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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집착 토끼와 알코올 쓰레기 (9/144)

9화. 집착 토끼와 알코올 쓰레기2022.01.01.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깜박였다. 그레이안이 왜 여기에 있지?

16550634822947.jpg‘설마 나한테 미행을 붙인 건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역시, 겉으론 상냥하게 웃어 주면서 속으론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거지……!

16550634822947.jpg‘억울해……!’

나쁜 건 내가 아니라 글로리아인데. 물론 지금은 내가 글로리아이지만. 그 글로리아가 이 글로리아가 아니라고요.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미치겠네. 사실대로 말했다간 미친 사람 취급당할 게 뻔하고…… 하아아아.

16550634822961.jpg“에이프릴, 그 모습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을 향해 자못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에이프릴은 살짝 몸을 떨더니, 왜인지 내 뒤에 쏙 숨어 버렸다. 으음?

16550634822947.jpg‘역시 그레이안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원작에선 그 이유가 뭐였더라…….’

흠, 나중에 에이프릴과 진지하게 대화해 봐야겠다. 상담이라면 자신 있다. 친구들의 재미도 없는 연애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줬던 나니까. 하하하……. 왜 눈물이 나지.

16550634822961.jpg“음……. 어쨌든 부인과 에이프릴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양이로군요. 다만…….”

말을 흐린 그레이안이 문제의 검사 어르신을 흘끗 보았다. 야성이 느껴지는 은회색 눈에 사나움이라 부를 만한 광채가 얼핏 감돌았다.

16550634822961.jpg“이게 무슨 소란인지…….”

그레이안이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에 검사 어르신이 조금 움찔했다. 늑대들의 수장은 용감한 검사 어르신마저 겁먹게 만드는구나……! 그나저나 저 어르신,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습격했던 거지?

16550634822983.jpg“소, 솔즈베리 공작 각하께는 무척 송구하오만, 나는 저 여자에게 볼일이 있소!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어르신의 화법은 공작에게 말하는 것치곤 조금 예의에 어긋나긴 했다. 하지만 엘로윈 왕국의 분위기는 원래 좀 너른 편이라고 한다. 아인스턴 왕국과는 다르게, 신분의 귀천을 크게 따지지 않는다나.

16550634822961.jpg“‘저 여자’라니…… 그녀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입니다, 어르신.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시지요.”

역시 그레이안. 자신이 공작임을 내세워 권위적으로 나오기보다는, 연장자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품성이 참 올곧고 바른 사람이라니까.

16550634822983.jpg“허어…… 말도 안 돼. 솔즈베리 공작 각하께서 정말로 저 여자와 결혼하셨단 말이오? 아인스턴의 악녀와? 참으로 말세로구먼!”

기가 차다는 듯이 말을 토해낸 검사 어르신이 크게 혀를 찼다. 그 순간 그레이안의 눈빛이 일변했다. 뭐랄까, 저절로 주춤하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검사 어르신이 선을 넘으신 것 같은데……?

16550634822961.jpg“……내가 좋게 말하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어르신.”

습관적으로 두르고 있었던 듯한 온화함이 싹 사라지고, 그레이안에게서 차가운 한기만이 감돌았다. 그에 검사 어르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구경꾼들과 기사들마저 흠칫거렸다. 그러나 단 한 명, 제이드만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그레이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흥미로운 상대를 발견한 것 같은 눈빛으로. 역시 범상치 않은 녀석이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16550634822961.jpg“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 부인을 습격했으니 마땅히 그에 대한 추궁과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끌고 가라.”

16550634840214.jpg“예!”

그레이안이 고갯짓하며 명령하자 그의 기사들이 검사 어르신을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검사 어르신은 마구 발버둥 치며 악을 써댔다. 정확히 나를 노려보는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16550634822983.jpg“이거 놓으시오! 글로리아 아인스턴! 너만큼은 절대 용서 못 한다! 너 때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굶어 죽게 생겼어!”

16550634822947.jpg‘……이게 무슨 소리지?’

당황한 채 굳어 있던 나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 검사 어르신을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난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16550634822947.jpg“잠깐만!”

16550634822961.jpg“부인?”

그레이안이 약간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16550634822947.jpg“저 어르신의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말고, 다른 곳으로 가죠. 저렇게 막무가내로 어르신을 연행하지 말고…….”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레이안의 표정이 어딘지 이상했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야 그레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을 꺼내놓았다.

16550634822961.jpg“알겠습니다. 부인의 뜻대로 하지요.”

16550634822947.jpg“……! 고마워요!”

반사적으로 활짝 웃은 나는, 내가 그레이안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그것도 그의 팔을 손으로 꼭 붙든 채로 말이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레이안에게서 후다닥 떨어져 섰다. 그런 나를 보며 그레이안이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웠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할 뿐이었다.

16550634822947.jpg‘하, 심장 두근거려 죽겠네.’

이 와중에도 내 심장은 눈치도 없이 그레이안에게 설레고 있었…… 아니, 설레는 거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되어, 나와 에이프릴, 그레이안을 비롯한 일행은 어르신을 모시고 인근의 한적한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을 선택한 건 어디까지나 내 아이디어였다. 어르신에게 술을 좀 사드리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해서…… 생각해 보니 정말로 한국인 다운 발상이다……. 어쨌든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고, 소란을 피우지 않고 주점에 도착한 거까진 좋았는데―

16550634822947.jpg“에이프릴, 제이드. 너희는 미성년자이니까 호위 기사들과 함께 2층에 가 있어. 주인장에게 남는 방을 내어달라고 할게.”

라는 내 말을, 에이프릴이 듣지 않으려 하는 게 문제였다. 에이프릴은 내가 저 말을 하자마자 분홍 눈을 번뜩이더니(진짜로 사납게 번뜩였다. 맹수인 줄 알았다.)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껴안고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 모습을 본 그레이안은 대놓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에이프릴이 양아버지인 자신보다도 악녀로 소문이 자자한 나를 더 잘 따르고 있으니. 난 작게 한숨을 쉬며 에이프릴을 다독였다.

16550634822947.jpg“에이프릴, 어른들 술 마시는 데 어린이는 있는 거 아니야.”

16550634858374.jpg“어리지 않아요. 이제 생일이 지나면 열세 살이 되는데……!”

에이프릴이 내 허리를 꼭 껴안은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으음, 13세부터 사교계 데뷔를 할 수 있으니 엄청 어리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어린 게 맞다! 성년이 되는 19세까지 약 6년이나 남았잖아! 게다가 19세와 13세는 천지 차이란 말이지. 나는 끙끙거리며 에이프릴을 떨어트려 놓으려 애썼다. 아니, 얘, 무슨 힘이 이렇게 세?

16550634822947.jpg‘역시 힘세고 강한 아침 토끼로구나……!’

그렇다. 에이프릴은 여태 미라클 모닝을 해 왔던 것이다. 아침형 인간…… 아니, 토끼는 건강하고 힘이 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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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질 체력인 나는 도저히 에이프릴을 떨어트려 놓을 수 없을 듯했다. 누가 좀 도와달라는 눈빛을 사방으로 흩뜨리다가, 그레이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16550634822947.jpg“…….”

그는 멋쩍게 웃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곁에 다다른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어깨에 손을 얹자, 에이프릴이 작게 움찔했다. 그레이안을 올려다보는 에이프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16550634822961.jpg“에이프릴, 새어머니를 곤란하게 하면 안 되지.”

16550634858374.jpg“…….”

입술을 앙다문 에이프릴이 내 허리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끄악. 죽을 거 같아! 숨 막혀!

16550634822961.jpg“에이프릴.”

그레이안이 살짝 엄한 목소리로 에이프릴을 다그쳤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16550634822947.jpg‘아, 아니―.’

에이프릴의 두 눈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는 게 아닌가! 난 못내 당황한 채로 입을 달싹였다. 그레이안을 노려보는 에이프릴의 분홍색 눈이 반항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얘가 벌써 사춘기인가……?

16550634822947.jpg“저기, 에이프릴……?”

내가 조심스럽게 에이프릴을 부른 순간이었다. 갑자기 에이프릴의 모습이 변했다. 순식간에 조그맣고 새하얀 토끼가 되어서는, 내 품에 냉큼 뛰어든다. 나는 반사적으로 에이프릴을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럼 작은 토끼의 몸이 바닥으로 수직 낙하할 테니까!

16550634875202.jpg“끼잉……!”

토끼 에이프릴은 가련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하하하, 웃기만 했다. 진짜 환장하시겠네…….

16550634875205.jpg“에이프릴이 글로리아 님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제이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슬쩍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왠지 속으로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데……!

16550634875205.jpg“저희가 미성년자이긴 하지만, 그냥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저희는 무알코올 음료를 마시면 되죠.”

그것만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는 듯이 제이드가 말했다. 제이드의 목소리는 무척 설득력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 녀석…… 진짜 열세 살 맞아? 사실 인생 2회차 아니야?

16550634875205.jpg“게다가 요새 또 기승을 부리잖아요. 수인 아동 납치범이.”

그러고 보니…… 솔즈베리 성의 하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떠들었었지. 수인 아동 실종 사건. 어린 수인들만 노려 납치해 가는 흉악 범죄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16550634875205.jpg“솔즈베리 공작령의 치안 수준과 호위 기사님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저희도 1층에 함께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도 궁금하거든요. 검사 어르신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지…….”

말끝을 흐리는 제이드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왠지 팝콘 각을 재는 것처럼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아니, 제이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팝콘을 먹고도 남는다! 내가 업보 빔을 맞은 게 흥미진진하다, 이거지!

16550634822947.jpg‘하지만 내가 아니라 글로리아의 업보인데…… 억울하다, 진짜.’

하여튼, 제이드의 의견과 에이프릴의 고집을 받아들여 모두 다 함께 1층에 있게 되었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토끼 모습인 채로 나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 보니 집착 토끼였다. 나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왜지? 에이프릴의 심리는 그레이안만큼이나 파악하기 어렵다.

16550634822947.jpg“에이프릴, 샐러리 먹을래?”

나는 안주로 나온 샐러리를 에이프릴에게 내밀어 보았다. 토끼의 코와 양 볼이 씰룩거리며 수염이 흔들렸다. 수염 만지고 싶다. 그런데 에이프릴이 앞발을 휘둘러 샐러리를 패대기쳤다. 날아간 샐러리가 정확히 제이드의 뺨을 치고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16550634875202.jpg“……!”

에이프릴이 조금 움찔했다. 조금 미안한 듯이, 제이드를 힐끔거리며 두 앞발을 꼼지락거린다. 싱긋 웃은 제이드가 말했다.

16550634875205.jpg“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16550634822947.jpg‘저저저, 저 자식, 너그러운 척하기는……!’

네가 얼마나 비뚤어진 성격인지 내가 다 아는데……! 저놈은 저래놓고 나중에 ‘에이프릴, 그때 샐러리로 내 뺨을 쳤던 거 기억나요?’ 하고 물으며 에이프릴의 죄책감을 자극할 놈이었다. 그런 식으로 제이드가 에이프릴을 손아귀에 넣고 이리저리 굴린 에피소드가 무려 17개에 달한다. 그야말로 계략 집착 흑막의 화신 같은 놈이지! 물론 쟤보다 더한 놈이 있기는 하지만…….

16550634822947.jpg‘그러고 보니 제이드보다 그쪽이 더 걱정이네…….’

제이드는 평범한(?) 인간이기라도 하지, 그 녀석, 남주 후보 3은……. 타앙!! 그때,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와 크게 움찔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예상대로 검사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은 진갈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깊은_원한.jpg의 눈빛이었다. 무, 무서워……! 망할 글로리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16550634822947.jpg‘그런데 저 어르신은 무슨 수인이지? 수인이 맞긴 한가? 그냥 인간일 수도…….’

16550634822983.jpg“글로리아 아인스턴, 1년 전 우리 마을에 저지른 짓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16550634822947.jpg“…….”

죄송합니다. 기억이 없어요. 기억 상실이 아니고 진짜로 없어! 껍데기만 글로리아고 알맹이는 다른 사람이라서! 나는 일단 눈을 내리깔며 반성하는 척을 했다. 저 어르신, 벌써 한 잔 원샷하고 취하신 것 같으니 누가 묻지 않아도 슬픈 사연을 구구절절 다 털어놓으실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르신은 또 한 잔 원샷하고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16550634822983.jpg“우리 마을이…… 원래는 그 일대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었어! 그런데 저, 저…… 글로리아 공주가, 마을 근처를 지나다가 진흙에 마차 바퀴가 빠졌다는 황당한 이유로 주술사를 시켜 마을에 가뭄이 들게 했어!”

아니, 뭐라고? 진짜? 나도 모르게 남 이야기 듣듯 입을 딱 벌렸다. 근데 남 이야기가 맞다. 글로리아…… 진짜 미친 사람이었구나. 대체 왜 그랬대? 마차 바퀴가 빠져서 짜증이 났나? 그런 이유로 마을 하나를 가뭄에 들게 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매우 비상식적이었다!

16550634875205.jpg“어떻게 그런 짓을…… 글로리아 님, 너무하셨네요.”

어르신 옆에서 제이드가 맞장구를 쳤다. 거기 소년, 얌전히 따뜻한 우유나 홀짝여라. 어른들 얘기하는 데 끼어들지 말고.

16550634822983.jpg“너무했지! 너무해도 정말 너무했지! 그 탓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흐흐흑…… 흐윽……!”

갑자기 어르신이 울기 시작했다. 제이드도 옆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저놈이 어디서 눈물 연기를……. 자꾸 그러면 넌 사위 후보에서 제외한다!

16550634822983.jpg“끄흐흑…….”

30분쯤 후에 어르신의 한탄이 끝났다. 말하는 내내 맥주를 큰 잔으로 10잔이나 마신 어르신은 결국 그대로 뻗어 버렸고, 난 나를 향해 꽂혀 오는 책망의 시선들을 견뎌야만 했다. 다들 시선만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진짜로 그런 짓을 했어요?’

16550634822947.jpg‘내가 한 거 아니야.’

억울하다, 억울해! 나도 울고 싶다! 차라리 미친 척하고 기억 상실이라고 우겨 볼까……. 그런데 그게 더 가증스러울 듯. 잘못을 저질러 놓고 기억을 홀랑 잊다니. 그냥…… 개과천선한 척하자. 그게 낫겠어. 아, 술이 당긴다. 난 ‘에이프릴 앞에선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도 잊고 맥주 큰 잔을 꿀꺽꿀꺽 다 마셔 버렸다.

16550634822961.jpg“부인…….”

빈 잔을 쾅 내려놓자니 그레이안이 당황한 기색으로 불렀다. 왜, 뭐, 나도 한 잔쯤 하겠다는데―

16550634822947.jpg‘……음?’

뭐야, 왜 이렇게 급격히 어지럽지? 시야가 흐린데? 잠깐만, 설마, 글로리아가 알쓰(알코올 쓰레기)였어?!

16550634822947.jpg‘이럴 수가! 그럼 앞으로도 술 못 마시는 거냐고! 내 인생에 얼마 안 되는 낙이……!’

그 생각을 끝으로 필름이 툭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앞에……. 상의를 홀랑 벗은 그레이안이 있었다.

16550634822947.jpg‘으아악!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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