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어젯밤 일이 기억이 안 나2022.01.05.
미미미친, 나 뭔 짓을 한 거지? 왜 그레이안이 웃통을 깐 채로 내 옆에서 잠들어 있지? 에이프릴은?!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하다가 그레이안을 깨우고 말았다. 은빛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가득 담기더니, 그가 살짝 눈매를 접어 웃었다. 기가 막히게 요망한 미소였다!
“부인,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소리래……. 당신 눈에는 지금 이 상황이 굿모닝으로 보여요? 나 어제 필름 끊기고 대체 뭔 짓 한 건데!
“음, 여섯 시로군요……. 아직 이른 아침이니까, 더 주무셔도 됩니다.”
그리 말하며 그레이안은 내 몸 위로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몹시 자상한 행동이었다. 또 어김없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말이다. 이 남자…… 진짜 유죄야!
‘습관처럼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나는 이불을 홱 걷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그레이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 그의 목 아래로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더는 잠이 안 올 거 같으니 그냥 일어날게요.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가 혹시 실수했나요?”
“실수라…….”
그레이안이 말꼬리를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미소였다. 뭐, 뭔데? 나 정말 파렴치한 짓이라도 한 거냐고……!
“일단 옷부터 입으시고, 물부터 드시지요, 부인. 속이 울렁거리거나 두통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레이안이 자못 상냥하고 정중한 투로 물어 왔다. 근데…… 옷? 옷부터 입으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좀 허전…….
“……!”
“부인…….”
“으아아악!!”
재빨리 베개를 집어 들어 그레이안의 얼굴에 패대기쳤다. 퍽! 하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난 후다닥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설마하니 슬립만 달랑 걸친 차림새였을 줄이야! 창피해 미치겠다……! 이불 밖에서 그레이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데도 바로 옆에서 귓가를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설마 이불을 걷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러기만 해 봐……!
“부인, 먼저 벗으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십니까?”
“……?!”
뭐, 뭐, 뭔 소리야! 내가 먼저 벗었다고?!
“그것도 모자라 제 옷까지 벗겨 버리셨으면서.”
“……!!”
아악! 미치겠다! 술이 웬수지! 이게 다 술 때문이야! 내가 다시 술 마시나 봐라! 나는 이불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레이안이 좀 더 큰 소리로 웃는 것 같았다. 저 남자, 즐기고 있어……! 나를 농락하면서 즐기고 있다고!
“부인, 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 걱정 마시고 이불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어제 드신 술로 속이 쓰릴 테니, 아침 식사 거르지 마시고요. 그럼…….”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이내 ‘달칵’ 하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쥐 죽은 듯 있던 나는 슬그머니 이불을 걷고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레이안이 정말로 나가 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내 방이구나.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 머리야.’
뒤늦게 숙취로 인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속이 울렁거리진 않은데. 좀 쓰리다.
‘해장을 해야…… 아, 콩나물국밥 먹고 싶다.’
하지만 이 세계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겠지? 슬프다……. * * * 글로리아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그레이안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즐겁다.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얼마 만이더라. 참으로 오랜만인 듯싶다.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사람이야, 글로리아 아인스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의 결혼은 일시적인 동거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아인스턴 국왕이 화평을 운운하며(사실 그런 척하는 것뿐일 테지만) 제안한 결혼이었고, 그레이안은 조국과 가문을 위해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결혼에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아마 글로리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수인을 싫어하는 그녀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본대도 그레이안은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얼마 후면 이혼하고 떠날 것이 분명한 사람이니까. 그래, 그저 그뿐인 결혼이었는데…….
‘글로리아는 나를, 수인을 경멸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상냥하고 사려 깊다. 그리고 귀엽고, 좋은 향기도 난다. 잠시 멈춰 선 그레이안이 자신의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근처에 남아 있는 것만 같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 늑대 수인들은 후각이 특히 뛰어나다. 단순히 냄새를 잘 맡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지니는 고유의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글로리아에게서는 바닐라와 라일락 향기가 났다. 작약이나 장미 향기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향이었다. 잠자코 맡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향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면,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또 얼굴을 잘 익은 사과처럼 붉히려나. 심장이 두근거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눈이 마주치거나 할 때마다 글로리아의 심박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늑대의 뛰어난 청각으로는 심장 소리가 너무 잘 들리니까.
‘어젯밤에는…….’
그레이안은 창틀에 기대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어젯밤, 글로리아는 만취한 상태로 솔즈베리 공작성에 돌아왔다. 그것도 그레이안의 품에 안긴 채로.
“흐어엉…… 집에 돌아가고 싶어…….”
그녀의 술주정은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집에 돌아가고 싶다’라거나 ‘엄마 보고 싶다’ 따위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글로리아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레이안은 왜인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과의 결혼을 원치 않았던 것 같기는 하다.
“부인은 내가 돌볼 테니, 넌 이만 나가 봐도 된다.”
“네, 주인님.”
시녀를 방에서 내보낸 후, 그레이안은 외투를 벗고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공작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글로리아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던 에이프릴이 자꾸만 생각났다. 겨우 설득해서 방으로 올려보내긴 했지만…… 시녀의 품에 안겨 떠나면서 자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에이프릴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여러 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 경계심 많은 아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글로리아 아인스턴을 친모처럼 따르려 할 줄은 몰랐는데.
“우으음…… 쩝.”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 입맛을 다시는 글로리아를, 그레이안은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고작 맥주 한 잔 마시고 그대로 뻗어 버리다니. 그러고 나서는 억울하다며 엉엉 우는 탓에, 달래느라 진땀을 쏙 뺐다.
‘억울하다라…….’
그레이안의 생각이 자연스레 예의 검사 어르신으로 옮겨갔다. 마찬가지로 만취한 상태였던 검사 어르신은 주점 주인과 아는 사이인지 그 사람이 챙기겠다고 나섰다. 그쪽도 원통하다며 엉엉 울고 있었기 때문에 주점 주인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마차 바퀴가 진흙에 빠졌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가뭄에 들게 했다고…… 정말로 글로리아가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데 그녀는 왜 억울하다며 주정을 부렸을까? 무엇보다 자신이 실제로 겪어본 글로리아는…… 그런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지?’
침대맡에 조심스럽게 앉은 그레이안이 슬며시 손을 뻗어 글로리아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실크 같은 금빛 머리카락이 손에 차르르 감겼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던 그레이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인사불성인 사람에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미약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손을 거두어들인 순간이었다.
“……!”
글로리아가 누운 자리에서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레이안을 빤히 노려보던 그녀가 별안간 한숨을 내쉬었다. ‘환장하시겠네.’와 같은 뉘앙스의 한숨이었다.
“하아, 왜 꿈에도 나오는 거야? 미치겠네…….”
‘……꿈?’
아무래도 그녀는 이 상황을 꿈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왜 꿈에도 나오는 거야?’라니, 그 말은 꼭…….
“이 요오오망한 늑대!”
“……!”
그때 갑자기 글로리아가 그레이안의 양 뺨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그녀와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알싸한 알코올 향과 함께 그녀 특유의 체향이 확 풍겨 왔다. ……그레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칵 삼켰다.
“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일부러, 막…… 눈웃음치고…… 아아, 미치겠어. 사람 홀리려고 작정을 했어, 아주.”
의외로 진실을 간파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 죄 많은 늑대 같으니라고…… 그렇게 아무나 막 홀리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
아무나 홀리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 오해만큼은 언젠가 제대로 정정해 줘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요, 늑대 모습일 때 털 색도 머리 색처럼 까만색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푸르스름한 윤기가 도나? 궁금해지네…….”
이번에는 글로리아가 그레이안의 머리칼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 느낌이 기분 좋아서, 그레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우와, 방금 진짜 강아지 같았어.”
“……?”
글로리아의 혼잣말을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레이안이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속눈썹을 내리깔며 뺨을 살짝 붉히는데, 글로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맞다, 우리 그거 안 했잖아요.”
“예?”
“첫날밤!”
뜬금없는 소리에 놀랄 새도 없었다. 글로리아가 그레이안을 습격했다. 갑자기 그를 밀쳐 넘어뜨리더니, 그의 허리 위에 냉큼 올라타는 게 아닌가. 그레이안은 당황한 채로 눈만 깜박거렸다.
“당신 말이야, 첫날밤에 손만 잡고 자는 게 어디 있어? 늑대 맞냐고~!”
“…….”
아무래도 그녀는 늑대라는 동물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듯싶었다. 늑대는 음흉한 동물이 전혀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자신은 수인이었으니, 엄밀히 말해 진짜 늑대는 아니기도 하고…….
‘각인에 대해서는…… 언젠가 설명해야 하려나.’
“꿈에서라도 본전 뽑아야겠다. 하하하…….”
글로리아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그레이안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그레이안은 진심으로 당혹스러웠다. 말려야 하는데, 그런데…….
“늑대 공작님, 어떻게 이런 미인을 두고 손만 잡고 잘 수 있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당신도 정말 미인이네요. 눈이 꼭…… 달빛 같아요…….”
살짝 눈매를 접어 웃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왜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이게 각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아, 더워. 술 마셔서 그런가…….”
“……!”
그때였다. 난데없이 글로리아가 옷을 홱홱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와 팔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레이안은 굳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속 깊은 곳 어딘가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난감함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그러고 주무시면 분명 추위를 타실…….”
“아, 뭐래.”
슬립만 한 장 걸친 모습이 된 글로리아가 그레이안의 셔츠를 거칠게 벗겨 버렸다. 그레이안은 얼굴을 화악 붉히며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그러자 글로리아가 화난 듯 소리쳤다.
“아, 뭐야! 구경 좀 하자!”
“아, 아니…….”
“내 남편인데 보지도 못하고~.”
“부인, 지금 이거 주정 부리시는 겁니다…….”
“와, 진짜 탄탄하다…….”
“…….”
그레이안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 * *
‘기억이 안 나.’
젠장…… 내가 어젯밤에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암만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