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에이프릴은 알기 어려워2022.01.08.
‘내가 그레이안의 옷을 벗겼다니, 믿을 수 없어……. 난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자고로 술이란 것은 악마의 음료가 아니던가. 괜히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이 광기의 신이기도 한 게 아니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채로 광인처럼 굴었을지도……. 하, 그치만, 이것도 너무 억울하다. 난 원래 주량이 제법 강한 편이었는데! 글로리아의 몸은…… 가녀리고, 저질 체력에, 알코올 쓰레기……!
‘공주님이랍시고 스스로 걷지도 않고 누가 안아서 옮겨다 주고 그랬던 거냐……. 무슨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 이게 몸이야, 마시멜로야?’
글로리아의 말랑말랑한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던 나는, 때마침 쪽문으로 들어온 시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하하하……. 정적 속에서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갈색 머리의 시녀는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내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글로리아 님. 오늘부터 글로리아 님의 전속 시녀로 배정된 안나 허쉘이라고 합니다.”
‘전속 시녀?’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글로리아쯤 되는 신분이면, 하급 귀족이나 기사의 딸이 전속 시녀가 되어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들거나 말 상대를 해 주곤 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네.’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글로리아는…… 아인스턴 왕국에서 데려온 시녀가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결혼식 때 글로리아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들은 식이 끝나자마자 아인스턴으로 가 버렸고…….’
글로리아…… 설마 아인스턴 왕가 내에서 취급이 개차반이었던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흠, 아예 없진 않구나. 왜냐면 글로리아의 친모는 왕의 정식 후궁도 뭣도 아닌, 일개 정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의 친모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지. 이름이…… 뭐였더라? 아니,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빙의한 몸의 친모 이름이 생각 안 나면 어떡해! 누가 묻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는 겨우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에티엔 아슈타드. 귀족도, 기사의 딸도, 하물며 평범한 양민 집안의 딸도 아닌…… 출신을 알 수 없는 떠돌이 점술가였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작가가…… 글로리아를 평면적인 악역으로 묘사한 것치곤, 설정이 묘하게 구체적이란 말이지.’
나는 그 의문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며, 안나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먹게 된 아침 식사는 콩나물해장국밥……! 은 당연히 아니었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수프였는데, 재료는 양파와 닭고기 육수인 듯했다. 그 수프를 몇 입 떠먹다 말고 나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하, 동치미 먹고 싶어…….
‘동치미…… 동치미를 담가 볼까……. 한국의 맛으로 이세계인들을 감동시키는 그런 클리셰적인 전개로…….’
“글로리아 님, 식사가 입맛에 안 맞으신가요?”
“으응? 아……. 아니야. 맛있어! 그냥 숙취로 속이 좀 안 좋아서.”
염려가 담긴 안나의 물음에 애써 웃으며 대답한 나는, 억지로라도 수프를 비워 나갔다.
‘먹기 싫어도 잘 먹어야 해. 글로리아는 체력과 근육량이 너무 허접하니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안나를 통해 어젯밤 있었던 일을 대충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검사 어르신은 주점 주인이 챙겨 줬다니 다행이고, 에이프릴은…… 끝까지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구나.’
과연 집착 토끼. 왜 나한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찮은데 집착하니까 더 귀엽다! 난 일단 에이프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다음으로는, 검사 어르신의 고향 마을에 가 봐야겠어.
‘정말로 심각한 가뭄이 들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검사 어르신 말대로 마을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면…… 내가 그 수습을 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하아, 사고는 글로리아가 치고 수습은 내가 하네.
“에이프릴? 잘 잤니? 나야.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에이프릴의 방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며 묻자, 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당황한 채 머뭇거리는데, 이윽고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사람 모습의 에이프릴이 불쑥 튀어나왔다.
“에이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에이프릴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품에 얼굴을 폭 파묻고 잠시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에이프릴의 등을 토닥거렸다.
‘얘가…… 혹시 날 걱정했나?’
음,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었었으니…… 새엄마로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버렸다. 다신 술 마시지 말아야지. 술 들어간 초콜릿도 안 먹을 거야! 웬수 같은 술!
“에이프릴, 아침 식사는 했니? 어제 잠은 잘 잤고?”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묻자니, 내 품에서 고개를 빼꼼 든 에이프릴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귀여운 눈빛 공격인가?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에이프릴은 오늘도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구나! 나는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을 꼬오옥 끌어안아 버렸다.
“미안, 다시는 술 안 마실게! 나도 내가 고작 맥주 한 잔에 취할 줄은 몰랐어!”
에이프릴은 못내 당황한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느닷없이 토끼로 변했다. 갑작스럽게 부피가 줄어든 탓에 나는 에이프릴을 놓치고 말았다. 방 안으로 쏙 들어가 숨은 에이프릴이 소파 뒤에 서서 나를 훔쳐보았다. 작은 토끼가 뒷발로 서서 저러고 있으니까 너무 귀여웠다……! 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에이프릴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미안. 갑자기 끌어안아서 놀랐니? 다음부턴 진짜로 안 그럴게…….”
“…….”
에이프릴이 구겨진 삼각형 모양으로 눈을 매섭게 떴다. ‘그래놓고 매번 또 그러잖아!’ 하고 따지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화내는 것도 하찮고 귀여워! 나는 에이프릴이 너무 귀여워서 폭주할 것 같은 기분을 자제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약속!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
하얀 토끼가 고개를 슬그머니 내리더니 자신의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망했다. 악수를 두고 말았다. 쟤는 토끼 앞발이지!
“끼우웅……!”
아, 앗, 극대노 토끼다. 예감이 좋지 않은데.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화난 토끼님께서 뒷발을 쿵쿵 구르시더니, 폴짝 뛰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끄악!
“아무튼, 우리 화해했어요! 그렇지? 에이프릴?”
내 무릎에 앉아 있는 토끼의 앞발을 잡고 휙휙 악수했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구겨진 삼각형 눈이었다. 기분이 많이 언짢으신 모양이다.
“부인과 에이프릴이 사이좋게 지내는 듯해 무척 다행이지만…… 에이프릴, 오늘 아침 식사를 걸렀다면서.”
뭐라고? 그랬단 말인가! 어쩐지 토끼 배가 좀 홀쭉하더라니, 밥을 안 먹어서 그런 거였구나!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눈치를 보더니, 별안간 두 앞발로 쓱쓱 세수를 했다. 대답하기 싫어서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 이 녀석…… 가만 보면, 사람을 상대하기 싫거나 곤란한 상황일 때 토끼 모습을 하는 것 같은데.
‘고도의 전략이었냐…….’
“자, 쿠키라도 먹으려무나.”
그레이안이 하얀 토끼처럼 뽀얀 생크림 쿠키를 에이프릴에게 내밀었다. ……잠깐만, 저 쿠키, 토끼 모양이잖아. 아니, 저기요? 이거 괜찮은 거야?
“…….”
에이프릴은 토끼 모양 쿠키를 앞발로 조심스럽게 건네받더니, 이내 코를 씰룩이며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로 훌쩍 뛰어내려, 늑대 모양의 쿠키를 냉큼 집어 들었다. 토끼가 늑대 모양 쿠키를 아그작아그작 씹기 시작했다. 그레이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맛있니?”
“…….”
토끼의 반항심 가득한 까만 눈이 그레이안을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낀 나는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인가’ 싶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그레이안, 여태 이런 식으로 은근히 에이프릴을 놀려왔던 건가……. 아니 그런데 이 집 주방장은 왜 토끼랑 늑대 모양 쿠키 따위를 만드는 거야?! 그거 괜찮은 거냐고?!’
잠시 후, 에이프릴이 쿠키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렇다. 토끼가 토끼 모양 쿠키까지 다 먹어 버렸다. 동족을 먹는 토끼……. 물론 쿠키이지만. 쿠키를 다 먹은 에이프릴은 야무지게 홍차도 마셨다. 난 이제 어떤 풍경이 펼쳐지든 놀라지 않기로 했다. 하하하, 그래, 애초에 원작자가 ‘인간 → 동물’이라고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완결 즈음에 수인에 대한 비밀도 풀릴 것 같았는데. 작가 양반이 갑작스럽게 연중을 때리는 바람에 알 수 없게 됐네…….’
“끼우웅…….”
“응?”
그때, 토끼가 애처롭게 우는 소리가 들려와 생각을 중단하고 시선을 내렸다. 왜 그러나 했더니, 과자 부스러기와 찻물로 다소 지저분해진 자신의 모습이 싫은 모양이었다.
‘깔끔쟁이 토끼.’
나는 설핏 웃으며 냅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냅킨으로 토끼의 입가와 가슴털, 앞발을 성심성의껏 닦아주었다. 그러고 나자 깔끔해진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에이프릴이 가볍게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품에 포옥 안겨들더니, 옷자락에 뺨을 비비적거린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그러듯 말이다. 어쩐지 감동적이었다……!
‘이만하면 에이프릴에게 90퍼센트 정도는 엄마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데…….’
나는 헤헤 웃으며 작은 토끼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나와 에이프릴을 잠자코 지켜보던 그레이안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봐도 봐도 신기하군요. 에이프릴이 누군가를 이렇게 잘 따르는 모습은…….”
“그런가요?”
토끼 이마에 뽀뽀하려다 말고 묻자니, 그레이안이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은회색 눈이 부드럽고 따스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경계심이 많으니까요. 쉽게 마음을 여는 편도 아니고.”
“흐음…….”
왜 그렇게 나를 잘 따르는 거냐고 에이프릴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하는 대신에, 토끼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하며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에이프릴.”
조금 부끄러운 듯, 토끼가 몸을 동그랗게 말며 얼굴을 숨겼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또 뽀뽀하려 했다가, 결국 앞발 펀치를 맞고 말았다……. * * *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따라오는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왜 이 녀석도 함께인 거야!’
검사 어르신의 고향으로 가는 길. 에이프릴은 나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고, 그레이안은 내가 걱정된다며 따라붙었는데, 이 녀석, 제이드는 왜 함께인 건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경치가 정말 좋군요. 역시 엘로윈 왕국은 자연 경관이 훌륭합니다. 저 평야의 풍경은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예요.”
“끼웅?”
“그림이요? 하하, 조금 그릴 줄 알아요. 에이프릴은 미술에 흥미가 있나요?”
“끼이웅.”
달리는 마차 안. 에이프릴과 제이드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말이 통하는 거냐고……! 나는 손으로 살짝 이마를 짚으며, 내 옆자리에 앉은 그레이안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각하, 저 제이드란 녀석을 왜 성에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여기까지 따라오는 것마저 허락하신 거예요……! 딱 봐도 수상해 보이잖아요!”
저놈이 나중에 커서 당신 딸을 이렇게 저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봐봐, 저 눈빛 봐. 벌써부터 에이프릴을 향한 집착의 싹이 보이잖아!
“어제 대화해 보니 괜찮은 소년 같더군요. 검술 실력도 출중하고…… 그래서 기사로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부, 부인, 너무 가깝습니다……. 숨결이…….”
뺨을 살짝 붉힌 그레이안이 처연한 미인처럼 긴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굳어 있던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레이안에게서 황급히 떨어져 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뭐, 뭐야, 저 반응은……! 왜 뺨을 붉히고 난리야? 속눈썹은 왜 또 저렇게 길어? 왜 부끄러워하는 건데?’
참고로 어젯밤 그레이안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환장하실 노릇이었다. 어젯밤에…… 뭐가 있었던 게 확실한데, 정작 나는 기억이 안 나니…… 으아아, 미치겠네!
‘물어보고 싶어도, 지금은 에이프릴과 제이드 앞이라…….’
앞자리를 힐끗 살펴보던 나는, 푹신한 쿠션 위에 앉아 매의 눈을 하고 있는 토끼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얘는 왜 또…….’
토끼는 빵을 굽고 있었다. 비유적인 의미다. 앞발과 뒷발을 쏙 집어넣은 채, 동그랗고 납작한 빵 모양으로 앉아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치아바타 같았다! 하얗고 보들보들할 것 같아! 귀여워! 그런데 왜 매의 눈이지?!
‘매의 눈을 하고 빵 굽는 토끼…….’
토끼 에이프릴은 나를 노려보았다가, 다음으로는 그레이안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코를 씰룩이더니 위협적으로 앞니를 드러냈다.
‘뭐야, 뭐가 불만인 건데……?’
에이프릴이 내게서 홱 등을 돌렸다. 마치 토라진 것처럼 말이다.
에이프릴의 심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토끼 모습을 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꼬리가 보이네…….’
꼬리, 만지고 싶다……. 복슬복슬, 귀여워.
“에이프릴, 꼬리 만져봐도 돼요?”
“―?”
제이드였다. 야, 너…… (어이없음) 선 넘지 마라. 그 토끼는 내 귀엽고 소중한 딸이라고! 이 속 새카만 사위 후보야! 그때였다. 덜컹―! 요란한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급정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