg“네…….”

믿기 어려워하는 그레이안의 질문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16550635270051.jpg“사실은 결혼식 날부터…… 기억이 드문드문 끊긴 것처럼 잘 안 떠오르더라고요. 어떤 사실은 확실히 기억하는데, 어떤 건 또 기억이 안 나고…….”

어느 정도는 진실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내가 빙의자라서 그렇다는 사실만 쏙 빼놨을 뿐. 자못 초조한 마음에 그레이안을 흘끗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참 이상해 보이겠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시작한 컨셉, 끝까지 밀고 나가자고.

16550635270051.jpg“잘은 모르겠지만 일종의 병인 것 같아요. 부분 기억 상실증이라고 하던가…….”

16550635270063.jpg“아…….”

그레이안은 짧게 외마디를 흘리더니, 이내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다. 젠장……. 왠지 더한 의심을 사 버린 것도 같은데!

16550635270051.jpg‘하지만 언젠간 시작했어야 할 컨셉질이었어…….’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기억 상실증’이라는 핑계를 대는 방법뿐이니까. 그레이안이 나를 더 의심하게 되었대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대도…… 어쩔 수 없다. 내 속은 하나도 쓰리지 않다! 진짜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나는 아릿해지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16550635270063.jpg“일단…… 알겠습니다. 부인의 상태에 관해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16550635270051.jpg“네, 그래요…….”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싫어.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한단 말인가. 그냥 앞으로 그레이안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녀야겠다.

16550635270063.jpg“그럼, 이 마을을 어떻게 구제할지 생각해 봐야 하는데―.”

16550635270051.jpg“아, 그거라면요.”

조심스럽게 나선 나는 토끼 에이프릴을 그레이안의 품에 안겨 주었다. 집착 토끼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웬일로 얌전했다. 그리고 제이드, 내 사위 후보 녀석은 저만치에 기사들과 함께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계수의 나비들에 대한 건 앞으로 최대한 숨길 작정이었는데…… 하는 수 없지. 이렇게나 심각한 가뭄이 든 마을을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깊게 심호흡한 나는 마음속으로 나비들을 불러냈다.

16550635270051.jpg‘준비됐어. 나와 줘.’

그 즉시, 수백 마리의 나비들이 영롱한 오팔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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